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예. 오픈 숄더 스타일의 드레스이며, 붉은색을 사용할 거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케트만에게 전달해 두었습니다.”
“그렇군. 고맙네.”
집무실 책상으로 가서 앉은 이케르는 녹턴이 전달한 드레스 정보를 조용히 입속으로 되뇌었다.
오픈 숄더 스타일의 드레스, 붉은색.
‘엘리에게 잘 어울리겠군.’
아무래도 마담 카렌은 엘리시아를 그날 가장 화려하게 보이도록 꾸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렬한 사람에게 강렬한 색이라니.
탄신연회에서 가장 돋보일 엘리시아를 상상하며 느슨하게 풀어졌던 그의 입매는, 황제에게 따지러 왔던 더스틴을 떠올리자 그대로 비틀렸다.
라세트 공작의 권세만 믿고 엘리라 제멋대로 애칭을 불러대는 황자의 꼴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탄신연회에서 엘리시아를 파트너로 삼으려 했던 이유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녀의 화려함을 이용해 라시안에게 갈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그녀와 특별한 관계라는 걸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케르와 황제는 엘리시아가 라시안의 사격 스승이라는 것과 황제가 만들어 둔 빚을 이용해 그녀가 라시안의 파트너 자리를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성공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더스틴이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손에 넣으려 할 테니까.
‘오늘 단단히 자존심이 상했으니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겠지. 라세트 공작이 베라무스를 움직일 수도 있겠어. 헬리오스 리더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서둘러야겠군.’
돈만 되면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베라무스와 달리 헬리오스는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빨리 성장한 것을 보면 리더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였다.
이케르는 헬리오스의 리더를 만날 생각이었다.
수사국의 힘만으로 베라무스를 묶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베라무스의 적대 세력인 헬리오스와 공조한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필요하다면 손을 잡아야겠지. 엘리시아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만 있다면.’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시선이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녹턴에게로 향했다.
전 보좌관이 집안 사정으로 인해 퇴직하면서 그는 새로운 보좌관을 고용해야 했다.
그의 부탁을 받은 전 보좌관은 떠나기 전 그에게 자신을 대신할 만한 유능한 인재들의 추천 리스트를 제출했다.
그중에는 바로 고용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고 스카웃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녹턴은 후자였다.
처음에 이케르는 녹턴을 후보에서 제외하려고 했었다.
다른 후보자보다 뛰어난 이력은 그의 눈길을 끌었지만 녹턴이 타국인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언어적인 문제도 그렇고 입국 절차도 그렇고 여러 가지 부분에서 손이 많이 갈 터였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데리고 와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하던 그가 마음을 바꾼 것은 녹턴의 정보에서 본 하나의 이름 때문이었다.
스파이가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사람을 고용할 때 항상 사생활까지 상세하게 조사한 정보를 함께 확인하곤 했다.
그런데 그 정보지에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이 하나 적혀 있었다.
[아카데미부터 2년간 사귄 여자가 있었음. 루리엔 스펜서. 제국 출신. 여자가 제국으로 돌아가면서 헤어진 것으로 확인됨.]
그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그 이름은 엘리시아의 보좌관 이름이었다. 그리고 엘리시아의 보좌관이 유벨로스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같은 사람임을 확신했다.
이케르는 그날 바로 녹턴을 만나러 체빌 왕국으로 향했다.
제국의 수도에 설치된 마법 포탈을 사용하면 체빌 왕국의 수도로 바로 갈 수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직접 만난 녹턴은 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줄 알았으며 제국으로 가기를 강하게 희망하고 있었다.
그가 이유를 물었더니 녹턴은 이렇게 답했다.
[되찾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가 떠날 수 없다면 제가 가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마주한 상대의 굳건한 의지가 이케르는 마음에 들었다. 사랑에 빠진 사내로서 그 마음이 이해도 갔고.
그래서 그날 이케르는 답지 않게 약간의 사심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녹턴의 고용을 결정했다.
그 결정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녹턴은 보좌관으로서도 무척이나 유능한 사내였으니까.
