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33)

45화

‘또 시작이군.’

엘리시아가 놀란 표정으로 멈춰 서자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하르는 보이지 않게 팔꿈치로 그녀를 툭 쳤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대상에 데이모스 공작도 포함시켜야 할 것 같았다.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저런 멍한 모습이니 말이다.

흠칫 놀란 엘리시아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테이블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조용히 뒤따랐다.

“어서 오세요, 후작.”

시종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이 다가가자 라시안이 웃으며 먼저 인사해왔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만큼이나 환한 웃음이었다.

2황자와 똑같은 머리색인데 3황자의 머리색이 더 밝고 화려해 보이는 것 같다고 엘리시아가 생각하고 있을 때 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어서 오게, 후작. 테스케 경도 잘 왔네.”

그녀를 쳐다보는 이케르의 눈빛은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평소의 무심함이 빠진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을 받은 것만으로도 어쩐지 얼굴에 살짝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엘리시아는 라시안을 쳐다보며 답했다.

“두 분께서 티타임을 가지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제가 너무 빨리 왔나봅니다.”

그녀의 인사에 라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후작이 오는 시간에 맞춰 준비한 겁니다. 오늘부터 제 사격스승님이신데 차 한 잔 대접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쪽으로 앉으세요. 테스케 경도요.”

“감사합니다.”

엘리시아와 테스케는 라시안이 가리킨 곳의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빈 찻잔이 놓여있던 자리였다.

두 사람이 앉자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시녀가 다가와 차를 따라주었다.

찻잔 가득 차가 채워지자 라시안은 웃으며 말했다.

“후작께서 향이 좋은 차를 좋아한다고 들어 어마마마께 부탁드려 준비해보았습니다. 입에 맞으면 좋겠습니다만.”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마침 목도 마르고 해서 엘리시아는 찻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에 닿기 전 코끝에 닿아오는 향은 황자의 말처럼 은은하고 향긋했다.

게다가 딱 먹기 좋을 만큼 따뜻했다. 차를 준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정말로 나 때문에 차를 준비하신 모양이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엘리시아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라시안을 쳐다보았다.

마음가는 대로 준비한 것인지 의도하고 준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리를 마련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상대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호감까지 이끌어 낼 수 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도 내 신분을 알자마자 바로 말투를 바꿨었지.’

사람을 대하는 것이 나이에 비해 능숙하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궁금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데이모스 공작 각하께서도 와 계실 줄 몰랐습니다. 혹시 이전 시간이 검술 수업이셨던 건지요?”

검술 수업에 이어 바로 사격 수업을 하면 힘들지 않을까 싶어 꺼낸 말이었다.

이케르가 왜 이 시간에 이곳에 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데 라시안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건 스승님에게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티 테이블 준비가 끝났다는 시종의 말을 듣고 나왔을 때 이미 와 계셨으니까요. 자리에 앉자마자 두 분께서 오셨고요.”

한마디로 자신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자연스럽게 엘리시아를 포함한 세 사람의 시선이 찻잔을 들고 있는 사내에게로 향했다.

의문을 담은 세 쌍의 눈동자를 마주하면서도 이케르는 조금의 당혹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찻잔을 받침 위에 우아하게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업무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 잠시 들렀습니다. 지난번 후작이 보여준 사격이 인상 깊어, 흥미가 생겨서 말입니다.”

흥미의 대상이 지정되지 않다 보니 듣기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말이었다.

대답을 들은 세 사람의 반응 역시 각각 달랐다.

엘리시아는 움칠했고 하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해 라시안은 즐거운 듯 두 눈을 빛냈다.

“그럼 스승님께서도 저와 같이 사격 수업을 받으시는 겁니까?”

아니, 이 황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들뜨기까지 한 황자의 물음에 엘리시아는 화들짝 놀랐다. 누가 누구와 같이 수업을 받는단 말인가.

설마 아니겠지 하는 눈빛으로 그녀는 이케르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는 느슨하게 웃으며 거절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랬다가는 후작에게 미움을 받을 것 같아서 참관만 하려 합니다.”

안도감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엘리시아는 이케르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굳혔다.

그의 눈빛에 어려 있는 것은 분명 웃음기였다. 그럴 줄 알았다고 하는 것 같은.

갑자기 발끈하는 마음이 들어 그녀는 눈꼬리를 살짝 치켜 올렸다.

어쩐지 싸움에서 져서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패배자가 된 느낌이었다.

‘방금 내가 왜 안도한 거지? 고작 학생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것뿐이잖아. 뭐가 두려워서?’

평소 의회에서도 지기 싫어하던 성질머리가 기어 나오면서 호전적인 카멜리아 가문의 피가 깨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척이나 의미 없고 쓸모없는 각성이었지만 말이다.

엘리시아는 조금 전까지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다잡고서는 여유로운 미소로 입가를 무장한 채 이케르를 쳐다보았다.

“제가 그런 사소한 이유로 각하를 미워할 리 있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전하와 함께 사격 수업을 받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쓸데없는 오기로 대차게 지른 것까지는 좋았다. 지른 것까지는.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후작이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편해지는군. 그럼 잘 부탁하지.”

