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엘리시아는 강렬한 황금빛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당혹감에 젖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저 바보 같은 표정의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머쓱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슬쩍 눈을 내리깔던 그녀의 시선이 느슨하게 닫힌 이케르의 입매에 머물렀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남자답게 매력적인 입술은 물들이고 있는 색마저도 완벽했다. 게다가 촉촉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본 남자들의 입술 중 가장 완벽한 입술이라고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물론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심지어 거기까지도.
과거에는 정적이라고만 생각해 그냥 잘생겼네, 하고 넘어갔는데 한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니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자꾸만 시선을 끌었다.
아무래도 그래서 그런 것 같았다. 자꾸만 이 남자만 보면 없던 음심이 생겨나는 것은.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오른 본능적인 욕구가 그녀의 이성을 파고들어 막 어지럽히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단단한 팔이 풀려나가며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역시나 익숙한 말과 함께.
“이런, 실례했군.”
그놈의 실례. 맨날 무슨 실례가 그리 많은지.
이제는 외우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던 엘리시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말하기 전에 그가 먼저 알아서 놔줬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 아쉬운 마음은 뭐란 말인가.
‘아무래도 나 미쳤나 봐.’
자괴감이 밀려들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고 있던 그녀는 이케르가 손을 뻗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괴롭히고 있던 입술을 재빨리 놓았다.
그러자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후작은 배움이 빨라. 하지만 이번에는 그대의 추측이 틀렸는데.”
“예?”
입술을 누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이케르의 말에 엘리시아는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가 에스코트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줘보게.”
“……?”
왜 그러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엘리시아는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사내의 매끈하고 길쭉한 손가락이 손등과 손바닥을 감싸오자 그녀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걱정되거나 불안하기는커녕 미약하게 기대감이 솟은 것이다. 또 무엇을 하려나 하는.
‘언제부터 이 남자를 이렇게 신뢰하게 됐지?’
스스로도 대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 휩싸여 있던 엘리시아는 손가락에 닿아오는 서늘한 금속의 감촉에 흠칫 놀랐다.
이케르가 그녀의 가운뎃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있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금색 반지였다.
당혹감이 밀려들었지만 엘리시아는 곧 침작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겪어온 이 남자는 감정적으로 의미가 있는 반지를 상대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끼워줄 만큼 제멋대로이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어 반지를 줬을 거라 판단한 그녀는 일부러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반지입니까? 갑자기 제게 청혼하시는 건 아니실 테고요.”
“하면 받아 줄 텐가?”
“프로포즈도 없이 이렇게 반지만 끼워주면서 청혼하는 건 바로 거절이지요.”
“괜찮은 조언이군. 기억해두지.”
엘리시아의 농담을 받아주면서 이케르는 반지를 손가락 끝까지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놀라운 건 좀 헐거운 듯했던 반지가 그가 손을 떼는 순간 그녀의 손가락 크기에 맞춰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이 반지, 마법이 걸려 있군요?”
신기한 마음에 엘리시아가 반지를 내려다보자 이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리스 부작용을 방지해주는 마법이 걸려 있네. 앞으로 끼고 다니도록 하게.”
그녀는 재차 놀랐다. 헤리스 부작용을 방지해주는 반지라니. 그런데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차기 마탑주가 손수 만든 거니 성능은 믿어도 좋을 거야.”
그의 말을 듣고서야 엘리시아는 이케르가 카르젠에게 내놓으라고 했던 것이 이 반지라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들었던 카르젠의 말도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 후작님도 알아야 할 것 아냐. 네가 그녀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았어. 나야 네가 빚을 청산해줘서 고마울 뿐이지. 마탑을 내달라고 해도 내줄 수밖에 없는 빚인데.]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들은 말대로라면 이케르는 오늘 거짓 증언과 반지의 대가로 카르젠이 지고 있던 어떤 빚을 없애주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보통의 빚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줄 수밖에 없는 그런 큰 빚을.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지?’
만약 이케르가 그녀의 몸만 원했다면 오늘 회의에서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그녀가 그에게 가서 안겼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렇게 말했고.
[그러니 진심으로 빌리고 싶어질 때 말해주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아랫배에 느껴지던 뜨겁고 거대한 욕망의 뭉침. 그럼에도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정말 내 마음이라도 원하는 건가?’
차라리 이케르가 평소 보지 못하던 사람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그녀를 보고 마음에 품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와는 의회에서 무려 2년간 의견으로 대립을 해온 사이였다.
그동안 그가 자신을 여자로 본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느낀 적도 없었고.
‘동정이셔서 그런가? 보통 첫 상대에게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으니.’
혼란스러움을 느끼던 엘리시아는 일단 카르젠이 말한 빚에 대해서라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지닌 감정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 물음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지레짐작하고 물었다가 아닌 경우 그 부끄러움은 모두 그녀만의 몫이었다.
‘그래, 일단 물어도 될 것부터 물어보자. 그 김에 감사 인사도 하고.’
헤리스 부작용을 막아주는 반지는 그녀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었기에 엘리시아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인사했다.
