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내 친구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 이 마귀 같은 아줌마야!”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씩씩거리는 엘리시아의 모습에 루리엔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했잖아?’
조금 전 엘리시아가 머리로 상대의 배를 들이박은 것은 하르가 알려준 방법이었다.
자신보다 크고 팔다리도 긴 상대와 싸우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엘리시아의 질문에 하르는 말했었다. 머리로 배를 들이박고 냅다 튀라고.
그런데 그걸 지금 써먹을 줄이야.
루리엔은 엘리시아의 바로 옆에 서 있는 하르를 쳐다보았다.
하르 역시 엘리시아가 자신이 알려준 방법을 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엘리시아답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루리엔이 웃음을 참고 있는 사이 정신을 차린 후작은 멍해있는 근위대 기사들을 보며 지시했다.
“끌고 나가.”
“예, 후작님.”
후작의 명을 받은 근위대 기사들은 원장을 양쪽에서 잡아끌고 작업실을 나갔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원장의 모습으로 보아 엘리시아의 머리에 명치라도 맞은 것 같았다.
원장이 사라지고 나자 후작은 작업실 안의 아이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엘리시아와 똑같은 아름다운 보랏빛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렴. 손에 든 건 내려놓고.”
후작의 말에 아이들은 머뭇거리다가 들고 있던 인형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셨다.
아이들이 전부 다 일어서자 후작은 보육원 선생들이 아이들의 주의를 끌 때처럼 손뼉을 크게 한번 치고는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나가서 놀려무나. 지금 너희가 해야 할 건 이런 일이 아니라 마음껏 노는 거란다.”
서로서로 눈치를 보던 아이들은 정말로 나가도 된다는 것을 깨닫자 환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작업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작업실에 남아 있는 것은 카멜리아 후작과 엘리시아, 루리엔과 하르 뿐이었다.
“머리는 괜찮니, 엘리?”
걱정스러운 후작의 말에 엘리시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두 손을 내린 채 헤헤 웃었다.
“이제 괜찮아요, 엄마. 하나도 안 아파요.”
“그렇게 세게 박았는데 괜찮을 리가 있니? 어디 좀 보자.”
혹시라도 엘리시아의 머리에 혹이 났을까 싶어 이리저리 살피던 후작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딸의 이마를 톡 때렸다.
“깜짝 놀랐잖아. 그런 위험한 행동은 어디서 배운 거니?”
순간 원인 제공자인 하르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루리엔은 움찔했다.
사실을 고백해야 하나 싶어 두 아이가 시선을 나누는 사이 엘리시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그냥요. 친구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게 너무 화나서 저도 모르게 그래버렸어요. 다음엔 안 그럴게요.”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때는 진짜 혼난다.”
“네, 그것보다 엄마, 저하고 약속하신 거 있잖아요. 빨리요.”
엘리의 재촉에 후작은 루리엔과 하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 아이를 보는 그녀의 입가에 자신의 딸을 볼 때와 똑같은 온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아이와 시선을 맞춘 후작은 법안이 적힌 두루마기를 보여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늦게 와서 미안하구나. 이걸 통과시키느라 시간이 좀 필요했단다. 그래야 너희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거든.”
“……혹시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거예요? 저희 보육원 상황이 어떤지.”
루리엔의 물음에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엘리의 부탁으로 하르를 찾으면서 알게 되었지. 솔직히 보고서를 받고서 많이 놀랐어. 이렇게 관리가 부실할 줄이야. 어른으로서 너희들을 이런 환경에서 지내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구나.”
자신들에게 사과하는 후작을 보며 루리엔은 엘리시아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엘리시아가 보육원에 계속 찾아왔던 것도,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던 것도 모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가 계속해서 보육원에 왔던 거군요. 법안이 통과되는 동안 원장선생님이 저희를 학대하지 못하게. 닷새 동안 오지 않았던 건 후작님께서 원장이 저희를 학대한 증거를 잡기 위해서였을 테고요.”
자신과 엘리시아가 짠 계획을 정확하게 짚어낸 루리엔을 보며 카멜리아 후작은 내심 놀랐다. 이것이 7살짜리가 보일 만한 통찰력이던가.
엘리시아가 입이 마르게 칭찬한 것이 과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루리엔을 쳐다보았다.
“그걸 알아차렸니? 루리엔은 엘리의 말처럼 무척이나 똑똑하구나. 네 말이 모두 맞단다.”
처음 받아보는 제대로 된 칭찬에 루리엔의 볼이 빨갛게 물들자 지켜보고 있던 엘리는 두 손을 허리에 대고 말했다.
