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하르의 무감해 보이던 얼굴 위로 감정의 파편이 깃들었다.
이케르를 직시하는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과거를 더듬느라 잠시 흐려졌다.
공작이 하르에게 던진 질문은 먼 과거의 어느 날 그가 스스로에게 한 적이 있는 질문이었다.
처음 이성에 눈을 떴을 때, 그리고 엘리시아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에 두근거렸고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며 그녀와의 먼 미래를 꿈꾸기도 했었다.
소년의 첫사랑이었고 풋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에 물들어 있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엘리시아의 어머니인 전대 카멜리아 후작의 행보를 보며 스스로 깨달아버린 것이다.
카멜리아 가문의 후계자가 지고 있는 의무와 책임을. 그 길을 가는 그녀의 옆에 서기에는 자신이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소년의 첫사랑은 상대에게 전달조차 되지 않은 채 스스로의 손에 의해 그대로 꺾여 버렸다.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롯이 그의 것이었으니 지우는 것 역시 오롯이 혼자 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이 긴 시간 동안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왔다 해도.
그래도 하르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엘리시아의 남자가 될 수는 없지만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어린 날 그녀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가 신에게 했던 맹세를 계속해서 지켜나갈 수 있으니까.
그가 했던 그 맹세는 여전히 그의 심장 깊숙이 새겨져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 수 있었다.
“엘리는 제게 있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하는 가족이며 친우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겁니다.”
굳은 의지를 담아 대답하는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 ⚜ ⚜
‘테스케 경이 옆에 있는 한 엘리의 안전에 문제는 없겠군.’
멀어지는 엘리시아와 하르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이케르는 입매를 부드럽게 늘어트렸다.
시종장에게 말해 하르를 엘리시아와 같이 데려오도록 한 것은 바로 그였다.
하르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실력이 출중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칭찬에 인색한 루테손이 대놓고 자랑할 정도면 빈말이 아니라 정말 천재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하르 테스케는 엘리의 소중한 사람이었고 앞으로 그가 하려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될 인물이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전력이 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앞으로 일어날 상황들에서 예상치 못한 오차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엘리시아에게 사격 수업을 들은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충분히 만족할 만한 시간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부수적인 것이었다.
하르에게 자연스럽게 대련을 부탁할 빌미를 만들려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니.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부탁하는 것보다 사격 수업을 해준 답례라는 작은 이유라도 있는 것이 낫지 않은가.
물론 단번에 거절당해 도발이라고 하는 살짝 치사한 방법을 쓰기는 했지만 확인하고자 하는 것을 확인했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무엇보다 진심이 아닌 상대와 싸우는 취미도 없었고.
“테스케 경의 검은 엘리가 위험에 처해야 제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부드럽게 웃던 이케르는 문득 자신이 마지막에 던졌던 질문을 떠올렸다.
사랑 앞에서는 유치해진다고 하더니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 모양이었다.
그런 식으로 멋대가리 없게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하려 한 것을 보면. 그리고 상대의 대답에 안도한 것을 보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케르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손목으로 향했다.
오늘 엘리시아는 그가 일부러 만들어낸 미세한 흔들림을 잡아주기 위해 그의 손목을 잡았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연회의 그날 밤 이후로 가장 이성적인 접촉이었다는 걸.
지금까지 그녀가 그에게 먼저 손을 댄 신체는 멱살과 그곳밖에 없었으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언젠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먼저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케르는 몸을 돌렸다.
⚜ ⚜ ⚜
후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엘리시아는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하르를 쳐다보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부르지 말라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르지 않을 그녀가 아니었다.
“하르.”
“…….”
“하르 테스케.”
“…….”
“너 안 자는 거 다 알거든?”
빨리 눈을 안 뜨면 가만 안 두겠다는 눈빛으로 엘리시아가 노려보자 하르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눈을 떴다.
“왜?”
엘리시아는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아까 각하와 했던…….”
하지만 그녀의 첫 번째 시도는 장렬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곧바로 잘라버린 것이다.
“묻지 마.”
“아니 그래도 각하께서도 아시는데 나도 알아야…….”
“신경 꺼.”
두 번째 시도도 실패로 돌아가자 엘리시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르가 저렇게 구는 것을 보면 분명 뭔가 자신 때문에 중요하거나 대단한 걸 포기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모르고 넘어가라고? 장난해?’
하르를 무섭게 노려보던 엘리시아는 그가 미동조차 없자 한숨을 내쉬며 이케르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럼 그 이야기도 모르겠군. 하벌린 국왕이 테스케 경에게 망…….]
하르 이 자식은 하필이면 거기서 말을 끊어가지고. 한 음절만이라도 더 들었으면 추측이 가능했을 텐데.
‘망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뭐가 있지? 망하다? 설마 국왕이 망하라고 했겠어? 망언? 그것도 말이 안 되고. 대체 뭐야?’
이리저리 고민하던 엘리시아는 결국 다시 하르를 붙들고 늘어졌다.
