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차를 마시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루리엔은 생각했다. 만약 차를 입에 머금고 있는데 저 소리를 들었다면 뿜었거나 사래가 걸렸을 것이 분명했다.
동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찻잔을 입에 댄 그녀는 입술만 적시고는 내려놓았다. 그리고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데이모스 공작가? 그럼 데이모스 공작의 보좌관 자리?”
“어. 그것도 대단히 혹할만한 조건으로. 마침 제국에 오고 싶었기에 승낙한 거고.”
녹턴을 보는 루리엔의 눈이 의심을 담고 살짝 가늘어졌다.
이것이 정말 우연일까?
데이모스 공작이 엘리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고 있는 이 시기에 녹턴이 공작의 보좌관으로 오다니.
물론 녹턴의 능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녀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녀가 공작의 입장이라면 타국에서 데려오는 그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국에 쓸 만한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생각에 잠겨 있던 루리엔은 녹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네 여왕님도 궁금했고.”
“뭐?”
“어떤 사람이기에 네가 가질 수 있던 그 많은 것들을 버리게 만들었는지.”
나까지도. 녹턴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루리엔은 그의 입모양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한 그 모든 것을 가지게 해준 것이 내 여왕님이니까.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도 내 여왕님이 더 소중했으니까.”
어쩌면 녹턴에게는 잔인한 말일 수도 있지만 루리엔은 자신의 대답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녀가 신에게 했던 맹세는 여전히 심장 속에 새겨져 있었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그 맹세를 지킬 생각이었다.
녹턴을 비껴가 허공을 더듬는 루리엔의 눈빛은 먼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 ⚜ ⚜
하르와 루리엔이 엘리를 처음 만난 것은 보육원에서였다.
그들이 있었던 보육원은 솔직히 환경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아니, 최악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원장이 보육원을 돈벌이 수단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세상의 무서움을 알아야 한다며 다섯 살만 넘으면 최소한의 끼니만 제공한 채 잡다한 노동을 시켰다.
투정을 부리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징벌방에 갇힌 채 자작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맞아야 했고 그날 하루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굶어야만 했다.
그러니 아이들이 징벌방에 끌려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원장은 아이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교육시켰다.
하지만 그중에는 원장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아이가 루리엔과 하르였다.
일곱 살이었지만 어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말을 잘했던 루리엔은 원장의 횡포에 항상 논리적으로 맞서다가 열 받은 원장에 의해 징벌방으로 끌려가곤 했다.
동갑내기 하르는 대들거나 사고는 치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저지른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징벌방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이용하는 아이들도 있어 루리엔이 그러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덜덜 떨며 우는 아이를 보면 그냥 자기가 한 짓이라며 나서 버리니, 나중에는 루리엔도 포기할 정도였다.
둘의 공통점은 절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받는 벌도 다른 아이들 보다 강했지만 둘의 의지를 굽히지는 못했다.
원장이 독한 것들이라고 치를 떨며 8살이 되면 다른 보육원으로 보내버릴 거라고 입에 달고 다닐 정도였다.
그때마다 루리엔은 하르에게 나직하게 말하곤 했다.
“어차피 여덟 살이 되면 나가야 하는데 뭘 새삼스럽게.”
그들이 있는 곳은 영유아 보육원이었고 최대 7세까지만 보육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8살이 되면 기본 교육이 가능한 다른 보육원으로 이동해야 했다.
루리엔과 하르는 그때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이보다 더 심한 곳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원장이 5세 이상의 아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게 했다. 새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딘가 구멍 나거나 해지지 않은 옷이었다.
“귀족이 오나 봐. 마침 점심때니까 밥은 잘 나오겠다.”
자신에게 주어진 옷을 든 채 루리엔은 하르에게 속삭였다.
후원을 하고 있거나 후원을 할 것 같은 귀족이 방문하면 잘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이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귀족이 보육원을 둘러보는 동안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식사 때와 맞으면 제대로 된 식사가 나왔다.
허기를 간신히 채울 정도의 부실한 식사가 아닌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는 제대로 된 식사가.
옷을 갈아입는 아이들의 눈빛이 기대에 젖어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원장은 아이들이 옷을 다 갈아입자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루리엔과 하르 역시 그 속에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화려하지는 않지만 크고 우아한 마차가 달려와 보육원 앞에 멈추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임시계단이 설치되기도 전에 가장 먼저 폴짝 뛰어내린 것은 붉은 머리카락의 인형처럼 작고 예쁜 소녀였다.
루리엔과 하르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온 귀족들은 여럿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마차에서 뛰어내린 아이는 없었다.