“그것 보세요, 엄마. 루리엔 엄청 똑똑하다니까요. 하르는 엄청 용감하고.”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기쁜 얼굴로 으쓱대는 딸아이를 쳐다본 후작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다. 알았어. 보육원에 가지 못하는 닷새 동안 엘리도 굉장히 초조해했단다. 혹시라도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냐며 법안을 빨리 통과시키라고 어찌나 들볶던지. 여기 도착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달려가 버렸지.”
“아, 그래서…….”
가쁜 숨을 내쉬며 뛰어 들어왔던 엘리시아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이 뭉클해진 루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눈시울이 뜨뜻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이렇게 진심으로 자신들에 대해 걱정해 준 적이 있었던가.
하르 역시 마찬가지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하던 루리엔은 후작의 부름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루리엔 그리고 하르.”
“네?”
“예.”
루리엔과 하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긴장했다.
그런데 후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두 아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혹시 괜찮다면 너희 둘 다 우리 집에서 지낼 생각이 있는지 묻고 싶구나. 엘리가 혼자다 보니 외로움을 잘 타거든. 함께 지내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
“……!”
루리엔과 하르는 갑작스러운 후작의 제안에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두 아이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후작은 부드럽고 온화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엘리시아와 이야기도 나눠보고 천천히 생각해보렴. 나는 잠깐 나가서 이곳 정리를 해야겠구나.”
몸을 일으킨 카멜리아 후작은 손을 뻗어 두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는 몸을 돌려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얼떨떨한 채 멍하니 서 있던 루리엔과 하르는 엘리시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뒷짐을 진 엘리시아는 장난꾸러기 표정을 지은 채 코앞에서 두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
“너희들 나랑 약속했잖아. 계속해서 함께 하기로. 설마 잊어버린 것 아니지?”
설마 기억 못 하는 거냐며 눈을 가늘게 뜬 엘리시아는 뒷짐을 풀고 두 손을 루리엔과 하르에게 각각 내밀었다.
고사리같이 작고 하얀 손이었다. 더러움라고는 묻지 않은 순백의 깨끗한 손.
“자, 잡아.”
자신들의 앞에 놓인 작은 손을 보면서 루리엔은 엘리시아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우리 계속해서 함께 하자. 그래 줄 거지?]
들은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새겨두었던 말이었다. 믿고 있어서, 믿고 싶어서.
그런데 어떻게 저 아이의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있을까.
루리엔과 하르는 홀린 듯 손을 뻗어 자신들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둘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자신의 손을 잡자 엘리시아는 환하게 웃었다.
“내 손을 잡은 거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카멜리아의 이름을 걸고 약속해.”
정말로 기뻐 보이는 엘리시아를 보면서 루리엔은 생각했다.
이 손을 놓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아이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 ⚜ ⚜
‘그때 신에게 맹세했었지.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반드시 엘리와 함께 하겠다고.’
루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이 후작저로 옮겨 온 이후 엘리시아는 자신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켰다.
루리엔과 하르의 방을 자신의 방 옆으로 배정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카멜리아 후작부부 역시 그들을 엘리시아의 친구가 아닌 자신들의 아들딸처럼 대해 주었다. 칭찬받을 때도 그렇지만 혼날 때도 엘리시아와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
집, 그리고 가족.
루리엔은 후작저에 와서야 그 단어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르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카멜리아 후작이 그들을 불렀다. 그녀가 꺼낸 말은 그들로서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루리엔, 하르. 그동안 너희들이 우리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의 진짜 가족이 되어주지 않겠니? 엘리도 그걸 바라고 있단다.]
기뻤다.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말로 자신들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럼에도 루리엔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하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형식적인 절차가 없어도 그들은 이미 카멜리아 가문의 사람이었고 엘리시아의 가족이었으니까. 카멜리아 가의 호적에는 엘리시아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흐릿해졌던 루리엔의 눈동자가 천천히 제빛을 되찾았다.
그녀는 녹턴을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지금도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시간을 다시 돌려도 똑같은 선택을 할 만큼.”
어쩌면 그에게는 잔인한 말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루리엔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한때나마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 녹턴은 나직하게 웃었다. 상처받았다기보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루리엔 스펜서답네. 이러니 포기가 안 되지.”
“뭐?”
당혹감이 깃든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루리엔과 시선을 마주하며 녹턴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는 2년 전 묶여버린 매듭을 풀어낼 생각이었다.
그들이 헤어진 것은 서로의 문제라기보다는 서로가 있어야 할 장소의 문제였으니까.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 루리엔.’
기대와 희망이 깃든 녹턴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