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정말 이러실 겁니까?”
“무엇을 말이냐?”
“제게 황태자 자리를 주기 싫으셔서 아직 어린 그 녀석을 내세우신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냔 말입니다!”
목에 시퍼런 핏대까지 세우며 더스틴이 따지자 황제는 손을 들어 느긋하게 턱수염을 쓸었다.
“짐은 황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엘리를 그 녀석의 파트너로 삼지 않으셨습니까?!”
결국 참지 못한 더스틴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황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 채 더스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짐이 그렇게 한 것이 황자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구나. 타인 앞에서 후작의 애칭을 부르는 것도 그렇고. 누가 들으면 황자가 카멜리아 후작의 연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그건……!”
“어제까지만 해도 솔로였던 후작이 오늘 갑자기 황자와 사귀기로 했을 것 같지도 않고. 황자가 후작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입장이 아닌 것 같다만.”
더스틴의 입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엘리시아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으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화를 참지 못하고 그는 시퍼런 시선으로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았다.
그런 아들을 내려다보며 황제는 다시금 쯧 하고 혀를 찼다.
“카멜리아 후작을 라시안의 파트너로 한 것은 그녀가 그 아이의 사격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처음 연회에 나서는 만큼 잘 보필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후작은 귀족파의 수장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귀족파건 황제파건 다 같은 제국의 신하이며 내 신하인 것을. 아무래도 황자는 귀족파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황제의 말에 더스틴은 움찔했다.
어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마지막 말속에 담긴 것은 분명한 경고였다. 함부로 나대지 말라는.
‘젠장.’
따지러 왔다가 본전도 못 찾자 더스틴은 이를 악물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으며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라 이성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결국 고개를 든 그는 황제를 똑바로 노려보며 속마음을 입에 담고 말았다.
“……제 어디가 그렇게 못마땅하십니까?”
“지금 뭐라 했느냐?”
“저도 폐하의 자식입니다! 황태자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저만 인정을 안 해주시는 겁니까!”
솔직히 더스틴은 억울하고 분했다.
황비의 배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자신 역시 황제의 아들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자신은 황태자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인가.
속에 있던 말을 다 쏟아낸 더스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황제를 노려보았다.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오기가 그의 눈빛에 번득였다.
아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황자도 내 자식이니 인정해 줄 수도 있지.”
더스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무슨 속셈인가 싶어 의심 어린 눈빛으로 그가 황제를 쳐다보았을 때였다.
서늘함을 담은 묵직한 목소리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네 외가인 라세트 공작가를 버리겠다면 말이다.”
“……!”
“그럴 수 있겠느냐.”
더스틴은 대답하지 못했다. 황비와 라세트 공작, 그리고 라세트 공작가가 없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지며 막막함이 밀려든 것이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황태자란 스스로가 빛나야 하는 존재지. 그런데 황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 빛난 적이 없다. 황비와 라세트 공작이 그간 널 빛내준 것뿐. 그런 황자가 황위에 올랐을 때 이 제국이 누구의 것이 될 거라 생각하느냐.”
“…….”
더스틴은 손등에 시퍼런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반발심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황제의 말을 조금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라세트 공작가의 힘을 빌리면 뭐가 어떻단 말인가.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쓰지 않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어디 있다고.
결국 황위에 오르는 자가 승자가 아니던가.
‘줄 생각이 없다면 직접 가져올 수밖에.’
엘리시아든 황위든 그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빼앗길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고개를 숙인 더스틴의 한쪽 입매가 비틀리며 푸른 눈에 집념이 깃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하는 것을 가지고 말겠다는 광기 어린 집념이었다.
⚜ ⚜ ⚜
더스틴이 나가고 난 후 닫힌 문을 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씁쓸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짐은 자식 농사에 자질이 없는 모양이야. 하나는 지키지 못했고 하나는 망가지는 걸 지켜봐야만 했으니. 그렇지 않나?”
황제의 말이 끝나자 옥좌 왼쪽 옆에 있던 기둥 뒤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 아래 고요한 금빛 눈동자가 무심하게 빛났다.
조금 전까지 더스틴이 있던 자리에 선 이케르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이 망가졌습니다.”
“짐도 알고 있네. 그래도 가끔은 후회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군. 강제로라도 더스틴을 그들의 손에서 데려왔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아버지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저라도 데리고 오는 것을 포기했을 겁니다. 그리고 폐하께는 아직 라시안 전하가 남아 있으니 낙심은 이르십니다.”
이케르의 대답에 황제는 의외라는 눈빛을 떠올렸다. 허허하고 나직하게 웃은 황제는 손을 들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위로해 주는 건가? 무심한 자네답지 않군. 사람이 변했어. 역시 이래서 사내는 연애를 해야 한다니까.”
황제의 마지막 목소리는 어느새 짓궂음을 띄고 있었다.
“아직 연애는 아닙니다만.”
“하긴 자네의 외사랑이라 하는 게 맞겠군. 카멜리아 후작이 넘어오지 않았으니. 그래도 진도는 좀 나갔겠지? 손은 잡았나? 키스는? 설마 또다시 밤부터 보낸 건 아니겠지.”
자신의 아버지라 해도 묻지 않을 무척이나 사적이고 소소한 질문들에 이케르의 미간이 절로 접혔다.
‘또 시작이시군.’
황제의 성격을 알면서도 엘리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었다.
