33화
‘역시 이 자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더스틴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봤을 때부터 엘리시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거절로 인해 분노한 그가 시비를 걸어올 것이 뻔했으니까. 그래서 자리도 그녀의 바로 옆자리로 한 것이리라.
별로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뒤틀린 그를 건드려 좋을 것도 없었기에 그녀는 담담히 답했다.
“결과야 나오는 대로 따르면 되지만 저로 인해 저렇게 의견대립을 하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결과가 나오는 대로 따르면 된다? 내가 후작에게 선택권을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안 그래도 꼬여있던 사내의 목소리가 더 꼬이는 것이 느껴져 엘리시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스틴은 화가 더 많이 난 것 같았다. 이글거리는 분노가 그녀의 피부를 통해 전해질 정도였다.
그녀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그는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 제안을 거절할 리 없겠지.”
믿는 구석 없어도 너 같은 놈에게는 가지 않을 거거든?
순간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 온 말을 꾹 눌러 삼킨 엘리시아는 대답을 고민했다.
뭔가 적당하면서 슬쩍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대답을.
그때 그녀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주기라도 하듯 돌로렌스 백작, 아리아의 높은 톤의 목소리가 다른 귀족들의 목소리를 누르고 회의장에 울렸다.
“다른 걸 다 떠나 그날 상황에 대해 수장님께 먼저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자리에서 일어선 아리아는 엘리시아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못마땅한 듯 눈꼬리를 매섭게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베르텐 후작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증거도 없이 무작정 믿을 수 없다며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베르텐 후작님?”
나이스, 아리아.
엘리시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리아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것도 물론 고마웠지만 더스틴이 던진 곤란한 질문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 더욱 고마웠다.
하지만 그런 내색 없이 그녀는 더스틴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답변은 회의 끝나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돌로렌스 백작의 말처럼 지금은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으득 하고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애써 외면한 채 엘리시아는 베르텐 후작을 쳐다보았다.
아리아가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들어와서인지 베르텐 후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리아의 말이 맞지. 내가 꿔다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토론이든 투표든 당사자의 해명부터 들어보고 나서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베르텐 후작이 은근슬쩍 그 단계를 생략해버린 것이다. 그것을 아리아가 놓치지 않고 짚은 것이었다.
엘리시아를 따르는 귀족들의 불만 어린 시선이 베르텐 후작에게로 쏠렸다. 반수가 안 되기는 해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숫자는 아니었다.
잠시 침묵하던 베르텐 후작이 입을 열었다.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에는 못마땅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수장께서 공식 성명을 냈기에 별도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소만, 여러분들의 생각이 그렇다면 들어봅시다.”
엘리시아는 어이가 없었다. 당연한 절차를 진행하면서 선심 쓰듯 말하는 것이 웃기지 않은가.
상황이 불리하다고 해서 참을 그녀가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엘리시아는 누가 봐도 비웃는 얼굴로 베르텐 후작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베르텐 후작께서는 참 통찰력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
무슨 소리냐는 듯 베르텐 후작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제가 낸 공식 성명만으로도 상황을 모두 이해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성명서에는 단 세줄 밖에 적혀 있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감탄할 수밖에요.”
“그건……!”
“연회의 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데이모스 공작 각하가 구해주셨고 아침이 돼서야 공작저에서 눈을 떴다. 공작 각하의 옷을 빌려 입고 후작저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신문 기사에 난 것처럼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성명서의 내용을 그대로 읽은 엘리시아는 베르텐 후작에게서 시선을 돌려 귀족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마찬가지로 베르텐 후작의 의견에 동의하신 분들에게도 묻고 싶군요. 이 세 줄의 성명만으로 정말 이해가 다 되었습니까?”
라세트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이 서로서로 눈치를 보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그중 쓸데없이 용감한 자도 있었다.
라세트 공작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는 것인지 오르테 자작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해왔다.
“흠흠. 그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가요? 그럼 오르테 자작에게 묻겠습니다. 그날 내가 어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는지, 무슨 이유로 남장을 하고 후작저로 돌아왔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 그건…….”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오르테 후작을 노려본 엘리시아는 귀족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다 이해를 하셨다. 여긴 정말 통찰력이 좋은 분들만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귀족들이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엘리시아의 말을 반박하는 귀족은 없었다.
베르텐 후작도, 라세트 공작도 입을 다문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자신의 쪽으로 몰고 온 엘리시아는 일부러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답답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귀족들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제겐 특정 식료품에 대한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조나단 트리엘 남작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그 식료품이 들어간 칵테일을 제게 건넸고 그것을 마신 후 극심한 부작용을 겪었습니다.”
“저런!”
“어머나!”
여기저기서 놀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두 엘리시아를 따르는 귀족들이었다.
아리아는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나 다급히 묻기까지 했다.
“지금은 괜찮으신 건가요, 카멜리아 후작님?!”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어 고맙습니다. 돌로렌스 백작.”
