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33)

55화

“…….”

두 장의 서류를 나란히 놓고 검토 중이던 엘리시아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하르와 루리엔이 작성한 헬리오스와 카멜리아 가문의 사업에 대한 보고서였다.

문제는 두 가지 모두 이전과 비교했을 때 성장세가 눈에 띄게 둔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베라무스를 이용한 라세트 공작의 감시가 좀 더 강화된 것 같았다.

‘이래서는 곤란한데.’

혀를 쯧 하고 찬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방법 없을까? 이대로라면 예상보다 더 걸리겠는데?”

그녀가 묻자 루리엔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곧바로 답해왔다.

“찾고는 있는데 우리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을 거 같아. 그렇다고 마땅히 끌어들일 외부 세력도 없고.”

“하아, 하여간 그 능구렁이 같은 라세트 공작이 문제야. 어제 의회에서도 베르텐 후작에게 이상한 걸 시키더…… 아, 맞다.”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리던 엘리시아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루리엔, 너 체빌 왕국에서 유벨로스 아카데미에 다녔었지?”

“그런데?”

“혹시 녹턴 시에드라는 사람 알아? 그 사람은 너 아는 거 같던데.”

순간 서류를 작성하던 루리엔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흔들림을 엘리시아는 놓치지 않았다.

‘뭐지 지금?’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놓쳤을 만큼 미세한 반응임에도 엘리시아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 반응을 보인 사람이 루리엔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는 루리엔 스펜서는 아는 사람 이름이 들렸다고 해서 쓰던 펜을 멈출 인간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뭔가 수상쩍은데.’

엘리시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려고 했을 때 루리엔이 담담하게 답해왔다.

“알아. 같은 아카데미 다녔어. 그런데 넌 녹턴을 어떻게 안 거야?”

“먼저 인사를 하던데? 견학 삼아 공작 각하를 따라왔다고 하더라. 키도 크고 잘생기고 인상도 좋더라고.”

“녹턴은 아카데미에서도 인기가 좋았었어. 공부도 잘했고.”

“많이 친했어?”

“조금.”

루리엔의 대답을 들은 엘리시아는 역시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말만 들어서는 별 관계가 아닌 것 같았지만 녹턴 쪽은 달랐다.

루리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였던 그의 눈빛과 표정은 조금 친했다고 보기에는 많이 무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적어도 녹턴이 루리엔을 좋아했던 건 확실해 보인단 말이지.’

평소 같으면 사생활이니까 하면서 별생각 없이 넘어갔을 것이다. 루리엔과 하르도 그녀에게 그렇게 해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은 마음에 걸렸다.

그녀 때문에 하르가 뭔가를 포기하고 제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어쩌면 루리엔도 그랬을 수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엘리가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그녀가 허락하자 집사가 은쟁반을 한 손에 받쳐 들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은쟁반 위에 놓인 편지를 확인한 엘리시아의 눈살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제국에서 황금빛 편지 봉투를 쓰는 곳은 오직 황실뿐이었다.

‘그런데 왜 편지가 두 개지?’

의아해하던 엘리시아는 집사가 쟁반을 내려놓고 나서야 두 개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나는 황제로부터 온 것이었고 또 하나는 더스틴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황제가 보낸 편지부터 확인한 그녀는 미간을 살짝 접었다.

[지난번 나와 한 약속 잊지 않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네. 한 시간 후 짐이 보낸 사람이 후작저를 방문할 거야.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라지.]

무척이나 이상한 편지였다.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사람은 황제가 아니라 그녀인데 편지 내용만 보면 마치 그녀가 황제에게 부탁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즐거운 시간이 되라니, 이게 무슨…….’

황당한 눈빛으로 황제의 서신을 내려다보던 엘리시아는 남아 있는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손대고 싶지 않지만 손대야만 하는 편지였다.

진짜 싫다는 표정으로 편지를 집어 들어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이번에는 팍삭 찌푸려졌다.

[한 시간 후 후작저를 방문할 예정이야. 그때 보도록 하지.]

정말이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편지였다. 상대의 일정 따위는 어찌 되든 알 바 없다는 것이 아닌가.

“하나는 이상하고 하나는 예의를 갖다 버렸고. 뭐 이따위야?”

짜증이 난 표정으로 엘리시아가 투덜거리자 루리엔이 물어왔다.

“어디서 온 편지기에?”

“하나는 폐하가 보내셨고 하나는 미친놈이.”

“뭐라는데?”

“폐하께서는 한 시간 후에 사람들을 보내시겠다고 하고 미친놈은 한 시간 후에 방문하겠다고 하네.”

엘리시아의 대답에 처음으로 펜을 쥔 루리엔의 손이 멈추었다.

고개를 든 친우의 얼굴에는 어이없다는 눈빛이 어려 있었다.

“둘 다 한 시간 후에? 서로 짜기라도 했대?”

“그러니 말이야. 아, 진짜. 미리 연락주면 큰일 나는 일이라도 있어? 황족이라고 지금 유세하는 것도 아니고.”