“너 정말 이럴래? 말 안 하면 나 삐진다?”
“…….”
협박까지 했음에도 하르가 대답은커녕 눈조차 뜨지 않자 엘리시아는 심술이 치밀었다.
“네가 말 안 한다고 내가 알아내지 못할 거 같아? 루리엔이나 각하께 여쭤보면…….”
어디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두 눈을 부릅뜬 채 말하던 엘리시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엘리.”
언제 눈을 뜬 것인지 가라앉은 회색빛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분위기에 얼떨떨해진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하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선택한 거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엘리시아는 반박하려 했다. 아무리 그가 선택했다 해도 자신이 관련되어 있으면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하르의 말은 또다시 그녀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내가 정한 길이었기에 고민도 망설임도 없었어. 그러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줬음 좋겠다.”
약았다고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차라리 조금 전처럼 모르쇠로 일관했다면 캐묻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다정한 눈빛으로 진지하게 말하면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지 않은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고 있던 엘리시아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더 묻지 않을게. 대신!”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나타내기라도 하듯 팔짱을 낀 그녀는 하르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나와 관련된 선택을 해야 할 때는 무조건 말하겠다고 약속해.”
“…….”
“빨리 약속하라고.”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엘리시아의 협박에 못 이겨 하르는 결국 약속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그나마 기분이 풀린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엘리시아를 보며 하르는 생각했다.
정말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고. 엘리시아 카멜리아는.
⚜ ⚜ ⚜
찻집으로 들어선 루리엔은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손을 들어 보였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의 눈빛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루리엔이 테이블로 다가가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야, 루리엔.”
“그러게, 2년만인가?”
루리엔은 스스럼없이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악수를 한 두 남녀의 입가에 똑같이 미소가 깃들었다.
“일단 앉자. 내가 너 좋아하는 라즈베리 티 주문해놨어.”
“2년이나 지났는데도 기억하고 있었네. 고마워.”
“잊어버릴 수가 없지. 그렇게 멋지게 날 차버리고 간 여자를 어떻게 잊어버려.”
장난기가 어린 남자의 가벼운 말에 루리엔은 보이지 않게 살짝 웃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어색함이 없었다.
‘그래, 이런 남자였지. 녹턴은.’
녹턴 시에드는 그녀가 체빌 왕국의 유벨로스 아카데미에 유학 갔을 때 만난 동급생이었다.
취미와 관심 분야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해서 친하게 지냈을 뿐인데 어느새 두 사람은 아카데미에서 연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어이가 없었던 루리엔은 소문을 바로 잡으려 했다. 그러자 녹턴이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진짜 사귀는 건 어때?]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루리엔은 생각했다.
어차피 소문은 나 있었고 그녀 역시 녹턴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말했다.
[난 때가 되면 제국으로 돌아가야 해. 그때 잡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그게 조건이야.]
[그래, 알았어.]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카멜리아 후작의 부고를 듣고 루리엔이 제국으로 돌아갈 때 녹턴은 정말 붙잡지 않았다.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잘 가라면서 웃어주던 녹턴의 눈빛 깊은 곳엔 괴로움과 슬픔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것을 눈치챘지만, 루리엔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제국으로 돌아오면서 그와의 인연은 끝났다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2년 만에 그가 제국으로 온 것이다.
못 본 사이 녹턴은 예전보다 더 남자다워져 있었다.
“제국에는 어쩐 일이야? 여행이라도 온 거야?”
밝은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하며 루리엔이 묻자 녹턴은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국의 귀족가에서 보좌관 제의를 받았어.”
“보좌관? 행정처는 어쩌고?”
루리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체빌 왕국에서는 유벨로스 아카데미의 수석과 차석을 왕실 행정처에 고용하는 특혜를 주고 있었다.
그래서 수석이었던 루리엔과 차석이었던 녹턴은 졸업하자마자 왕실 행정처에 채용되었었다.
루리엔은 제국으로 돌아오느라 사표를 냈지만 녹턴은 그만둘 이유가 없었기에 당연히 계속해서 다니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국의 귀족가에서 보좌관을 하겠다니.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처는 월급이 너무 짜더라고.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해서 옮겨볼 생각이야.”
녹턴의 대답에 루리엔은 어이없다는 눈빛을 떠올렸다. 요 근래 그녀가 들어본 이야기 중 가장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농담이 많이 늘었네, 녹턴 시에드. 행정관들의 꿈의 일터인 행정처가 배울 게 없다니. 그리고 너 돈에 별로 관심 없잖아.”
그녀가 하나하나 반박하자 녹턴은 싱긋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힘든 묘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루리엔은 그가 이유를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오랜 시간 함께 했었기에 그의 작은 표정 하나까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그 귀족가가 어딘데.”
별 볼 일 없는 곳이면 당장 체빌 왕국으로 쫓아버릴 거라고 벼르면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루리엔은 들려온 녹턴의 대답에 그대로 굳어졌다.
“데이모스 공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