기다렸다는 것처럼 이케르가 냉큼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도 기쁜 듯 수려하게 웃으며.

그 순간 엘리시아는 깨달았다. 그에게 말려들었다는 걸.

‘망했어.’

잠시 집을 나갔던 이성이 돌아오면서 급격히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쓸데없는 객기의 끝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느끼며 절망하고 있는 그녀에게 하르가 조용히 속삭였다.

결정적인 마지막 카운트 펀치였다.

“역시 호구.”

⚜ ⚜ ⚜

긴 다리를 꼰 채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더스틴은 응접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더스틴의 어머니이자 제국의 황비인 샬롯 루케 체르만이었다.

4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볼 때마다 더스틴은 짜증이 치밀었다.

외모와 권력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작 황비라니. 황후가 됐더라면 그가 황태자가 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 아닌가.

황후의 가문을 함정에 빠트려놓고도 고작 황비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한 것이 한심할 뿐이었다.

아니면 온갖 애교와 아양을 떨어서라도 황제의 마음이라도 사로잡던지.

하지만 그는 그런 시커먼 속을 숨기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황비를 맞이했다.

“어머니.”

더스틴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황비는 그를 찬찬히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졌군요. 많이 속상했던 모양입니다.”

말은 분명 걱정하는 말인데 그 말을 담고 있는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스틴 역시 어머니의 말이 그저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기 위해 꺼낸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은 황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재료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필수적인 중심 재료.

당연히 남들이 말하는 애틋한 모정 같은 것이 존재할 리 없었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 사이는 모자 관계라기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에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가 어머니의 부름에 바로바로 입궁하는 것은 그녀의 조언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오늘 역시 이복동생의 탄신 연회와 관련하여 쓸 만한 조언을 기대하며 입궁한 참이었기에 더스틴은 일부러 시무룩한 척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제게 황태자 자리를 주실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물론 위로 같은 건 해주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황비의 대답을 들은 그는 심기가 뒤틀렸다. 판으로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라세트 공작과 똑같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닙니까.”

당연한 걸 뭘 새삼스럽게 말하느냐는 눈빛으로 더스틴을 보며 황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번 3황자의 탄신 연회에서 더 돋보여야지요. 공작은 뭐라 합니까?”

“카멜리아 후작을 파트너로 데려가라 하였습니다.”

“나와 생각이 같군요. 그녀를 옆에 세우면 그날의 주인공은 황자가 될 겁니다. 다만.”

갑자기 황비가 말을 끊었음에도 더스틴은 의문을 가지거나 놀라지 않았다. 의례 그러려니 하며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그것이 어머니의 화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생각지 못하는 꽤나 쓸모 있는 조언이라는 것도.

이번 역시 어머니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후작을 부르지 말고 후작저로 방문하세요.”

“제가 말입니까?”

“그래요. 여자는 작은 배려 하나에도 민감하답니다. 매번 거만하게 부르기만 하던 황자가 직접 찾아가면 후작이 어떻게 느낄 것 같나요.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더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녀의 조언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후작을 만나면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말고 의상실부터 데리고 가세요. 델로이 의상실에 미리 말을 해두었으니.”

델로이 의상실이라면 제국에서 로즈델 다음으로 인정받는 의상실이었다.

말을 하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황비의 우아한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로즈델 의상실로 하고 싶었지만 이미 폐하께서 손을 뻗으셨더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갑자기 무슨 의상실이란 말인가.

더스틴의 눈빛에 깃들었던 의문은 이어진 어머니의 말에 바로 풀려나갔다.

“의상실에서 후작과 같이 의상을 맞추세요. 특히 후작을 최대한 화려하게 꾸며야 합니다. 3황자가 어떤 파트너를 데려오던 후작의 화려함 속에 묻어버릴 수 있도록.”

역시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는 어머니의 조언에 더스틴은 감탄했다.

그녀의 말대로 엘리시아를 화려하게 꾸민다면 어떤 여자를 데려오던 그 화려함에 가려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연회의 주인공은 더 이상 이복동생이 아니게 되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머니.”

자신이 연회의 주인공이 될 것임을 확신하는 그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움을 띄고 길게 올라갔다.

⚜ ⚜ ⚜

“양팔을 목표물 방향으로 쭉 펴시고 총을 잡고 있는 양손의 그립이 전하의 가슴 중앙에 오도록 하십시오.”

엘리시아의 말에 라시안이 총을 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알려준 대로 자세를 취하는 황자를 보며 그녀는 내심 감탄했다.

아직 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곧게 펴진 허리는 물론이고 떨림 하나 없는 팔이나 다리에서도 힘이 느껴졌다.

‘근력이 좋네. 검술을 배워서 그런가.’

처음 총을 들었을 때 몇 초 버티지 못하고 덜덜 떨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엘리시아는 희망을 가졌다.

이 정도로 자세가 좋다면 빠른 시간 내에 가르치고 탈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희망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