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33)

52화

“엘리.”

하르가 올라간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던 엘리시아는 고개를 돌려 루리엔을 쳐다보았다.

“응?”

“너 여기 왜 온 거야?”

너무 직접적인 질문인가도 생각했지만 이런 건 솔직하게 나가는 것이 맞다고 루리엔은 생각했다.

“당연히 하르 만나러 왔지. 덕분에 너도 만났고.”

잘 알면서 뭘 묻냐는 듯 생긋 웃는 엘리시아를 보며 루리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엘리시아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그것도 있겠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잖아.”

“…….”

엘리시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의외라는 것 같기도 하고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소녀의 두 눈이 반달처럼 곱게 휘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도 너희들에게 묻고 싶은 거 있었는데. 루리엔, 넌 크면 뭐 할 거야?”

대답 대신 날아든 장래 희망 질문에 루리엔은 눈을 깜빡였다.

말을 돌리려는 건가 싶으면서도 루리엔은 평소 자신이 하고 있던 생각을 입에 담았다.

자신이 대답해야 엘리시아도 대답해줄 것 같았다.

“글쎄.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걸. 식당일이나 잡일 같은 걸로 먹고 살다가 운이 좋으면 괜찮은 남자 만나서 혼인하는 정도 아닐까?”

일곱 살짜리 아이가 입에 담기에는 무척이나 염세적인 말이었지만 이미 어린 나이에 많은 일을 보고 듣고 겪어본 루리엔이기에 가능한 대답이기도 했다.

실제로 16세가 되어 보육원을 나가더라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니 식당일이나 잡일 같은 것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남자를 잘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성공이라고 하겠는가.

‘저런 것이 내 미래라니.’

한심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금 어린 루리엔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루리엔의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엘리시아가 갑자기 손을 내밀더니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쯧쯧 하고 혀 차는 소리도 함께였다.

“현실적인 거 말고 원래 네 꿈.”

“내 꿈……?”

“응. 뭐가 되고 싶었는데?”

내가 되고 싶었던 것…….

일곱 살의 소녀는 자신이 되고 싶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홀린 듯 그것들을 입에 담았다.

“서기나 보좌관 같은 거. 몸이 아니라 머리로 일하고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

“서기나 보좌관? 그거 엄청 일 많은 거 알아? 서류가 이만큼씩 맨날 책상에 쌓여 있어. 그래도 하고 싶은 거야?”

생각만 해도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엘리시아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이 본 서류 더미의 두께를 표현했다.

소녀의 과장되고 장난스러운 표현에 루리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하고 싶어. 하지만 그런 일들은 남자들밖에 못 하니까.”

“누가 그래?”

“응?”

“남자밖에 못 한다고 누가 그래?”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는 엘리시아를 보며 루리엔은 또다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루리엔은 곧 엘리시아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카멜리아 후작가는 여자가 가주이며 작위도 계승 받으니 밖의 사정은 잘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루리엔은 나름대로 엘리시아가 이해하기 쉽게 답했다.

“실제로 그래. 여자가 그런 일을 하는 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어. 엘리 너희 집에도 여자 서기나 여자 보좌관은 없잖아. 주변에서 본 적 있어?”

“본 적은 없어.”

“것 봐. 현실이 그런걸.”

“그럼 루리엔 네가 처음이 되면 되잖아.”

엘리시아의 말에 루리엔은 어린애답지 않게 쓴 미소를 지었다.

“그랬다가 아무도 고용해주지 않으면. 그럼 나 굶어 죽는데?”

“내가 고용할게.”

“뭐?”

루리엔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사이 엘리시아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가 크면 언젠가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야 할 거고 서기든 보좌관이든 필요하게 될 거야. 그럼 그 자리를 네게 줄게.”

루리엔을 응시하는 엘리시아의 표정도 눈빛도 너무나 진지했다.

아니, 그것이 설사 어린 마음의 치기에서 내뱉은 말이라고 해도 어린 루리엔을 흔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무언가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루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눈가가 달아오르며 붉어지려 했을 때 엘리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루리엔은 똑똑하니까 더 좋은 곳에 가고 싶다면 잡을 수는 없겠지만 내 보좌관이 되면 월급은 잘 챙겨줄게. 그리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약속해.”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애 어른처럼 말하는 엘리시아의 모습에 루리엔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야, 그건 당연한 거잖아. 월급도 안 주고 부려먹으면 악덕 고용주라고.”

평소답지 않게 루리엔이 소리 내어 웃자 엘리시아는 헤헤하고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런가?”

“그래.”

둘이 같이 웃고 있을 때 하르가 나무에서 딴 과일을 한 팔에 안고 내려왔다.