어리든 크든 어른들의 손을 잡고 귀족이라는 것을 뽐내기라도 하듯 우아하게 내리던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특이한 애라고 생각하고 있던 루리엔은 하르가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짓궂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도 남자라고 보는 눈은 있어서. 저 아이가 예뻐?”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뭐?”
하르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그냥 다물었다.
루리엔 역시 더 이상 묻지 않고 마차로 눈을 돌렸다. 좀 더 놀리고 싶었지만 수다 떨다가 걸리면 그것도 징벌방 행이었다.
잠시 후 아이를 따라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와 똑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아이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녀는 다른 귀부인들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았다.
상체의 라인을 살리며 엉덩이까지 감싸고 내려오는 하얀 자켓에 검은 바지 차림이었다.
남자 귀족들이나 입는 정복차림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해졌다.
그 사이 마차에서 내린 여인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나무랐다.
“엘리, 그렇게 뛰어내리다가 다칠 수 있다고 했잖니. 조심해야지.”
“하지만 친구를 빨리 만나고 싶었는걸요.”
“그랬구나. 그래도 항상 조심해야 한단다.”
“네, 어머니.”
환하게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하는 소녀를 보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에 부러움이 깃들었다.
소녀가 입고 있는 예쁜 옷도 부러웠지만 그것보다 더 부러운 것은 딸을 향한 어머니의 애정 어린 눈빛이었다. 너무나도 소중한 보물을 보는 듯한 그런 눈빛 말이다.
두 모녀의 대화는 원장이 급히 다가가면서 끊어졌다.
“어서 오십시오, 카멜리아 후작님. 이 누추한 곳에 방문해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아이들은 또다시 놀랐다. 여자가 후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귀족은 다 남자만 있다고 여겼던 아이들의 생각이 단숨에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원장의 인사를 받은 카멜리아 후작은 딸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만나서 반갑군, 퀼튼 원장.”
“저야말로 카멜리아 후작님을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카멜리아 후작가의 명성은 익히 들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준비한 것처럼 원장의 입에서 쉴 새 없이 나오는 찬양의 말들을 듣고 있던 루리엔은 하르에게 속삭였다.
“입에 꿀 바르고 나왔나 봐. 근데 어쩐대? 후작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으신걸.”
하르는 카멜리아 후작을 쳐다보았다.
루리엔의 말처럼 그녀의 표정은 원장의 말이 계속될수록 조금씩 굳어져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했다가는 입가에 어려 있던 미소마저 사라질 판이었다.
원장 역시 그 사실을 느꼈는지 재빨리 하던 말을 마무리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럼 제가 저희 보육원 안내를…….”
당장이라도 보육원을 소개할 것처럼 나서는 원장을 멈추게 한 것은 카멜리아 후작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안내는 되었네.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우리 딸이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이니.”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며칠 전 사귄 친구가 이 보육원에 있다고 하더군.”
모여 있는 아이들을 흘깃 쳐다본 카멜리아 후작은 몸을 숙여 자신의 딸과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원장에게 사무적으로 이야기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온화한 목소리였다.
“엘리, 네 친구는 어디 있니?”
엘리라 불린 소녀는 카멜리아 후작의 물음에 눈을 빛내더니 손가락을 들어 아이들 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어요. 저 아이예요.”
루리엔은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소녀의 손가락은 그녀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왜 이쪽을 가리키는 거지? 설마?’
조금 전 하르가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것을 기억해 낸 루리엔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굳어져 있는 하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르, 너…….”
하지만 루리엔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소녀가 카멜리아 후작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양쪽으로 벌어진 아이들 사이로 걸어온 소녀는 하르 앞에서 멈춰 섰다. 덕분에 루리엔도 소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본 소녀는 너무나도 예쁘고 귀여워서 마치 요정 같았다.
불의 요정이 있다면 저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루리엔의 귀에 발랄한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엄마, 얘가 제 친구 하르에요.”
소녀의 말이 끝나자 카멜리아 후작은 천천히 몸을 숙여 하르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의 딸을 볼 때만큼이나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네가 하르구나. 엘리에게 얘기 많이 들었단다. 우리 엘리를 도와줘서 정말 고맙구나.”
“……예.”
카멜리아 후작의 인사에 하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소년의 귀 끝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른에게, 그것도 높은 신분의 귀족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은 것이 처음이니 그럴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루리엔은 이어진 소녀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엄마, 황궁에서 일하시는 동안 저 여기서 하르하고 놀아도 돼요?”
소녀의 폭탄 같은 물음을 듣자마자 이게 웬 횡재야 싶어 루리엔은 원장을 쳐다보았다.
소녀가 이곳에 있으면 원장은 그들에게 노동을 시키지 못할 것이다.
혹시라도 소녀가 돌아가서 어머니인 카멜리아 후작에게 이야기를 하면 후원을 받을 수 없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원장이 다급히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