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하르.”
“말해.”
기다렸다는 듯 하르가 대답하자 엘리시아는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나와 카멜리아 가문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사람이 라세트 공작과 2황자 외에 또 있을까?”
“없지.”
“그렇지? 그 둘 뿐이지?”
“지금으로선.”
계속 이런 흐름이라면 엘리시아의 정신을 빼놓는 데이모스 공작도 추가해야 할 것 같았지만 질문 의도와 어긋나는 것 같아 하르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어머니가 하려던 일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말인데. 그러니 내가 그걸 알게 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하겠지.”
혼잣말하듯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엘리시아를 보며 하르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그냥 흘려듣기에는 뭔가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어? 아, 그게……. 사고가 나기 전에 공작 각하와 내 어머니가 만난 적이 있다고 루리엔이 그러더라고. 알고 있지?”
하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오스를 이용해 알아낸 것이 그였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오늘 각하와 만난 김에 물어봤거든. 그런데 지금은 말해줄 수가 없대. 내가 위험에 빠질 수가 있다고.”
“데이모스 공작이 그렇게 말했다고?”
“응. 그런 말을 들으니 뭔가 찝찝해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내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시기 전에 귀족파에 있었던 일들을 확인해볼 수 있을까?”
엘리시아의 물음에 하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무리라고 답했겠지만 지금은 가능해. 대신 시간은 걸릴 거다. 베라무스의 눈을 피해서 움직여야 하니까.”
“설마 3개월 이상 걸리지는 않겠지?”
조심해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조사 기간이 이케르와 약속한 기간을 넘어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엘리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하르는 장난하냐는 눈빛으로 답했다.
“그건 업무 태만이고. 최소 한 달 정도의 시간은 필요할 것 같다.”
“부탁할게.”
부모님이 마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엘리시아는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채권자들로 인해 카멜리아 가문이 휘청거렸기 때문이었다.
루리엔, 하르와 함께 간신히 가문의 파산을 막아내고 있을 때 라세트 공작이 손을 뻗어왔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귀족파의 수장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도 함께였다.
공작으로서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귀족파는 내부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응축된 불만들로 인해 활화산처럼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그걸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녀가 필요했을 테니까.
어쨌든 엘리시아에게도 나쁘지는 않은 제안이었다.
어머니의 자리를 되찾고 카멜리아 가문을 안정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물론 라세트 공작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된 것은 불쾌한 일이었지만.
어느 정도 주변이 안정되면서 여유가 생기자 루리엔은 라세트 공작의 눈을 피해 그녀의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 둔 안배들을 찾아내 가져왔다.
엘리시아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카멜리아 가문이 빠른 속도로 과거의 권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라세트 공작에게 빌렸던 돈과 그에 대한 이자까지 마련했을 때 바로 갚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엘리시아, 루리엔, 하르 세 사람은 머리를 모았다.
엘리시아는 갚아버리자고 했지만 루리엔이 반대했다. 뭔가 이상하니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루리엔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 사이 라세트 공작에게 진 빚이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베라무스의 조작 때문이라는 걸 알았을 때 엘리시아는 깨달았다.
라세트 공작의 함정에 빠졌다는 걸. 이대로라면 영원히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걸.
그때 하르가 베라무스에 대적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면 돌파해버리자는 것이었다.
루리엔 역시 하르의 의견에 찬성하자 엘리시아는 라세트 공작에게 갚으려 했던 돈을 모두 하르에게 내주었다.
어쩌면 무모하기까지 한 도전이었다.
다행히 하르는 조직을 이끄는데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도전은 성공했다.
헬리오스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베라무스의 턱밑까지 따라붙었다.
조금만 더 시간과 지원이 주어진다면 베라무스와 동등하게, 아니 그 이상까지도 가능해 보였다.
그 사이 루리엔은 차명으로 사업을 벌여 라세트 공작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자금을 다시 모았다.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진척이 이루어진 상태라 엘리시아에겐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여유를 새롭게 가지게 된 의문을 푸는 데 사용할 생각이었다.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해.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채권자들이 나타났던 것도 그렇고. 각하의 말도 마음에 걸리고. 돌아가면 루리엔과 얘기해봐야겠어.’
어쩌면 루리엔은 지금 그녀가 느끼는 의문들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말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도.
생각에 잠겨 있던 엘리시아는 하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친 거냐?”
헉. 이 자식이 어떻게 알았지?
뜨끔한 엘리시아가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리자 하르가 혀를 차며 말해왔다.
“머리 굴리지 말고. 네 표정에 ‘나 사고 쳤어요’ 하고 써 있으니까.”
“……사고는 아니고.”
“사고가 아니면?”
“그게…….”
사고는 아니지만 어쨌든 일친 건 사실이라 엘리시아는 결국 하르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3황자의 사격스승이 되는 것을 거절하기 위해 황제를 알현했더니 황제가 제안을 던진 것. 그래서 3황자를 설득하러 갔다가 이케르를 만난 것. 그런데 그에게 설득당해 결국 3황자의 사격 스승이 되기로 한 것.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하르가 한 말은 딱 한 단어였다.