“하르~”

엘리시아가 쪼르르 달려가자 하르는 따온 과일 중 가장 잘 익은 것 하나를 잡아 옷에 슥슥 닦은 다음 내밀었다.

과일을 받아든 엘리시아는 조금 전까지 하르가 올라가 있던 나무를 올려다보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르는 진짜 운동 신경이 좋은 거 같아. 커서 기사 같은 거 하면 좋겠다.”

“기사?”

“응. 엄청 잘 어울릴 거 같아. 혹시 하르가 나중에 커서 정말 기사가 되면 내 호위기사 해줘. 월급도 잘 주고 부려 먹지도 않을게!”

자신에게 똑같은 말을 하르에게 하고 있는 엘리시아를 보며 루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귀족 아이들은 다 거만하고 제멋대로라고 생각했는데 엘리시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만 자란다면 어른이 되어 정말로 고용인으로 일하게 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르 역시 루리엔과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무뚝뚝하게 단 한 번이었지만 확실한 대답이었다.

하르 역시 자신만의 고집이 있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거절할 아이였다.

엘리시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나도 노력할게. 나중에 내가 컸을 때 너희들이 나와 같이 일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우리 계속해서 함께 하자. 그래 줄 거지?”

7살짜리 동갑내기 아이의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어.”

루리엔도 하르도 무엇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엘리시아에게서 흘러나오는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에 홀린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날 이후 엘리시아는 보육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 ⚜ ⚜

‘오늘도 안 오네.’

인형 눈알을 붙이면서 루리엔은 문 쪽을 흘깃거렸다.

하르 역시 계속해서 문 쪽을 흘깃거리는 것을 보니 엘리시아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엘리시아가 보육원에 오지 않은 지 벌써 닷새째였다.

처음에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을 시키지 않던 원장도 이틀이 지나자 아이들에게 곧바로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보육원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잠시나마 피어났던 웃음이 사라졌고 보육원은 침울한 공기로 가득 찼다.

한 소녀의 부재가 이렇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라고 루리엔은 생각했다.

그래도 불안은 했는지 사흘째 되던 날 사람을 시켜 후작저의 동태를 확인한 원장은 완전히 마음을 놓은 듯 원래보다 더 독하게 굴었다.

그동안 못했던 일까지 한꺼번에 시킨 것이다.

쏟아지는 일감을 처리하기 위해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자기 전까지 앉아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해야 했다.

아이들이 엘리시아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원장은 심술궂게 이죽거리며 사납게 혼내곤 했다.

“백날 기다려봐라. 그 계집애가 다시 오는지. 정신 차리고 일이나 똑바로 해!”

하지만 루리엔과 하르는 원장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봐온 엘리시아의 성격이라면 쉽게 마음이 변할 아이도 아니었고 말도 없이 오지 않을 아이도 아니었다.

하르가 심부름 나갈 일이 생기면 카멜리아 후작가에 가서 엘리시아를 만나보고 오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작업하던 루리엔은 그만 평소 하지 않던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미 눈알을 붙인 인형의 이마에 눈알을 하나 더 붙여버린 것이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리고 원장의 예리한 눈은 루리엔의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루리엔!”

자신의 이름이 날카롭게 불리는 순간 루리엔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원장선생님.”

루리엔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사과했지만 원장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득달같이 달려온 원장은 눈이 세 개 붙은 인형을 들어 보이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이 인형 단가가 얼만지나 알아?”

“…….”

그럼 어린 애한테 일을 시키지 말든지.

아주 잠깐 반발심이 들었던 것도 잠시 루리엔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원장의 잔소리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실수를 저지른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요새 원장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서였다.

엘리가 매일같이 보육원에 오는 것이 자신과 하르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벼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루리엔은 자신의 결심을 잊고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도저히 참고 넘길 수 없는 말이 원장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평소에도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기는 했지만 요즘 귀족 계집애하고 어울리더니 아예 눈에 뵈는 게 없나보구나. 그 철없는 계집애가 널 데려가 주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보지?

“…….”

“처음부터 너도 하르 저놈도 그 계집애의 일회용 장난감이었을 뿐이야. 정말 친구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입안에 독설 주머니라도 장착한 것처럼 마구잡이로 뿌려대는 원장의 말에 루리엔은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일까. 이보다 심한 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들었는데. 그때도 잘 참고 넘겼는데 지금 이 순간 이렇게 화가 치미는 것은.

루리엔의 고사리 같은 주먹이 꽉 쥐어지며 부들부들 떨렸다.

대꾸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루리엔의 작은 입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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