그 이후로 계속 이런 패턴이었다. 놀릴 거리라도 잡았다는 것처럼.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경우 단칼에 끊어버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더 이상 아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퇴궁해도 되겠습니까?”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확고한 의사 표현에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것 좀 물었다고 퇴궁 하겠다고 협박하다니 너무하는군. 그래도 짐은 자네를 생각해 카멜리아 후작에게 의상 디자이너만 보냈건만 이러긴가? 만약 짐이 케트만을 같이 보냈다면 자네가 주문 넣은 것은 어쩌려고.”
황제의 말에 이케르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케트만은 제국에서 최고의 실력을 지닌 보석 장인이었다.
오로지 주문만을 받아 장신구를 만드는데 그가 만들어내는 것들은 하나같이 예술작품이라 칭송받을 정도였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천천히 물었다.
“제가 주문 넣은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짐도 알고 싶었던 건 아니라네. 카멜리아 후작에게 보상도 해줄 겸 보석이라도 선물할까 하고 케트만을 불렀지. 그랬더니 이미 자네에게 주문받은 것이 있어 곤란하다고 하던데.”
“…….”
“탄신연회 전까지는 꼭 완성해야 한다고 했다면서. 그럼 누구에게 선물하려는 건지는 뻔하지.”
역시 다른 장인에게 주문했어야 했었나 하는 후회가 잠깐 들었지만 이케르는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엘리시아에게는 최고가 어울렸고, 그 최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인은 케트만 뿐이었다. 그러니 황제의 놀림쯤은 감수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그 사이 황제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네가 카멜리아 후작을 위해 애써 준비한 선물을 짐이 가로챌 수야 없지 않나. 그래도 혹시 몰라 내가 주문한 것으로 하라고 했네. 그래야 후작이 장신구를 착용하더라도 트집 잡는 자들이 없을 테니.”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 같은 황제의 말에 이케르는 내심 감탄했다. 그가 주문을 넣으면서 우려했던 것을 황제가 짚어낸 것이다.
케트만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놓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라세트 공작이나 2황자와 같이 권세 높은 자들이 압박한다면 케트만이 비밀을 지키고 싶다고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좋은 말로 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엘리시아는 또다시 곤란한 상황에 처할 터였다.
그런데 황제 덕분에 이제 그런 걱정이 사라진 것이다.
‘덕분에 마음 놓고 줄 수 있게 되었군. 이번에는 감사를 드려야겠어.’
예상치 못했던 황제의 배려에 이케르가 인사를 하려 했을 때였다. 능글맞은 황제의 말이 그의 귀에 울렸다.
“그러니 짐의 배려에 감사해주지 않겠나. 나름 신경을 많이 썼다네.”
대놓고 감사하라는 황제의 말에 이케르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기대하던 젊은 공작의 인사에 슬그머니 올라가던 황제의 입꼬리는 곧바로 이어진 말에 그대로 멈추었다.
“폐하의 배려 덕분에 이만 퇴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정을 맞추려면 오늘까지는 케트만에게 보석 색을 알려줘야 해서 말입니다.”
자신의 말을 빌미 삼아 곧바로 이케르가 퇴궁을 청하자 황제는 어이없다는 눈빛을 떠올렸다. 원하던 감사를 받기는 받았는데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하여간 놀릴 틈을 안 주는군. 알았네. 그만 가보게나. 짐은 혼자 쓸쓸하게 고독을 씹고 있을 테니.”
황제가 혀를 쯧쯧 차며 타박하듯 말하자 이케르는 덤덤하게 답했다.
“그러실 줄 알고 집무실에 결재가 필요한 서류들을 가져다 두었습니다. 오늘 하루는 고독이 폐하를 찾아들지 않을 겁니다.”
“……그냥 고독을 씹으면 안 되겠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보게. 이케르-”
황제가 다급히 불렀지만 이케르는 들리지 않는 듯 몸을 돌렸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홀을 빠져나가는 젊은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황제는 곧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거참, 정말 제 아비와 똑 닮았단 말이지. 어리면 다루기 쉬울까 싶어 승계를 허락했더니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아. 그래도 카멜론은 짐과 놀아주기라도 했는데 말이야.”
카멜론은 이케르의 아버지이자 전대 데이모스 공작이며 황제의 절친한 친우이기도 했다.
[이제 후계자가 장성했으니 저도 제 아내와 함께 느긋하게 쉬면서 시간을 보내볼까 합니다. 부러우시면 폐하께서도 빨리 황위를 양위하시고 황후 마마와 함께 내려오십시오.]
이케르에게 공작위를 승계하겠다며 카멜론이 황제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솔직히 황제도 그가 부러웠었다.
“별수 없나. 이번 도박을 성공시킬 수밖에. 그렇더라도 내려놓으려면 몇 년간은 더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언젠가 나도 카멜론처럼 여유작작하게 보내고 싶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황제는 옥좌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케르가 고독을 즐기지 말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일을 즐겨야 할 시간이었다.
집무실로 향하는 황제의 발걸음은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느릿했다.
⚜ ⚜ ⚜
황궁에서 돌아온 이케르는 집사에게 외투만 건넨 채 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녹턴이 일어서며 그를 반겼다.
“황궁에서의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각하.”
“덕분에. 마담 카렌으로부터 연락은 왔나?”
새 고용인의 물음에 녹턴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