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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4/133)

34화

잠시 후 귀족들의 얼굴을 가득 채운 것은 놀람과 경악이었다.

엘리시아 역시 별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여유롭고 느긋하게 회의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장신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깔끔하게 올려 넘긴 칠흑 같은 머리카락, 그 아래 빛나는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이 두 가지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이 회의장 안에 없었다.

‘각하께서 왜 여기에……!’

헛것을 보는 건 아닌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엘리시아에게 이케르가 시선을 맞춰왔다.

그의 눈빛이 걱정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눈의 착각일까.

엘리시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사이 이케르의 시선은 그녀를 떠나 라세트 공작에게로 향했다.

금안에 깃들어 있던 온화함은 씻은 듯 사라지고 평소처럼 무심하게 돌아와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라세트 공작이었다.

“귀족파의 회의에 황제파의 수장께서 어인 행차이신지? 기껏 발걸음을 했는데 돌려보낼 수 없어 모시라고는 했소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문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구려.”

불쾌함과 못마땅함이 역력히 느껴지는 표정만큼이나 냉랭한 목소리였다.

보통의 귀족이었다면 움찔했을 정도의 기백이었지만 이케르에게는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 듯했다.

도리어 불쾌한 건 이쪽이라는 듯 이케르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랐다면 사과하겠습니다, 라세트 공작. 나 역시 이곳에 오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뭔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라세트 공작이 되묻자 그는 입술을 늘여 서늘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 이름으로 낸 공식 성명을 믿지 못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자가 있다고 하더군요. 오늘 회의도 그자가 주최했다고 해 확인하러 왔습니다.”

이케르의 말을 듣는 순간 엘리시아는 베르텐 후작을 쳐다보았다.

임시회의 소집장에 그가 데이모스 공작의 성명을 믿을 수 없다고 써놨던 것이 기억나서였다.

그녀뿐 아니라 다른 귀족들 역시 베르텐 후작을 쳐다보자 이케르의 입매에 어린 서늘함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듣게 될 줄이야.”

차가운 조소가 흐르는 이케르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베르텐 후작의 얼굴이 굳어지며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잠시 베르텐 후작을 노려보던 이케르는 회의장 안을 느릿하게 훑었다.

시선에 압도당한 귀족들이 입을 다물면서 순식간에 적막이 내려앉자 그는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회의가 진행되었다는 건 내 말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꽤나 많다는 말이겠지.”

그의 형형한 금안은 정확하게 베르텐 후작뿐 아니라 라세트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을 향하고 있었다.

이케르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라세트 공작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대로 놔두면 분위기가 뒤집히겠다고 판단한 그는 베르텐 후작을 쳐다보며 눈짓했다.

베르텐 후작 역시 당하고만 있기는 싫었는지 안색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에 긴장이 역력하기는 했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카멜리아 후작과 각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씀을 믿기 어렵습니다. 그날 각하께서도 폐하께서 내린 이국의 술을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한쪽은 부작용이, 한쪽은 술기운이 돌았으니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만.”

정중하지만 날이 잔뜩 선 베르텐 후작의 공격에 이케르는 입매를 살짝 올려 비틀었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는데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어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그렇게 느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똑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이케르의 깊고 낮은 저음이 위험하게 깔렸다.

“그대들은 나를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고 음심이나 품는 그런 한심한 자라 생각했던 모양이야. 기분이 무척 더럽군.”

검이 손에 쥐여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것 같은 서슬 퍼런 그의 눈빛에 베르텐 후작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목울대만 긴장으로 간신히 꿀렁일 뿐이었다.

만약 더스틴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베르텐 후작은 이케르의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증명해보시게, 데이모스 공작.”

2황자의 목소리는 분노와 못마땅함으로 잔뜩 뒤틀려 있어 약간의 비아냥거림마저 느껴졌다.

더스틴의 도발에 분노로 짙게 가라앉은 황금빛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베르텐 후작을 압박하던 그 시선이었다.

“증명해 드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케르와 시선이 마주친 더스틴은 갑자기 주변 공기가 무거워지며 아래로 짓눌리는 압박감을 받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지만 눈앞의 사내에게 지기 싫었던 황자는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었다.

“증명해 낸다면 오늘 회의를 끝내도록 하지. 어차피 이번 회의의 중점은 둘의 관계 여부이니.”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회의를 끝내시겠다니. 누가 보면 오늘 참관이 아니라 회의를 주최하신 줄 알겠습니다.”

“……!”

느긋하고 차분한 말투였지만 더스틴에게 굴욕감을 주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참관인으로 왔으면 얌전하게 참관이나 하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반박도 하지 못하고 더스틴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사이 입매를 조금 더 깊게 비튼 이케르의 고개가 다시 베르텐 후작에게로 향했다.

“대답해보게, 베르텐 후작. 후작과 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자네들은 어떻게 할 텐가?”

