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아니, 왜? 자세가 저렇게 좋은데 어째서?’
엘리시아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황자의 자세는 표본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자세였다. 그런데 어째서 쏘는 총알마다 빗나간단 말인가.
그렇다고 방아쇠를 당길 때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이없어하던 그녀는 라시안과 눈이 마주치자 난감함을 느꼈다.
본인 역시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황자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잘 맞지 않는 것 같은데 혹시 제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자세는 문제없습니다.”
“그럼 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엘리시아는 문득 과거 스승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아예 총과는 상성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완벽한 자세로 총을 쏘더라도 총알이 과녁을 빗나가버리고 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총알의 방향을 비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총에 저주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아, 젠장.
엘리시아는 어딘가에 이마를 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눈앞의 황자가 그 드물다는 ‘총에 저주받은 자’이라니. 그 사실을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아니야. 뭔가 내가 놓친 게 있겠지.’
강한 부정은 곧 현실도피로 이어졌다.
황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라 규정지은 그녀는 라시안을 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처음이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연습하면 나아지실 겁니다. 자, 다시 해 볼까요?”
심기일전한 엘리시아는 라시안의 자세를 다시 한번 꼼꼼히 손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혹시라도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는지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0여 분이 흐른 후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황자는 정말로 ‘총에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스승님이 뭐라고 했더라.’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서도 엘리시아는 기억을 더듬어 ‘총에 저주받은 자’에 대해 스승이 해주었던 말들을 기억해 냈다.
[총에 저주받았다고 해서 총을 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쏠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 노력이, 평범한 사람의 열 배 이상 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사격을 권하지 않습니다.]
열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절망하던 그녀는 불현듯 무엇인가 깨달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이거 기회잖아?’
그것도 두 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3황자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사격스승이라는 부담스러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황제 역시 황자 본인이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녀에게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케르의 조건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귀책 사유가 황자 쪽에 있는 이상 조건은 다른 거로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기쁨에 실룩거리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바로 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라시안을 마주했다.
“전하,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오나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총에게 저주받은 자’ 인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라시안은 의아한 눈빛을 떠올렸다.
“‘총에게 저주받은 자’라니요? 그게 뭡니까?”
“완벽한 자세로 총을 쏘더라도 총알이 과녁을 빗나가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총알의 방향을 비틀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엘리시아는 스승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그러자 라시안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저는 총을 쏠 수 없는 겁니까?”
“뭐 아무래도…….”
안타까운 표정을 얼굴 가득 떠올린 채 그녀가 일부러 말꼬리를 흐리자 황자의 얼굴이 시무룩해지는 것이 보였다. 풀죽은 강아지가 귀를 축 늘어트린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덩달아 엘리시아의 마음도 불편해졌다. 환하게 웃던 소년을 말 한마디로 침울하게 만들어 놨으니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야. 조금만 참으면 이 상황을 탈출할 수 있어.’
애써 외면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던 엘리시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라시안이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그녀를 응시해 온 것이다.
황자의 은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엘리시아는 양심이 쿡쿡 찔렸다. 그리고 이어진 황자의 물음은 수십 개의 뾰족한 화살이 되어 그녀의 양심에 틀어박혔다.
“정말 불가능한 겁니까?”
간절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그녀는 결국 사실을 말해주고 말았다.
“그게… 꼭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인의 열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들 뿐입니다.”
이 정도는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남들의 열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설마 하겠다고 나설까 싶기도 했고.
그런데 돌아온 라시안의 대답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열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되겠군요.”
“예?”
순간 자신이 제대로 들었나 싶어 의심이 든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후작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열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된다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시안의 얼굴은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사격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것처럼.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사격을 포기시키려던 계획이 실패했으니 우울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엘리시아의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환희가 피어올랐다.
얼떨떨해 서 있는 그녀의 귀에 라시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열의에 불타는 경쾌한 목소리였다.
“최선을 다해 목표물을 반드시 맞춰 보이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후작.”
엘리시아는 자세를 다시 잡고 과녁을 향해 총을 겨누는 라시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흔들림 하나 없는 곧은 자세,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는 당당한 표정,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은빛 눈.