아리아를 안심시킨 엘리시아는 귀족들을 둘러보며 스캔들에 대한 해명을 이어나갔다.
“부작용이 나타난 것을 알게 된 저는 제 호위기사를 찾아 홀 밖으로 나왔습니다. 열이 오르며 정신이 혼미해지더군요. 비틀거리고 있을 때 만난 분이 데이모스 공작 각하십니다.”
실제로는 이케르의 몸 위에서 눈을 떴기에 그녀의 양심이 쿡 하고 찔려왔지만 무시했다.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테스케 경을 조용히 불러달라고 말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는 기억나지 않더군요. 공작 각하에게 여쭤보니 바로 정신을 잃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 공작저로 저를 데려갔다고 했지요.”
엘리시아가 거기까지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베르텐 후작이 날카롭게 질문해왔다.
“그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후작이 쓰러졌으면 후작저로 데리고 가야지, 왜 공작저로 데려간단 말입니까? 황궁의도 부를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날 황궁의는 급한 용무로 황궁을 비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구토를 심하게 해서 저와 각하의 옷이 모두 더럽혀진 상황이라 일단 공작저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
조금 전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입을 다문 베르텐 후작을 보며 엘리시아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녀가 말하는 시나리오는 루리엔과 머리를 맞대고 짜낸 것이었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귀족이 자신의 옷이 구토물로 더럽혀진 상황에서 다른 귀족 가문을 방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그 외에도 루리엔과 그녀는 꼼꼼하게 그날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귀족들이 의문을 가질만한 부분들을 모두 감안한 시나리오였다.
물론 완성된 시나리오는 이케르에게도 전달되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입을 맞춰두기 위해서였다.
의외였던 건 그가 두 사람이 생각지 못한 부분 한두 개를 짚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날 황궁의가 출궁한 것 역시 이케르가 보내준 서신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시나리오는 완벽에 가깝게 완성된 상태였다.
그러니 엘리시아로서는 대답함에 있어 겁날 것이 없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해명을 계속해나갔다.
“다음날 공작 각하께서는 후작저에 연통을 넣어 옷을 가져다주겠다고 하셨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그랬다가는 파파라치나 신문기자의 눈에 띄어 시끄러워질 것이 뻔히 눈에 보였으니까요. 그래서 남장을 하고 후작저로 돌아왔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태까지 온 걸 보니 그날 아침 제 판단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길게 말했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너희들이 이렇게 나올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 행동했던 거라는 일침이었다.
그녀의 말속에 포함된 뜻을 눈치챈 베르텐 후작과 그녀를 공격했던 귀족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에 반해 그녀를 따르는 귀족들의 얼굴은 환해졌다.
지금까지 엘리시아가 한 말 중에 꼬투리를 잡거나 시비를 걸만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은 회의장을 둘러보면서 엘리시아는 속으로 심호흡을 깊게 했다.
논리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차단했다. 이제 저들에게 남은 무기는 하나뿐이었다.
‘자, 그럼 이제 우기기로 나올 차례인가.’
분명 저들은 그녀가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을 끄집어내서 공격할 터였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그녀의 정면에 있던 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집사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그녀의 눈이 집사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느낀 것일까, 순간 회의장에 침묵이 내려앉으며 라세트 공작에게 빠르게 다가서는 집사에게로 귀족들의 시선이 쏠렸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계속해서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던 더스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엘리시아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푸른 눈과 마주칠 걱정 없이 라세트 공작 쪽을 곁눈질할 수 있었다.
집사에게 보고받고 있던 라세트 공작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인가 보네.’
그렇지 않고서야 라세트 공작이 저렇게 인상을 쓸 리가 없었다.
라세트 공작으로부터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화가 끝나는지 집사가 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엘리시아는 재빨리 고개를 바로 했다. 혹시라도 더스틴과 눈이 마주칠까 싶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고개를 바로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전보다 더 따가운 느낌이었다.
‘왜 저래?’
엘리시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을 때였다. 베르텐 후작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회의장에 울렸다.
“해명은 잘 들었습니다, 카멜리아 후작. 그렇다고 해서 의혹이 모두 풀린 건 아닙니다. 공작가에 가게 된 것이나 남장을 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데이모스 공작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부작용에 취해 고열을 앓고 구토까지 한 사람이 상식적으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거야 모르지요. 후작이 말한 그 식료품의 부작용에는 고열과 구토도 있지만 성적 욕구를 증가시키는 부분도 있다고 알고 있어서 말입니다.”
어깨를 으쓱한 베르텐 후작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려 비틀며 되물어왔다.
“그 부작용 ‘덕에’ 데이모스 공작 각하와 뜨거운 밤을 보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자식이!
뒷머리에 힘줄이 잡히는 것을 느끼며 엘리시아가 반박하려 했을 때였다.
홀의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저음이 울려 퍼졌다.
“베르텐 후작의 지금 그 말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
그녀뿐 아니라 희의장 안에 있던 모든 귀족의 시선이 순식간에 문으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