그의 시선은 얼핏 보면 베르텐 후작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 뒤쪽에 앉아 있는 라세트 공작을 직시하고 있었다.

베르텐 후작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라세트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할지 묻는 그의 눈빛에 라세트 공작이 천천히 이케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날카로운 기류가 튀었다.

잠시 후 라세트 공작의 짙은 눈썹이 꿈틀하며 회의를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그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공작께서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증명해 낸다면 황자전하가 말씀하신 것처럼 이 임시회의를 진행할 명분이 사라지겠구려. 그렇지 않은가, 베르텐 후작?”

물러서라는 라세트 공작의 눈빛에 베르텐 후작의 눈빛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오늘 카멜리아 후작을 수장 자리에서 내쫓지 못하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라세트 공작이 시키는 대로 물러섰다.

데이모스 공작이 저렇게 당당하게 나온다는 건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였고 객기를 부렸다가 도리어 감당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입니다. 공작 각하께서 저희의 의심을 풀어주신다면 굳이 오늘 회의를 진행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기껏 눈앞까지 다가온 기회를 놓으려니 입맛이 썼지만 다음 기회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이케르의 반응은 베르텐 후작이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것 말고도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짙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이케르의 모습에 베르텐 후작은 미간을 살짝 접었다.

눈앞의 사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것 같았지만 그걸 자신의 입으로 내놓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베르텐 후작은 모르는 척 되묻는 것을 택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나와 카멜리아 후작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겠나.”

“…….”

예상했던 대답임에도 베르텐 후작의 입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그리고 엘리시아는 후작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케르에게는 몰라도 그녀에게 사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 라이벌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건 자존심이 엄청나게 상하는 일이니까.

그럼에도 베르텐 후작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통쾌함을 느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어떻게 증명하시려는 거지?’

엘리시아가 의문을 품고 있는 사이 베르텐 후작은 결심한 듯 비장한 얼굴로 이케르를 보며 답했다.

“그러지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각하께서 증명하실 차례이십니다. 무엇으로 증명하실 겁니까?”

“증인이 있다면?”

이케르의 말에 순간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증인? 그날 무슨 증인이 있어?

엘리시아는 내심 당황했다.

갑자기 없던 증인이 튀어나왔으니 그녀로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설마 고용인을 매수해서 증인으로 내세우시려는 건가? 그럼 도리어 반격당할 수 있는데. 각하께서 그걸 예상 못 하실 리는 없고. 누구지?’

엘리시아가 의아해하는 사이 그녀만큼이나 놀란 듯 보였던 베르텐 후작이 곧 침착을 되찾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그럼 직접 보고 판단하게.”

베르텐 후작을 향해 서늘한 미소를 흘린 이케르는 손을 들어 허공에 무엇인가를 그려냈다.

길쭉하고 사내다운 손가락을 따라 허공에 금빛 궤적이 유려하게 그려졌다. 그것은 작은 마법진이었다.

그가 마법을 쓰는 것을 처음 본 귀족들은 놀란 듯했지만, 이전에 본 적이 있었던 엘리시아는 그의 행동에 더 호기심을 느꼈다.

‘마법? 뭘 하시는 거지?’

지켜보고 있던 엘리시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허공에 그려졌던 작은 빛의 마법진이 사라짐과 동시에 이케르가 서 있는 바로 옆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진 것이다.

그 위에 한 남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이 내려앉은 듯한 매끄러운 은빛 머리카락, 노을을 닮은 주홍빛 눈동자.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남자였다.

나이는 이케르와 비슷해 보였는데 놀랍게도 마탑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빛과 함께 마법진이 사라지자 이케르는 회의장의 귀족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묵직하게 울렸다.

“소개하지. 이쪽은 카르젠 레커드요. 여러분들에게는 이름보다 빛의 마법사라는 이명이 더 익숙할 것 같기도 하군.”

빛의 마법사, 카르젠 레커드.

엘리시아 뿐 아니라 회의장 안에 있던 모든 귀족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를 수 있을까, 빛의 마법사라는 이명도 이명이지만 최연소 차기 마탑주로 내정된 사람인데.

작은 왕국의 어린이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거물의 등장에 회의장 안이 술렁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그 술렁임도 이케르가 귀족들을 한번 둘러보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그가 베르텐 후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증인에 대한 후작의 소감은 어떤가?”

“……!”

느긋하고 여유로운 이케르의 질문에 베르텐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주먹 쥔 후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공작저의 시녀나 시종, 보좌관과 같은 고용인이었다면 매수한 것 아니냐고 시비를 걸 수 있었지만 눈앞의 상대는 차원이 달랐다.

‘그나저나 각하께서도 거짓말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 빛의 마법사와 친분이 있으신 것도 몰랐고.’

계속해서 놀랄 일만 생긴다고 엘리시아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회의장을 천천히 둘러보던 카르젠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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