들고 있던 펜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엘리시아는 의자에 축 늘어졌다.

황제가 보낸다는 정체 모를 사람과 더스틴을 동시에 맞이할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밀려들었다.

하필이면 왜 오늘이란 말인가. 할 일도 잔뜩 쌓여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더스틴을 돌려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돌아가라고 하면 그 지랄 맞은 성격에 뭔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한숨을 푹 내쉰 엘리시아는 루리엔을 보며 물었다.

“아프다고 하면 안 되겠지?”

“그랬다가는 좋다구나 하며 병문안 핑계로 침실까지 들이닥칠걸? 2황자 성격 막무가내인 거 잘 알잖아.”

“망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엘리시아는 소름이 끼쳤다.

자신의 침실에 들이닥치는 더스틴이라니. 사귀었던 남자들조차 단 한 번도 들인 적이 없는데 그 무슨 끔찍한 소리란 말인가.

심지어 하르조차 그녀의 침실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급한 일이 있으면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만 그가 거부했다.

뭐라더라? 아무리 친우라도 사적인 공간에 함부로 들어가는 건 무례한 짓이라 했던가.

‘그러고 보니 각하가 처음이시네. 내 침실에 들어온 남자는.’

귀족파의 임시 회의를 하루 앞두고 엘리시아는 이케르에게 후작저로 방문해달라고 요청했었다.

은밀하게 만나는 것이라 마땅한 장소가 없어 그녀의 침실로 했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면 참 용감한 짓이었다.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남자를 침실로 초대하다니, 마치 유혹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날 밤의 기억이 문득 엘리시아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강렬한 금안과 귓불에 닿아오는 뜨거운 숨결, 후끈하게 달아오른 열기와 아랫배에 느껴지던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욕망까지.

[그러니 진심으로 빌리고 싶어질 때 말해주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몸속 깊숙이 울리던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를 기억해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히 떠올린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멍해 있던 엘리시아는 루리엔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도 다행이잖아. 곧 폐하께서 보낸 사람이 올 테니. 그 핑계를 대. 물론 2황자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어야겠지만 혹시 알아? 인내심 없는 그 인간이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돌아갈지.”

“하아, 그 거지 같은 성격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건가.”

엘리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을성 없는 더스틴이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베스트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부디 황제가 보낸 사람이 루리엔의 말처럼 2황자를 이겨 먹을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한 시간 후 더스틴이 도착했다는 말에 엘리시아는 집무실을 나왔다. 응접실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묵직한 쇠구슬이라도 단 것처럼 축축 늘어졌다.

그녀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중앙에 서 있는 더스틴이 보였다.

“엘리.”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애칭을 불러왔다.

매번 허락도 받지 않고 부르는 애칭에 절로 욕설이 치밀었지만 엘리시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방문하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같이 가야 할 곳이 있으니 외출 준비를 하고 나오게.”

뭐래, 이 미친놈이.

엘리시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더스틴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방문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보자마자 같이 외출해야 한다니 이 무슨 예의를 밥 말아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그녀는 다시 되물었다.

“지금 말입니까?”

“지금 바로. 장소는 가면서 알려주지.”

아우, 진짜 이 미친놈. 지금 바로는 무슨 지금 바로야. 게다가 가면서 알려준다는 건 뭔데.

엘리시아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욕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그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 갑자기 천운처럼 느껴졌다.

황제가 사람을 보낸다고 하지 않았다면 어딘지도 모르고 바로 끌려갈 뻔한 것이 아닌가.

‘폐하께 감사드려야 하나.’

귀찮다고 생각했던 일이 순식간에 호재로 바뀌는 것에 감탄하며 엘리시아는 일부러 난감한 표정을 얼굴에 떠올렸다.

“죄송합니다만, 전하. 지금은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곤란하다고?”

더스틴의 짙은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기분 나쁜 기색이 얼굴에 역력히 떠올랐다.

감히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거냐는 그의 표정에 엘리시아는 재빨리 변명을 덧붙였다.

“전하께서 연락을 주시기 전에 폐하의 시종이 찾아왔었습니다. 폐하께서 사람을 보냈다고 하시더군요. 그 사람이 곧 도착할 시간이라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더스틴의 미간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의아한 눈빛이 떠오른 것 같기도 했다.

“폐하께서? 누구를?”

“저도 모르겠습니다. 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을 주셨더라면 시간을 겹치지 않게 조절해 볼 수 있었을 텐데요.”

안타까운 척하면서 그녀는 갑자기 방문한 더스틴의 행동을 슬쩍 꼬집었다. 이렇게라도 짚고 넘어가야 그나마 짜증이 좀 풀릴 것 같았다.

다행히 ‘폐하’라는 두 글자가 가지는 힘이 세기는 센지 더스틴은 인상을 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슬쩍 쳐다보며 엘리시아는 빨리 돌아가라고 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다리지.”

“…예?”

원했던 것과 정반대의 대답에 엘리시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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