“호구.”
“야!”
“맞잖아. 하나를 거절하러 가서 두 개를 짊어지고 오는 게 호구지. 루리엔도 똑같이 말할 거다.”
엘리시아의 볼이 불퉁하게 부풀어 올랐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분은 나빴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툴툴댔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하여간 폐하도 심보가 고약하시다니까. 이렇게 될 줄 알고 제안하신 걸 거야.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성격이시니까.”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무뚝뚝하고 냉정한 대답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당한 녀석이 바보지.”
“넌 대체 누구 편이야?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약이 오른 엘리시아가 발끈하자 멀뚱히 쳐다보던 하르는 손을 뻗었다.
이케르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큰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네 편이지.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무뚝뚝하지만 애정이 느껴지는 토닥임에 엘리시아의 볼에 빵빵하게 들어갔던 바람이 줄어들었다.
순식간에 화가 사그라진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약았어.”
“네가 순진한 거다. 돌아가면 루리엔에게 의논해봐.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그래야지.”
이번 일이 라세트 공작과 더스틴을 어떻게 자극할지 모르기에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와의 대화를 끝낸 그녀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 하늘을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 끝에 근심이 드리웠다.
3황자의 사격 스승에 이어 알 수 없는 황제의 부탁과 어머니가 하려고 했던 일까지.
무언가 벌어지려 한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 ⚜
카멜리아 후작가와 데이모스 공작가에서 성명을 내면서 잠잠해졌던 제국의 수도가 이른 아침부터 다시 한번 술렁였다.
이번에는 스캔들이 아니라 황실 공식 스케줄 때문이었다.
황제가 제3황자 라시안 루케 체르만의 탄신 연회를 다음 달 첫날에 열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던 3황자의 등장에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특히나 2황자를 따르는 귀족들은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1년 뒤 2황자가 25세가 되면 황태자로 지지하려고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꼭꼭 숨어있던 3황자가 등장했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라세트 공작 역시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입궁해 더스틴의 궁으로 향했다.
계획이 어긋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 아니라 열 받은 더스틴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진정시키기 위한 행보였다.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빠르게 걷던 라세트 공작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물건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하여간 저놈의 성질머리하고는.’
제 어미도 그러더니 그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모양이었다.
라세트 공작이 발걸음을 좀 더 빨리 해 다가가자 문 밖에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굳어져 있던 시종장이 보였다.
그를 발견한 시종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급히 다가왔다.
“전하는 좀 어떠신가?”
“좋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어젯밤 시녀 둘을 밤새도록 품으시고 좀 기분이 나아지신 듯하셨습니다만, 오늘 아침 그 소식을 듣자마자 역정을 내시며…….”
시종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요란하게 물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침실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때려 부수기로 한 것 같았다.
라세트 공작은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자신이 왔음을 알리라는 뜻이었다.
“전하, 라세트 공작 각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시종장이 목청을 높여 외치자 그제야 안에서 흘러나오던 소리가 멈추었다.
“…들어와.”
문을 통해 들려오는 황자의 거친 목소리에서 날것 상태의 분노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라세트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과연 남아있는 장식품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더스틴은 가운 하나를 걸친 채 침실 중앙에 서 있었다.
분노로 인해 거칠어진 호흡 때문인지 벌어진 가운 사이로 단단하게 근육 잡힌 흉근이 오르내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눈이 완전히 돌아버리진 않았단 사실이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때려 부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를 살피던 공작의 시선이 침대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 둘이 없는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며 벽 쪽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두 여자 모두 머리카락 색이 붉은색 계열이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들을 쳐다보는 공작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벌레를 보는 것과 같은 시선이었다.
‘쓸모없는 것들.’
저렇게 떨고 있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몸으로 매달리든지, 화풀이 대상이 되어서라도 더스틴을 진정시켜야지. 그러라고 들여보낸 것이 아닌가.
더스틴이 엘리시아에게 대놓고 추근대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작은 일정 시기마다 그녀를 연상시키는 여자들을 시녀로 뽑아 표정과 말투까지 교육 시킨 후 그의 궁으로 보냈다.
넘치는 색욕을 처리해주지 않으면 언제고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공작의 예상대로 더스틴은 엘리시아를 만나고 온 날이면 그가 들여보낸 여자들을 데리고 침실에 틀어박혔다.
한 명이면 하루, 오늘처럼 두 명이면 이틀 또는 사흘 동안 짐승처럼 뒹굴면서 눌러 참았던 욕정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또다시 점잖은 겉껍데기를 뒤집어쓰곤 했다.
그 속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틀 전 임시회의에서 엘리시아가 수장 자리를 유지하게 되자 더스틴의 분노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살기로 번뜩거리는 눈빛을 한 채 자신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