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나보군. 그렇게 쳐다보는 걸 보니.”
살짝 쳐다본다는 것이 너무 대놓고 쳐다본 모양이었다. 이케르의 말에 머쓱해진 엘리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말입니다. 아,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혹시라도 조사한 것으로 오해할까 싶어 엘리시아가 다급히 말을 덧붙이자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이케르가 나직하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강조하니 더 궁금해지는군. 뭔가?”
“정말로 여자 경험이 없으십니까? 맨손으로는 여자의 손도 잡으신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
이케르가 대답이 없자 엘리시아는 살짝 당황했다. 괜히 물었나 싶어 그녀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말입니다. 각하 정도의 신분과 외모라면 좋다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굉장히 많았을 텐데 그런 이야기가 들리니까 이상해서…….”
“맨손을 잡은 것도 첫날밤을 보낸 것도 그대가 처음이네.”
소심하게 줄어든 그녀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이케르의 대답에 엘리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이라도 해보겠건만 눈앞의 사내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내가 처음이야? 모든 것이 다?’
엘리시아는 기분이 묘해졌다. 뭐랄까, 자신이 굉장히 나쁜 여자가 된 느낌이었다.
멱살을 쥐고 끌어당긴 것도, 침대에 묶은 것도, 올라타고 첫 경험을 가져간 것도 물론 죄책감이 들었지만 맨손을 잡은 것마저 자신이 처음이라고 하니 죄책감이 배로 늘어난 기분이었다.
왠지 이 남자를 책임져야 할 것 같은 그런…….
‘책임지기는 뭘 책임져?’
화들짝 놀라 고개를 휘휘 저으려던 엘리시아는 귀를 파고드는 이케르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보다 몸이 먼저 닿은 게 아쉽긴 하더군. 이왕이면 손을 먼저 잡고 싶었다네, 엘리.”
자신의 애칭이 이렇게 달콤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홀린 듯 그녀가 고개를 들자 매력적인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자신만을 담고 있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도.
“그래서 말인데, 잡아도 되겠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눈앞에 불쑥 내밀어졌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 손이었다.
순간 엘리시아는 갈등했다. 상반된 마음이 뒤섞여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뭘 고민해, 그깟 손 좀 잡으면 어떻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이 남자가 해준 것들을 생각해봐.’
받은 게 있으면 갚으라는 양심의 소리로 인해 손을 들어 올리기는 했지만,
‘잘 생각해야 해, 이 손을 잡으면 연애하자는 걸로 오해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
자신의 위치에 대한 경각심을 담은 이성의 소리로 인해 내밀어진 손을 잡지는 못한 채 바로 앞에서 머뭇거렸다.
‘어떡하지?’
키스도 아니고 몸을 섞는 것도 아니고 고작 손을 잡는 것뿐인데 머리에 피 터지도록 갈등하는 자신이 어이없고 미친 것 같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것보다도 심각한 고민이었다.
주인의 심정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내밀어진 손 앞에서 닿을 듯 말 듯 움찔거리던 그녀의 손가락이 어쩌다 상대의 손끝에 스치듯 닿는 그 순간이었다.
먹이를 낚아채듯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왔다.
‘어?’
엘리시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의 손은 어느새 이케르의 손에 단단히 잡혀 있었다. 손끝이 닿은 것을 허락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당혹스러우면서도 손을 통해 전해오는 온기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손을 뺄 생각은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이케르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움을 담고 슬쩍 올라갔다.
“궁금했던 것이 풀렸다면 그만 가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고 부드러운 손을 꼭 쥔 채 이케르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라시안은 자신의 아버지, 황제의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와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 더미의 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맡은 양은 아버지에 비해 20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아니, 30분의 일이려나?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자 라시안은 깃털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래도 더 분발해야 할 것 같았다.
나서서 싸우기로 마음먹은 이상 적어도 자신이 황태자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심기일전한 소년이 서류를 검토하기 위해 막 고개를 숙였을 때,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곳에 숨으면 후작이 찾지 못할 것 같더냐?”
웃음이 묻어나는 아버지의 물음에 라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후작을 피하기 위해 궁에서 나온 건 아닙니다.”
“그러면?”
“스승님께서 후작을 설득해주겠다고 하셨으니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곳으로 온 것은 스승님의 연애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황자의 대답에 황제는 빙그레 웃으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네가 보기에도 네 스승이 후작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더냐?”
“예. 스승님이 누군가를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시는 건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자 된 도리로 방해가 되면 되겠습니까. 도와드리면 몰라도요.”
“그래서 궁을 통째로 비워줬다? 제법 호탕하구나.”
