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33)

53화

“엘리는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

“뭐?”

“엘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요.”

고개를 똑바로 든 루리엔은 원장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엘리시아를 욕하는 것도 싫었고 엘리시아와 자신과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폄하하는 것도 싫었다.

대들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화가 치밀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원장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오르더니 곧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머리 하나는 좋은 줄 알았더니 이거 순 머저리 아냐. 모르겠니? 넌 버림받은 거야. 잠시 가지고 놀다가 쓸모없으니까 버려진 거라고. 이 망쳐버린 인형처럼 말이야.”

루리엔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며 계속해서 독설을 내뱉던 원장은 손에 들고 있던 눈 세 개짜리 인형을 보란 듯 떨어트리고는 발로 꾸욱 눌렀다.

그것은 루리엔 뿐 아니라 하르, 그리고 보육원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너희들은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는 인형 같은 존재라고.

“…….”

분한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며 원장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제까짓 게 분해봤자 어쩌겠나 싶었다.

잠시 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리엔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아.”

“물론 그렇게 부인하고 싶겠지. 고장난 장난감처럼 버려졌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말이다. 그 계집애가 정말 너희 같은 버러지들을 친구로 여겼을 거라 생각하는 거니? 뭐가 아쉬워서?”

“그렇지 않아! 엘리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 나도 그런 존재가 아니고!”

루리엔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원장을 무섭게 노려보며 외쳤다.

지금까지 이렇게 화나본 적이 있었던가.

원장의 구둣발에 짓밟히는 인형을 보는 순간 루리엔의 머릿속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함께 했던 마지막 날, 엘리시아가 자신과 하르에게 했던 말은 여전히 루리엔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귀족들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심으로 믿고 싶었고 실제로도 믿고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계속해서 함께 하자. 그래 줄 거지?]

그런데 지금 원장은 그 말에 대한 믿음을 산산이 깨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루리엔의 반발에 원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을 떠올리며 냉소했다.

“그렇지 않다고? 내가 알아보니 그 계집애, 제집에 있다더구나. 아픈 것도, 여행 간 것도 아니었어. 그런데도 오지 않는다는 건 새로 얻은 장난감들에 싫증이 났다는 거 아니겠니? 재밌을 것 같아 손에 쥐었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 같은 장난감이어서 버리고 싶은 걸지도.”

원장의 계속되는 막말에 루리엔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분노에 차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어린 소녀는 평소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거짓말! 당신이야말로 거짓말하지 마. 엘리가 그럴 리 없어.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당신과는 다르다고. 맨날 일 시키고 제대로 밥도 주지 않고 징벌실에 끌고 가고. 당신이야 말로 우리를 학대하고 있잖아. 진짜 버러지는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야!”

루리엔의 입에서 진실들이 쏟아져 나오자 원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이런 건방진 년! 어디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

손을 치켜드는 원장을 보면서도 루리엔은 고개를 숙이거나 피하지 않았다. 두 눈에 부릅뜬 채 이를 악문 채 원장을 노려볼 뿐이었다.

하지만 내리쳐진 원장의 손은 루리엔에게 닿지 않았다.

언제 뛰쳐나온 건지 하르가 원장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은 것이다.

원장의 눈매가 한층 더 매섭게 치켜 올라가며 으득 하고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버러지 같은 것이 어디 감히!”

원장이 다른 손을 들어 하르의 따귀를 때리려 했을 때였다.

문이 쾅 열리며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작업실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내 친구들한테 손대지 마!”

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온 것은 엘리시아였다.

정신없이 뛰어온 것처럼 가쁜 숨을 내쉬는 소녀의 새하얀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네가 어떻게……!”

예상치 못한 엘리시아의 등장에 원장은 당황했다.

루리엔에게 말했던 것처럼 사람을 시켜 조사했을 때 분명 엘리시아는 계속해서 저택에 있었다.

여행가거나 아픈 것도 아닌데 보육원에 오지 않으니 그녀는 엘리시아가 루리엔과 하르에게 흥미를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숨을 진정시키려는 듯 몇 번 심호흡을 한 엘리시아는 일하고 있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손에 쥐고 있는 인형들과 쌓여 있는 인형들을 본 소녀의 눈빛에 혐오가 깃들었다.

“엄마 말씀이 맞네. 내가 며칠 안 왔다고 바로 이렇게 일을 시키다니.”

쯧 하고 혀를 찬 엘리시아는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루리엔과 하르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르, 뒤로 물러서.”

엘리시아의 말에 하르는 잡고 있던 원장의 손목을 놓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원장이 엘리시아에게 무슨 짓을 할까 싶어 완전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두 아이와 원장을 갈라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이에 선 엘리시아는 원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고 때리기까지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요?”

원장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쪼그마한 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당돌하게 물어오는 것이 가소롭기까지 했다.

