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데이모스 공작 저 새끼, 진심으로 죽여 버리고 싶군.]
뒤틀린 더스틴의 마음은 이해 가지만 입 밖에 내서는 좋을 것이 없는 말이었다. 말이라는 건 듣는 사람에 따라 확대 해석될 수도 있는 거니까.
라세트 공작은 주변부터 살폈다. 다행히 홀의 문은 닫혀 있었고 따라 나온 귀족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성질 더러운 애새끼부터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당장 손에 넣지 못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카멜리아 후작은 결국 전하의 손에 들어오게 될 겁니다. 그때 마음껏 회포를 푸시면 되겠지요.]
[또 똑같은 소리. 아주 지겨울 정도야. 그 얘기를 지금 몇 년째 듣고 있는지 아나?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는 모양이야, 공작은.]
아무리 분노했다고 하나 건방지다 못해 오만방자한 더스틴의 태도에 라세트 공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남녀 일이라는 게 제3자 입장에서 컨트롤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카멜리아 후작의 마음을 얻어 내시라고. 아니면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자연스럽게 품으시라고 말입니다.]
빙빙 돌려서 말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네 놈이 그 계집을 잘 꼬셔냈으면 이런 번거로움은 없었을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라세트 공작의 말뜻을 알아들은 더스틴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가자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돌아가시지요. 어제 시녀 둘을 새로 들여놓았습니다. 그것들이라도 품으시면 기분을 푸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더스틴은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고는 돌아갔다.
그 이후 시녀들을 끼고 침실에 틀어 박혔다고 해서 안심했더니 이 난리가 난 것이다.
라세트 공작은 침대 위에서 덜덜 떨고 있는 시녀들을 냉랭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당장 꺼지라는 그의 눈빛을 받은 시녀들은 몸에 아무것도 두르지 못한 채 허둥지둥 침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단둘만 남자 더스틴이 입을 열었다. 이죽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남아있는 광기와 분노가 뒤섞여 짙푸른 색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바마마께서는 내게 황태자의 자리를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하긴 주실 생각이 있었다면 벌써 주셨겠지.”
당장 누구 하나 죽일 듯한 살기등등한 모습에도 라세트 공작은 침착하기만 했다.
“이미 알고 계셨던 사실이 아닙니까.”
“아는 것과 확인당하는 건 아주 큰 차이지. 아주 기분이 더러워.”
더스틴은 이를 으득 갈았다.
자신의 아버지, 황제가 그러는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황제에게 있어서 마땅치 않은, 견제해야 하는 아들이었으니까.
황후의 집안을 함정에 빠트리고 그것을 협박의 빌미로 삼아 그의 어머니가 황비 자리를 차지한 순간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이복형이자 1황자가 갑작스럽게 급사하면서 황제가 그와 그의 어머니를 보는 시선은 싸늘함을 넘어 냉랭함으로 바뀌었다.
라세트 공작도 그의 어머니도 아무 말 없었지만 더스틴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복형의 죽음이 결코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고 해서 공작이나 그의 어머니를 비난하거나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복형이 죽었다고 했을 때 들었던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황태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기쁨뿐이었다.
황제가 아무리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하더라도 언젠가 그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될 것이고 모든 자들의 위에 서서 내려다보게 될 테니까.
그런데 갑자기 황제가 3황자를 내세우고 나섰으니 분노와 함께 짜증이 치밀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흐름에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도리어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회라고?”
무슨 소리냐는 더스틴의 눈빛에 라세트 공작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폐하께서 3황자를 꼭꼭 싸매고 계셔서 손대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솜씨 좋은 암살자들을 보내도 매번 실패했지요.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더스틴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암살자를 보내라고 닦달했던 것이 본인이었으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목표물이 황자이다 보니 아무리 라세트 공작이라도 입이 무겁고 실력이 뛰어난 암살자를 고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베라무스를 이용해 돈만 주며 무슨 일이던 하는 악명 높은 암살단체를 포섭했어야 했을 정도였다.
거기에 들어간 돈만 해도 얼마인지.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찬 라세트 공작은 논리적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목표물을 노리기도 쉬워졌고 전하께서 귀족들 앞에서 황태자로서의 자질을 보이시기도 쉬워졌습니다. 설마 9살이나 어린 동생을 상대로 자신 없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
더스틴은 자신을 도발하는 라세트 공작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지금부터는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오늘처럼 성질을 부리시는 것도 곤란하지요. 밖으로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어쩌시렵니까.”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협박이 아니라 조언을 드리는 겁니다.”