라시안의 행동이 마음에 든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5년 전 그가 이케르에게 막내아들을 맡긴 것은 정말이지 신의 한 수였다. 이렇게까지 훌륭하게 성장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이제 제법 한 사람의 몫을 하게 된 라시안을 쳐다보며 턱수염을 쓰다듬던 황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시안, 다음 달 초하루에 네 생일을 기념해 연회를 열 생각이다.”
“다음 달…… 입니까?”
라시안은 생각보다 빠른 일정에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 말하는 그 연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린 황자가 모를 리 없었다.
처음으로 사람들의 앞에 공식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9살이나 더 위인 이복형과 황태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 막내아들의 모습에 황제의 짙은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막상 눈앞에 닥쳐오니 긴장이 되나 보군. 한 달이면 빠르게 느껴질 만은 하지.’
황제는 라시안의 침묵을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빠르다고 생각하느냐?”
그런데 돌아온 라시안의 대답은 황제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아닙니다. 나서기로 결심한 이상 하루라도 빨리 움직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제게 고정시킬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숨어 있던 황자가 나타난 것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형님의 경쟁자로서 사람들에게 확실히 인식되고 싶습니다.”
“……허허허허.”
잠시 침묵했던 황제는 곧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웃음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황제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이케르 그 녀석이 정말 제대로 가르쳤구나.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예?”
“그날 너는 누구보다도 빛날 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모두가 깨닫게 되겠지. 내 의지가 누구에게 닿아있는지.”
라시안이 모습을 드러내는 날, 황제는 이케르와 약속한 불씨를 피워 올릴 생각이었다. 화려한 붉은 불씨를.
어리둥절해하는 막내아들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빛이 온화하게 빛났다.
⚜ ⚜ ⚜
이케르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엘리시아는 그의 손에 잡혀 있는 자신의 손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쯤 되니 계속해서 가지고 있던 의문이 확신으로 넘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나와 연애하고 싶으신가 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며칠 전도 아니고 바로 어제 아무 일도 없었다고 사람들 앞에서 차기 마탑주의 입을 빌려 공증하지 않았던가.
물론 연회의 밤에 대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는 둘 사이에 아무런 감정 교류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상황도 누군가가 보게 된다면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손까지 잡고 있는 이런 모습이라면.
‘아무래도 이건 아닌 거 같아. 이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엘리시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을 때였다. 갑자기 앞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걱정하던 것이 곧바로 현실로 나타나자 엘리시아는 흠칫 놀라 재빨리 이케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런데 풀숲에서 튀어나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새하얀 토끼였다.
길고 커다란 귀를 쫑긋거리며 아주 잠깐 그녀와 이케르를 올려다보던 토끼는 곧 흥미를 잃었는지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 버렸다.
“뭐야, 저 토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놀란 것이 분하게 느껴져 토끼를 노려보는 엘리시아의 귀에 이케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할 것 없어, 엘리. 전하께서 고용인들을 모두 물려주셨으니. 지금 이 정원에는 있는 사람은 그대와 나 뿐이지.”
한마디로 보는 눈 따위는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였다.
엘리시아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이케르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쥐었다.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수려하게 뻗은 눈매를 곱게 접은 채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두 눈 가득히 들어왔다.
“이미 허락받았으니 또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
당연히 할 말이 없었다. 스치든 어쨌든 손끝이 닿게 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그래도 뭔가 머쓱한 기분에 그녀가 손을 슬쩍 움직이자 그의 손가락들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단단히 얽매어 왔다.
또다시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졸지에 깍지를 끼게 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케르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감싸인 손에서 전해오는 따스한 온기가 혈관을 타고 흘러 깃털로 변해 살랑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간질거렸다.
‘어디를 가시는 거지?’
가보면 안다고 했으니 물어보기도 애매해 눈동자만 굴리던 엘리시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생각해보니 오늘 그녀는 원래 이케르를 만나려 하지 않았던가.
집사를 통해 데이모스 공작저로 연통을 넣으려다가 갑작스럽게 입궁 명령이 떨어져 무산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어떻게 그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었지?’
엘리시아는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다른 일도 아니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일이었다.
아무리 3황자의 사격스승이 되라는 황제의 말이 충격이었다고 해도, 3황자 대신 이케르를 만나 당황했다고 하더라도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엘리시아는 이케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각하.”
하지만 그녀가 질문을 꺼내는 것보다 이케르의 말이 더 빨랐다.
“앞을 봐, 엘리.”
선수를 빼앗긴 엘리시아는 어쩔 수 없이 하려던 말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고 물어 봐야겠…….’
머릿속을 딴생각으로 가득 채운 채 성의 없이 정면을 쳐다보았던 엘리시아의 두 눈에 놀라움이 가득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