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이제 의심은 풀린 건가?”
하르를 불러 무엇을 확인하고자 했는지 아는 듯한 이케르의 물음에 엘리시아는 놀랐다.
생각해보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내 행동이 잘 읽히는 거야, 아니면 이 남자가 잘 읽는 거야?’
속셈을 들켜서 머쓱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엘리시아는 이케르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각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제 생각을 잘 알아차리시는 겁니까? 매번 그러시니 정말로 제 머릿속을 읽으시는 건 아닌가 의심이 가서요.”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으니 당연히 대답도 가볍게 돌아올 거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대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갑자기 날아든 고백에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런 말을 이런 자리에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음에 둔 상대를 주의 깊게 살피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수려한 눈매를 살짝 접은 채 여유롭게 덧붙이는 이케르의 모습은 그녀의 말문마저 막아버렸다.
만약 그의 말이 그저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았다면 엘리시아 역시 자연스럽게 농담처럼 받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묵직하게 진심을 담아 던져오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한 남자는 없기도 했고.
잠잠했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며 열이 오르는 것처럼 온몸이 뜨끈해졌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엘리시아가 입술만 달싹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뻗어온 서늘한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흠칫 놀란 그녀의 손바닥 위로 총이 내려앉았다.
무게감과 함께 느껴지는 서늘한 금속의 촉감이 달아오른 그녀의 열기를 가라앉혔다.
“확인할 거 다 확인했으면 이건 좀 가져가지?”
툭 던져오는 하르의 말에 고개를 든 그녀는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뚝뚝한 짙은 회색빛 눈동자에는 정신 차리라는 눈빛이 담겨 있었다.
엘리시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시에 자괴감을 느꼈다.
‘정말 미치겠네.’
바람둥이라고 소문날 만큼 연애경험이 풍부하면 무엇 하는가. 눈앞의 사내를 만날 때마다 정신없이 휘말려 버리는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일단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잊고 있었네. 고마워.”
웃으며 총을 받아든 엘리시아는 허리로 가져갔다.
총을 총집에 넣은 그녀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는 이케르를 돌아보았다.
“아까 두 가지 자세를 배우셨다고 하셨는데 다른 자세도 보여주시겠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엘리시아의 시선은 그에게서 살짝 어긋나있었다. 시선을 마주칠 자신이 없다는 것처럼.
그래서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케르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있는 것을.
“두 번째는 이 자세였네.”
오른손을 감싸고 있던 그의 왼손이 느릿하게 떨어져 나오며 자연스럽게 한쪽 팔을 늘어트린 자세로 바뀌었다.
그녀가 사격할 때 쓰는 즐겨 쓰는 한손 그립 자세와 똑같은 자세였다. 하지만 느낌은 무척이나 달랐다.
남자답게 넓고 떡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이 느껴지는 쭉 뻗은 팔,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버티고 선 우월하게 긴 다리, 거기에 조각 같은 외모까지.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저게… 저렇게 멋있는 자세였나?’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행히 조금 전 일로 경각심을 바짝 세우고 있어서인지 홀린 듯 쳐다보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갈증이 났다.
그의 어깨도, 팔도, 그리고 등과 가슴까지도 손끝 아래 느껴봤기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온몸을 촘촘하게 채우고 있는 탄탄한 잔근육들은 지금까지 그녀가 상대했던 남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으니까.
거칠게 파고든 것이 정신없이 몰아쳤을 때의 그 만족감이 떠올라 잠시 흐려졌던 짙은 보랏빛 눈동자는 고개를 한번 저음과 동시에 곧 제 색을 되찾았다.
“한손 그립 자세로군요. 저도 좋아하는 자세입니다. 제대로 잘 배우셨습니다.”
머릿속에 찾아든 음란마귀를 재빨리 털어낸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자세를 칭찬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의 자세는 훌륭했다. 한 부분만 빼면.
그에게 다가선 그녀는 총을 잡고 있는 이케르의 손가락을 조금씩 위쪽으로 움직였다.
“엄지의 첫마디와 중지가 위쪽으로 밀착되는 것이 좋습니다. 높게 권총을 잡으면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니까요.”
“그렇군.”
“그럼 한번 쏴보시겠습니까? 사격해보신 적은 있으시지요?”
“두세 번 쏴보기는 했었지.”
“두세 번이요? 마탑에서 좀 배우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이가 없어진 엘리시아가 되묻자 이케르는 나직하게 웃었다.
“검사가 총을 사용해서 뭐하냐면서 카르 그 녀석이 구박하더군. 자세를 배우고 한 번씩 쏴봤으니 두 번이라 하면 될 것 같은데.”
그의 말을 들은 엘리시아의 두 눈이 놀람을 담고 동그랗게 떠졌다.