능청스러운 라세트 공작의 말에 더스틴은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분노가 들끓었지만 공작의 말이 틀리지 않기에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외손자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을 확인한 라세트 공작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미 발표된 탄신 연회입니다. 되돌릴 수 없다면 전하께서 그날 3황자를 제치고 주인공이 되시면 됩니다.”
듣고 있던 더스틴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주인공이 이미 정해져 있는 행사에서 그것이 가능한 일이던가?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외할아버지, 라세트 공작이 한 말이었다. 방법이 없는데 있다고 할 리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더스틴은 완전히 감정을 가라앉힌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말인가?”
“카멜리아 후작을 파트너로 데려가십시오.”
“엘리를?”
“그렇습니다. 데이모스 공작과 스캔들이 있었던 카멜리아 후작이 전하와 함께 연회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전하에게 쏠릴 것입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더스틴은 생각했다. 아니, 무척이나 괜찮은 방법이었다.
엘리시아를 파트너로 데려가면 공작의 말처럼 귀족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귀족파의 수장인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를 팔에 끼고 연회장을 돌아다닌다고 생각하자 바닥까지 추락했던 기분이 그나마 나아져 더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 방법은 마음에 드는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전하의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때는 깔끔한 모습으로 오시리라 믿습니다.”
더스틴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그만 성질부리고 씻고 나오라는 공작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그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보았지만 정작 장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이고는 침실을 빠져나가는 공작의 뒷모습을 보면서 더스틴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애 취급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성질을 부리느라 흐트러졌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린 그는 욕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 ⚜ ⚜
황제에게서 부름을 받은 뒤 사흘 후 엘리시아는 다시 황궁으로 향했다.
오늘은 귀족파의 수장으로서가 아니라 3황자의 사격스승으로 입궁하는 날이었다. 그러다 보니 평소처럼 정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검은 바지에 깔끔한 흰 셔츠를 받쳐 입고 외투를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다. 허리에는 수업을 위한 권총집이 달린 가죽 벨트가 매여 있었다.
물론 입궁하기 전 엘리시아는 라세트 공작을 찾아가 3황자의 사격스승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녀의 의지가 아니라 황명이라는 것도 강조했다.
잠시 침묵했던 공작은 의외로 별말 하지 않았다. 도리어 잘 해보라고 격려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루리엔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걱정하지 마, 엘리. 라세트 공작은 뭐라 하지 않을 거야. 도리어 잘해보라고 할걸? 그래야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이게 가장 중요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입궁해서 혹시라도 2황자를 만나면 그냥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만 해. 갑자기 미친 또라이로 변하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3황자 이야기는 꺼내지 말고. 그 인간 다루는 건 보모인 라세트 공작에게 맡기자고.]
미친 또라이로 변한 더스틴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마차를 타고 3황자 궁으로 바로 들어가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궁 앞에 도착해 엘리시아가 하르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3황자의 시종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곧바로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왔다.
“어서 오십시오, 카멜리아 후작님. 3황자 전하의 시종장 오웬입니다.
“반갑네, 오웬. 전하께서는 어디 계신가?”
“후원에서 후작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이왕 이렇게 된 거 황자고 뭐고 제대로 교육시켜 주겠다고 엘리시아는 열의를 불태웠다. 그런데 시종장이 갑자기 그녀의 옆에 서 있는 하르를 쳐다보았다.
“혹시 이분이 카멜리아 후작님의 호위를 맡고 계시는 하르 테스케경이십니까?”
“그렇네만.”
“테스케 경도 같이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쪽입니다.”
시종장의 말에 하르는 엘리시아를 쳐다보았다. ‘나를 왜?’라는 눈빛이었다.
엘리시아 역시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가 어떻게 알아?’라는 눈빛을 돌려주었다.
하르의 두 눈에 귀찮다는 눈빛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나무 위에서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을 빼앗겼으니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황자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에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그는 엘리시아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시종장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이전에 엘리시아가 라시안에게 사격 솜씨를 보여주었던 궁의 후원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 따사롭게 내리비치는 햇살 아래 넓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였다.
3황자 라시안은 수백 년은 족히 된 거목의 그늘 아래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라시안과 마주 앉아 있는 사내를 발견한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결 좋은 머리카락 아래 햇살을 머금은 금안이 그녀를 향해 온화하게 빛났다.
‘저 남자가 왜 여기에 있지?’
이케르와 시선이 마주친 엘리시아는 커다랗게 떠진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