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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36/133)

36화

베르텐 후작이 지금까지 했던 짓들을 생각하면 이대로 몰아붙여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다. 그러면 얼마나 통쾌할 것인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엘리시아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케르가 준비한 거짓 증인 덕분에 무사히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녀가 그와 몸을 섞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단순히 복수를 위해 양심을 저버린다면 그녀 역시 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귀족들 앞에서 사과를 하면 저 남자는 분명 내게 이를 갈고 달려들겠지.’

상대의 증오와 분노를 늘려서 무엇을 하겠는가. 지금 저 남자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도 충분히 피곤한데.

속으로 한숨을 내쉰 엘리시아는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베르텐 후작께서 제게 조용히 하실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리를 좀 비켜주겠어요?”

엘리시아의 말에 아리아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은 서로서로 근심 어린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녀를 베르텐 후작과 단둘이 놔둬도 되는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잠시 후 아리아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후작님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엘리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리아와 귀족들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회의장을 나가면서도 그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자꾸만 엘리시아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베르텐 후작을 한 번씩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이 홀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엘리시아는 팔짱을 낀 채 베르텐 후작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짐작이 맞았던 모양이다. 주변의 시선이 사라지고 나자 베르텐 후작은 훨씬 편해보였다.

“다 갔으니 말해보시죠.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후작을 의심했던 것, 미안합니다.”

드디어 닫혀있던 베르텐 후작의 입이 열리며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진심이라기보다는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럼 그렇지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퉁명스레 답했다.

“제가 오해를 할 만한 여지를 제공한 건 사실이니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시면 좋겠군요.”

“…충고 기억하겠습니다.”

그게 충고를 기억하는 눈빛이니? 두고 보자는 눈빛이지.

자존심이 제대로 상했는지 눈빛을 섬뜩하게 빛내며 몸을 돌려 나가는 베르텐 후작을 보며 엘리시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냥 귀족들 앞에서 사과하게 만들 걸 그랬나?’

괜한 배려를 한 것 같다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저음이 부드럽게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마음이 약하군, 후작은.”

“각하?”

엘리시아가 고개를 돌리자 카르젠과 함께 그녀에게 걸어오는 이케르의 모습이 보였다. 회의장 안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것 같았다.

그녀의 앞까지 다가온 이케르는 베르텐 후작이 나간 홀의 뒷문을 눈짓하며 말했다.

“배려한다고 해서 달라질 사람이 아니라는 건 후작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마도 그는 그녀가 베르텐 후작의 입장을 생각해 귀족들을 내보낸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그렇긴 합니다만 저도 잘한 건 없어서요. 솔직히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고.”

머쓱한 마음에 볼을 긁적이던 엘리시아는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나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각하와 친구분 덕분에 무사히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진심 어린 인사에 이케르는 길게 뻗은 수려한 눈꼬리를 살짝 접었다.

“나야말로 후작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기쁘군.”

“약속이요? 무슨….”

어리둥절하던 엘리시아는 그가 말한 약속이 무엇인지 기억해냈다.

이케르가 그녀의 침실로 찾아왔던 그 밤, 그가 했던 말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후작. 그날 그대가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약속하지.]

그녀의 두 눈이 혼란을 담고 흔들렸다.

그때도 그렇고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케르는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과의 스캔들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될 경우 구해주기 위한 모든 것을.

‘어째서 이렇게까지…….’

단순히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라고 치부하기에는 받은 배려가 너무나도 과했다.

눈앞의 남자가 왜 이렇게 잘해주는지 알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던 엘리시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아랫입술에 닿아온 것이다.

검을 잡아서인지 굳은살이 단단하게 배인 손가락이 물려 있는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끌어내렸다.

“머리를 박는 것 외에도 고쳐야 할 습관이 하나 더 있었군. 이러면 예쁜 입술에 상처가 나지 않나.”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귓가에 내려앉은 깊고 낮은 목소리가 잠잠하던 그녀의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자신만을 온전하게 담고 있는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도, 부드럽게 휘어져 달싹이는 입술도, 모든 것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눈앞의 사내는.

이대로 멱살을 잡고 끌어당겨 키스하면…….

홀린 듯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리던 엘리시아는 웃음기를 띤 낯선 카르젠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연애는 나중에 따로 하는 게 어때? 솔로인 날 약 올리려는 게 아니라면.”