‘그런데 이렇게 자세가 완벽하다고? 이 인간 대체 정체가 뭐야?’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눈앞의 사내가 못하는 건 없었다. 정치면 정치, 운동이면 운동, 심지어 밤의 그 일까지도.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 있다면 이 남자일 거라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입을 열었다.
설마 딱 두 번 해 본 사격까지 잘할까 싶었다.
“그럼 일단 쏴보시죠.”
“그러지.”
웃음기가 사라지고 진지해진 이케르의 금안이 목표물로 향했다.
목표물을 꿰뚫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에 엘리시아도 하르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탕’ 소리와 함께 총알이 발사되었다.
총의 반동이 있었을 텐데도 이케르의 팔도 몸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총을 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목표물을 향해 날아간 총알은 아쉽게도 목표물의 정중앙이 아닌 끝쪽을 맞추고 떨어졌다.
엘리시아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벌어졌다.
‘단 두 번이라면서. 무슨 저런 괴물 같은….’
스승은 그녀에게 천재라고 했는데 진짜 천재는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결과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세 번째 만에 목표물을 맞히는 것이 어떻게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쏴보라고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총알은 비슷한 위치에 맞고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케르의 자세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총이 발사될 때 아주 미세하게 손이 흔들렸다.
반동도 버텨내는데 흔들리는 것이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거라도 고쳐줄 것이 있어 다행이라고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케르에게 다가가 말했다.
“총을 쏘실 때 손이 미세하게 흔들립니다. 그것만 잡으시면 정 중앙에 맞추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그럼 다시 해 보지.”
이케르는 다시 목표물을 향해 총을 쏘았다.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몇 발을 더 쐈지만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 맞을 뿐이었다.
총이 발사될 때마다 여전히 이케르의 손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빗나간 총알이 같은 자리에 계속 맞는 것은 신기했지만 그 작은 실수 하나로 정중앙을 놓치는 걸 보니 답답하게 느껴졌다.
결국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옆으로 붙어 그의 손목 아래쪽을 잡았다.
남자답게 굵은 손목이라 한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고정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한번 쏴보십시오.”
“그러지.”
그녀의 말에 이케르는 순순히 다시 총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총알이 정확히 목표물의 정중앙을 맞히고 떨어졌다.
‘응? 안 흔들리는데…? 내가 느끼지 못한 건가?’
엘리시아는 그녀의 손안에 흔들림이 전해지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의 손목은 허공에 고정이라도 된 것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다시 쏴보시겠습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그녀는 이케르에게 사격을 요청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총알이 목표물의 정중앙을 맞췄는데도 떨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네?’
눈을 몇 번 깜빡인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손을 놓고 재차 부탁했다.
이번에는 좀 전과 똑같이 목표물의 끝쪽을 맞추고 떨어졌다. 그녀가 손목을 잡기 전과 똑같은 위치였다.
‘뭐지? 분명 흔들림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엘리시아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미세해서 느끼지 못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결국 자신이 둔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 그녀는 이케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총을 쏘실 때 흔들리는 부분만 고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잡아드렸을 때 흔들리지 않았던 걸 보면 지금은 두 손으로 쏘시면 될 것 같고요.”
“이렇게?”
늘어져 있던 이케르의 왼손이 올라와 총을 쥐고 있는 오른손의 손목을 받쳤다.
그러다 보니 손목을 잡아주기 위해 옆에 서 있던 엘리시아는 졸지에 그의 품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흐릿하던 우드향이 순식간에 강해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이러면 되겠나?”
따뜻한 숨결과 함께 깊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아오면서 전율이 엘리시아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두 팔 사이에 충분한 공간이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에게 끌어안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묘한 긴장감이 갇힌 공기를 타고 흘렀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자세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봐줘서 고맙네.”
담담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를 감싸고 있던 팔이 내려가면서 짙어졌던 우드향이 다시 옅어졌다.
그제야 엘리시아는 참았던 숨을 소리 없이 내뱉었다.
자신이 긴장했다는 것을 눈앞의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연애경험이 몇 년 차인데 이런 걸로 긴장한단 말인가.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한 그녀는 총을 내리는 이케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이걸로 오늘 수업은 끝마쳐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총을 총집에 집어넣은 그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고마웠네. 나도 가벼운 보답을 하나 할까 하는데.”
“보답이요?”
갑자기 무슨 보답이란 말인가.
놀란 엘리시아가 눈을 깜빡이자 이케르는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하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테스케 경. 자네의 실력을 구경할 기회를 주지 않겠나?”
갑작스럽게 던져진 그의 제안에 하르의 짙은 눈썹이 놀람을 담고 위로 치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