“각하, 반지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카르가 말한 것이라면 흘려버리게. 후작이 신경 쓸 필요 없는 것이니.”
이케르는 눈매를 부드럽게 접으며 그녀의 질문을 사전 차단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넘어갈 엘리시아가 아니었다.
“흘려버릴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마탑을 내달라고 해도 내줄 수 있는 빚을 저를 위해 쓰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갑니까?”
“어차피 사용할 일이 없는 빚이었어. 그 녀석이 억지로 떠넘긴 것이기도 했고.”
대답을 들은 엘리시아는 내심 놀랐다.
‘그러니까 그 빚을 만든 것이 각하가 아니라 그 차기 마탑주라는 사람이라는 거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런 빚을 스스로 만들어 각하께 들이민 거지?’
두 사람 사이의 일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감히 물어볼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제가 각하게 크게 빚진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회의 건도 그렇고 이 반지도 그렇지 않습니까.”
잠시 말을 멈췄던 엘리시아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케르를 쳐다보았다.
“혹시 제게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정치적인 건 빼고요.”
그녀는 진심이었다. 만약 그가 지금 바로 침대로 가자고 해도 불만 없이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이케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역시나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후작에게 원하는 것이라……. 하나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후작이 내게 줄 수 있는 건 아니니.”
입매를 부드럽게 휜 그는 그녀의 반지 낀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붙잡힌 손등이 따스하고 부드러운 입술에 닿자 놀란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어졌다.
꿰뚫을 듯한 강렬한 눈빛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 뜨겁고도 관능적인 시선에 짜릿한 전율이 그녀의 등골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을 시작으로 전신의 살갗이 예민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엘리시아의 귓가에 이케르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흘러들었다.
“그럼 엘리라고 부르게 해주게. 그대와 나, 단둘만 있을 때는.”
⚜ ⚜ ⚜
제국의 현 황제 유르시아 루케 체르만은 집무실 책상 의자에 앉아 고민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 그를 찾아왔던 막내아들 라시안 때문이었다.
조용히 몸을 웅크린 채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던 그 아이가 갑자기 찾아온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부탁 역시 그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카멜리아 후작을 제 사격 스승으로 임명해주십시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귀족파의 수장 카멜리아 후작이라니.
물론 카멜리아 후작이 사격에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를 가르쳤던 사격 스승은 젊은 시절 그의 사격 스승이기도 했었으니까.
말년에 재능이 뛰어난 제자를 거두었다고 즐거워하던 그의 모습을 황제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매번 재능 없다고 타박하던 사람이 어린 카멜리아 후작을 어찌나 칭찬하던지, 카멜리아 후작의 총기 허가를 취소해버릴까 하는 심술궂은 생각도 몇 번 했을 정도였다.
‘나를 닮았으면 라시안 그 아이도 그다지 사격에는 재능이 없을 텐데.’
쯧 하고 혀를 찬 황제는 다시 카멜리아 후작에게로 생각을 돌렸다.
그녀가 단순히 귀족파의 수장이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도리어 친해질 수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바로 승낙했겠지.
하지만 카멜리아 후작의 뒤에는 라세트 공작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세트 공작의 손아귀에 카멜리아 후작이 잡혀 있는 것이지만.
‘그때 좀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어.’
황제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겼을 때 나오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베라무스 조직을 등에 업은 라세트 공작이 귀족파의 귀족들을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전대 카멜리아 후작은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과 함께 귀족파를 빠져나오려 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이케르에게 도와주라 부탁했었다. 무사히 빠져나와 중립파로 돌아설 수 있도록.
하지만 설마 라세트 공작이 그렇게 빨리 손을 쓸 줄은 몰랐다. 가주를 잃은 카멜리아 후작가를 그렇게 빨리 집어삼킬 줄도.
결국 라세트 공작은 카멜리아 가문의 하나뿐인 후계인 엘리시아 카멜리아를 내세워 귀족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라세트 공작과의 패싸움에서 그가 진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시아 카멜리아에게 진실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전대 카멜리아 후작을 잃은 것처럼 지금의 카멜리아 후작마저 잃을 수 있으니까.
아직 싸울 준비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검을 쥐여주고 전쟁터로 내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카멜리아 후작, 그리고 카멜리아 후작가의 행보를.
다행히 제 어미를 닮았는지 어린 카멜리아 후작은 무척이나 영리했고 당돌했다.
휘청거리던 가문도 안정시켰고 카멜리아 가문을 따르던 귀족 가문들의 옹호도 그대로 끌어냈다. 이대로라면 과거의 권세를 회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라세트 공작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본다면 그건 아니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했다. 자신이 힘을 보태 준다 해도.
그런 상황에서 라시안이 카멜리아 후작을 자신의 사격 스승으로 삼아 달라 했으니 황제로서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막내아들의 부탁에 담긴 뜻을 모를 수가 없었으니.
‘어쩐다…….’
황제가 고민하고 있을 때 집무실 밖에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데이모스 공작 각하께서 드셨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홀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계속해서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던 황제의 손가락이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