평소 같으면 상대의 신분을 고려해 말을 가려가며 했겠지만 루리엔과 하르로 인해 열이 받아있던 그녀는 이성의 경고음을 무시하고 말았다.

“아가씨가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친구들을 위해 아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후원 정도랍니다.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든 혼을 내든 모두 제 소관이란 말입니다.”

원장의 비웃음이 담긴 말에 엘리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이지요. 제가 이 보육원의 원장이니까요.”

네가 뭘 어쩔 거냐는 눈빛으로 원장은 엘리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보육원이 나라의 지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관리는 전적으로 원장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아이를 팔아넘긴다거나 살해한다거나 등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때리든 굶기든 일을 시키든 원장의 마음대로인 것이 보육원들의 현실이었다.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는 건 후원을 받기 위해서일 뿐 그들의 말을 꼭 들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쪽 입매를 비튼 원장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러니 친구는 돌아가서 사귀시고 제 보육원에는…….”

“여기가 왜 자네의 보육원인가.”

원장은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그대로 굳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작업실 안으로 들어오는 카멜리아 후작이 보였다. 퇴궁 후 바로 온 건지 정복 차림이었다.

“가, 각하!”

설마 카멜리아 후작이 같이 왔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원장이 당황하는 사이 작업실 안을 둘러본 후작의 미간이 바로 찌푸려졌다.

“듣자 하니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나라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이 자신의 것이라니.”

“그, 그건……!”

“그러니 나라에서 지원한 아이들의 보육비를 빼돌리고 일을 시켰겠지. 그런 자네에게 원장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조용하지만 서릿발 같은 후작의 지적에 원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치부가 까발려졌으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뉘우치기는커녕 뻔뻔하게 얼굴을 쳐들고 후작의 말을 맞받아졌다.

“따님에게도 말했지만, 이 보육원의 담당자는 저입니다. 아무리 후작님이시라도 왈가불가하실 수는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후작의 서늘한 눈빛에 원장은 흠칫했다. 조금 전 엘리시아가 했던 물음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 느낌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고치는 것이 좋겠군.”

카멜리아 후작은 원장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왼손에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들어 그녀의 앞에 펼쳐 보였다.

뭔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며 들여다보던 원장의 귓가에, 후작의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내가 상정한 보육원 관리 강화 법안이네. 오늘 의회를 통과했지. 내용은 간단해. 나라에서 아이들을 위해 지원한 보육비를 사적으로 빼돌리는 경우, 아이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과도한 체벌을 하는 경우 원장 자리를 즉시 박탈하고 각각 1년 형에 처한다.”

“……!”

“원장 자네는 놀랍게도 세 가지 모두 해당하더군. 부인할 생각은 말게. 자네가 고용한 주방장과 선생들이 이미 증언을 끝마쳤으니.”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원장은 다급히 카멜리아 후작의 손에서 법안을 받아들고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법안에는 정말로 후작이 말한 그대로 적혀 있을 뿐 아니라 황제의 직인까지 찍혀 있었다. 의회를 통과한 것은 물론 황제의 승인까지 받았다는 말이었다.

“말도 안 돼…….”

법안을 들고 부들부들 떨던 원장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법안에 적힌 대로라면 원장 자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 감옥에서 3년을 살아야만 했다.

고개를 떨어트렸던 원장은 불현듯 무엇인가 떠오르자 고개를 치켜들었다.

카멜리아 후작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간신히 찾아낸 구명줄에 대한 희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법안이 오늘 통과되었다면 후작께선 저를 처벌하실 수 없으십니다. 법안이 공포된 이후부터 죄를 짓는 경우 해당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녀가 찾아낸 구명줄은 금방 끊어져 버렸다.

“제대로 읽지 않았군. 이 법안은 소급적용이 된다네.”

카멜리아 후작의 서늘한 말에 원장은 할 말을 잃었다. 소급적용이 된다는 것은 과거 저질렀던 일들도 모두 해당된다는 말이었다.

절망하고 있는 원장을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후작은 손을 들어 손뼉을 한번 쳤다.

“들어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도 근위대 복장을 입은 두 남자가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후작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원장을 눈짓하자 근위대 기사들은 원장의 양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제서야 원장은 몸부림치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이거 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 저런 버러지 같은 것들 일 좀 시키고 때리면 어때서!”

정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원장의 말에 카멜리아 후작의 눈빛이 차갑다 못해 냉랭하게 바뀌었다.

아직 어린아이들 앞에서 저 무슨 막말이란 말인가.

근위대 기사들에게 입을 막으라고 지시해야겠다고 생각한 후작이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어차피 세상이 버린 것들인…… 악!”

악에 바쳐 외치던 원장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엘리시아가 몸을 날려 머리로 원장의 배를 들이박은 것이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후작뿐 아니라 모두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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