크게 떠진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안 그래도 빠르게 뛰던 심장이 시끄러울 정도로 쿵쾅거렸다.

‘헉!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거야.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엘리시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손을 재빨리 바로 하고 시치미를 뗐다.

그럼에도 빨갛게 달아오른 귀 끝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는 이케르의 입매가 기분 좋게 휘어졌다.

엘리시아가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추스르고 있는 사이 카르젠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카멜리아 후작님.”

달빛에서 뽑은 듯한 은빛 머리카락이 보기 좋게 찰랑이며 그 아래 노을을 연상시키는 주홍빛 눈동자가 호감을 띠고 빛났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남자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니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남자네.’

엘리시아는 카르젠의 외모에 감탄했다. 무척이나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일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그의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죠, 후작님.”

“예?”

뜬금없이 뭐가 아니란 말인가?

당황한 엘리시아가 눈을 깜빡이자 카르젠은 손가락을 들어 휘휘 저었다.

“오늘이 아니라 그날. 그날이라고 하셔야지요. 제가 후작님을 도와드린 건 그날이니까요.”

“아….”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녀석이 제 빚까지 청산해 주면서 부탁한 거짓말이니 완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엘리시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거짓말을 위해 빚을 청산해줬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그녀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무뚝뚝한 이케르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의 말에 신경 쓸 것 없네, 후작.”

못마땅한 표정으로 카르젠을 보며 혀를 쯧 하고 찬 이케르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리 내놓으라는 그의 눈짓에 피식 웃은 카르젠은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있으니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그리고 우리 후작님도 알아야 할 것 아냐. 네가 그녀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카르.”

이케르의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띠자 카르젠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싱긋 웃었다.

“알았어. 나야 네가 빚을 청산해줘서 고마울 뿐이지. 마탑을 내달라고 해도 내줄 수밖에 없는 빚인데.”

“안되겠군.”

짙은 눈썹을 꿈틀한 이케르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카르젠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 기다려봐, 농담 좀 했다고 이러는 건 너무하잖아. 오랜만에 봤는데.”

하지만 이케르의 두 번째 손가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가 그린 작은 금빛 마법진이 완성되는 순간 카르젠을 중심으로 바닥에 또 다른 마법진이 생겨났다. 거리를 두고 대화하고 있던 엘리시아까지 포함될 정도의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자신의 발아래 그려진 고대문자들을 당황하여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단단하고 강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오자 움찔했다.

따스한 숨결과 함께 나직한 이케르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울렸다.

“잠깐 실례하지.”

사내의 팔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그녀의 몸은 어느새 마법진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허리에 팔이 감겨있었지만 빛이 쏟아져 나오는 마법진에 신경이 팔린 엘리시아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허, 기가 막혀서.”

카르젠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마탑으로 소환하는 마법진을 발동시켜놓고 여자부터 챙기는 꼴이라니.

혹시라도 소환마법에 말려들어 갈까 싶어 엘리시아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이케르를 지켜보고 있던 카르젠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빚을 청산할 것이 아니라 이 망할 계약을 없애자고 했어야 하는 건데. 하기야 자업자득이니 어쩔 수 없나?”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여자에게 신경 쓰는 친우의 모습이 신기하고 흥미로워 조금 놀렸더니 바로 이 꼴이었다.

괜히 놀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소환당해버린 것을.

카르젠은 아쉬운 눈빛으로 이케르의 품에 안겨 있는 엘리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국에서도 유명한 바람둥이라고 해서 걱정했더니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네.’

외모만 보고 반했다고 해도 충분히 납득할 정도로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건 둘째치더라도 직접 마주한 그녀의 인상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많이 접해본 그는 엘리시아의 눈빛과 말투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여자들을 돌로 보던 그의 친우가 어디에 홀렸는지는 앞으로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카르젠은 엘리시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후작님, 다음에 뵙지요. 그 목석같은 친구, 잘 부탁합니다.”

장난기가 담긴 마지막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엘리시아가 인사를 받을 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어…. 사라졌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엘리시아는 움찔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우디향이 왜 이리 가까이서 난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든 그녀는 이케르와 곧바로 시선이 마주치자 그대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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