금빛 머리카락에 닿은 햇살이 빛의 가루처럼 부서져 내리는 가운데 태양을 담은 듯 빛나는 황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저 아이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다음 대의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재목으로서.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그 사실을 인지하자 엘리시아는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망했네.’
이래서야 정말 호구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사격 수업을 없애는 것은 힘들겠다고, 오랜 시간 해야 할 것 같다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때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이제 나도 봐 줄 수 있는 건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왔는지 이케르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햇살을 머금어서인지 따뜻하게 빛나는 금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상하게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엘리시아는 재빨리 라시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를 좀 더 봐 드려야…….”
“전 괜찮습니다. 목표물 근처에라도 가려면 한참 연습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기다렸다는 것처럼 라시안의 말이 그녀의 말을 끊고 날아들었다.
‘아니 무슨 청각이 저렇게 좋아?’
검술을 배우면 청각도 발달한다고 하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저 거리에서 알아듣는 걸 보면.
엘리시아는 낭패스러움을 느꼈다.
어째 세우는 계획마다 다 어긋나는 것 같다고 그녀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이케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쉽게도 전하께서 괜찮다고 하시는군.”
말의 내용도 그렇고 목소리에 배인 웃음기로 보아 그녀가 라시안을 팔아 그의 부탁을 거절하려 했던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괜스레 머쓱해진 엘리시아는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총은 있으십니까?”
“배우러 오면서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이케르는 권총집에 권총을 빼서 그녀에게 건네었다.
라시안의 것과 비슷한 크기였는데 빛조차 굴절되지 않을 것 같은 검은색이었다.
‘각하의 머리색과 똑같네.’
이케르의 머리카락을 흘깃 본 엘리시아는 권총을 이케르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사격을 배우신 적은 있으십니까?”
“조금 배우기는 했네.”
“어떤 자세로 배우셨습니까?”
“두 가지로 알려주었는데,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군.”
“한번 해 보십시오.”
사격에도 여러 가지 자세가 있었다.
그중에서 엘리시아가 라시안에게 알려준 것은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두 손으로 목표물을 가리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 되기 때문에 쉽고 자연스러운 자세였다.
‘각하가 배웠다는 자세는 뭘까?’
호기심을 가지고 그녀가 지켜보는 사이 권총을 손에 든 이케르는 총을 잡은 오른팔을 목표물 방향으로 곧게 펴고 다른 왼팔은 약간 구부러진 형태로 오른팔을 지지하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의 자세를 보자마자 엘리시아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조금 배웠다고 보기에는 자세가 무척이나 안정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웨버 스탠스의 변형된 자세입니다. 그런데 정말 조금 배우신 것 맞습니까?”
의심 어린 그녀의 물음에 이케르는 수려한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답했다.
“마탑에 들렸을 때 잠깐 배웠지.”
엘리시아의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처음 사격을 배우는 라시안도 그렇고 잠깐 배웠다는 이케르도 그렇고 자세가 너무 좋으니 절로 의심이 들었다.
둘 다 이미 배워놓고서 시치미 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녀의 고개가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하르에게로 향했다.
팔짱을 낀 채 나무에 서 있는 그녀의 친우는 무척이나 지루해 보였다.
마침 잘됐다 싶어 엘리시아는 그를 향해 손을 들었다.
“하르, 이리와 봐!”
그녀의 부름에 하르는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는 느릿하게 다가왔다.
“왜?”
“일단 이거부터 받아.”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엘리시아가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총을 빼서 손에 쥐여주자 하르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이걸 왜 나한테 주나, 하는 눈빛이었다.
“자, 이제 어깨만큼 양발을 벌리고 서봐. 발끝은 목표물 쪽으로 향하도록 하고. 두 팔도 목표물 쪽으로 쭉 펴. 그리고 권총을 잡고 있는 네 두 손이 가슴 중앙으로 오도록 해야 해.”
엘리시아는 라시안이 취하고 있는 자세를 하르에게 똑같이 설명하고 자세를 잡아 준 다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무척이나 귀찮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는 시킨 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의 자세를 보고서야 엘리시아는 그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한 번도 총을 잡아본 적이 없는 하르조차도 곧바로 자세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검술도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런가.’
검술을 익힌 사람들의 특징인가보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