‘우리 둘 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면 좋겠군.’
녹턴에게서 시선을 돌려 서류로 향하는 이케르의 입가에는 희미하지만 부드러운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 ⚜ ⚜
라시안의 탄신연회가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의 황실 연회에 들떠 있는 귀족들과 달리 라시안의 파트너로 당첨된 엘리시아의 얼굴은 우울함 그 자체였다.
“내일 갑자기 죽을 만큼 아프다거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소파에 축 늘어진 채 엘리시아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대화를 하고 있던 하르와 루리엔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
“그럴 리는 없으니 그만 포기하고 일어나.”
곧바로 돌아온 두 친구의 매정한 대답에 엘리시아는 입을 삐죽이며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꼬리고 입매고 우울을 담고 축 처져 있는 것을 흘깃 본 루리엔은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던졌다.
“가봉 된 드레스 보니까 화려하고 멋지던데? 디자인도 독특하고. 마담 카렌의 역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더라.”
하지만 엘리시아에게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 화려하고 멋지지. 너무 화려하고 멋져서 문제지. 아니, 마담 카렌은 왜 이럴 때 역작을 만들어내고 그러냐고. 너무 눈에 띄잖아.”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엘리시아가 음울하게 중얼거리자 하르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루리엔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기 전 충고를 잊지 않았다.
“어차피 참석해야 하는 연회잖아. 그냥 즐겨.”
“즐길 수 있어야 즐기지. 살얼음판 같을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즐길 수 있겠어?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차가운 얼음물 속으로 바로 끌려 들어갈 판인데.”
“그럼 즐기는 척이라도 해. 가면 잘할 거면서 엄살은.”
“엄살 아니거든! 아, 진짜 내 몸은 왜 이렇게 튼튼한…….”
“주인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애처럼 투정부리던 엘리시아는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재빨리 고개를 들고 자세를 바꾸었다.
“들어와.”
언제 투정 부렸냐는 듯 무게를 잡고 있는 엘리시아를 보며 루리엔과 하르는 피식 웃었다.
잠시 후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흰 장갑을 낀 그의 손에는 편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건 뭐지?”
엘리시아가 묻자 집사는 그녀에게 다가와 들고 있던 편지 봉투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한 소년이 찾아와 전해주고 갔습니다. 주인님께 꼭 전달되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봉투의 밀랍 인장을 보시면 발신인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것도 전해달라 하였습니다.”
“밀랍 인장을 보라고?”
편지 봉투를 받아 뒤집어 밀랍 인장을 확인한 엘리시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잠시 인장을 주시하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집사를 쳐다보았다.
“가져다줘서 고마워.”
“예,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집사가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엘리시아는 두 손을 들어 봉투의 인장을 깨트렸다.
봉투를 열고 속에서 서신을 꺼낸 그녀는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묘했던 엘리시아의 표정이 곧 놀란 표정으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리고 루리엔은 그런 친우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어디서 온 건데?”
의아한 마음에 그녀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멍하니 서신만 내려다보고 있는 엘리시아의 모습에 루리엔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하르 역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 엘리시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
루리엔이 다시 한번 부르자 그제야 엘리시아는 흠칫 놀라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어디서 온 거냐고.”
“아, 각하께서 보내신 건데…….”
“데이모스 공작 각하?”
“응.”
“그런데?”
“그게…….”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문 엘리시아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당혹감을 띠고 또그르르 굴렀다.
뭔데 그러나 싶어 루리엔과 하르가 쳐다보고 있자 망설이던 엘리시아는 서신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잠깐 만나고 싶대. 전해줄 것이 있다고. 이쪽으로 오시겠다는데.”
“뭐?”
루리엔과 하르의 얼굴에도 똑같이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이리 줘봐. 그 서신.”
“여기.”
엘리시아에게서 서신을 받아든 루리엔은 빠르면서도 꼼꼼하게 내용을 읽어 내렸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 서신에 적혀있는 말대로라면, 그리고 오늘이 연회의 전날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케르의 방문 목적을 눈치챈 루리엔은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데이모스 공작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낭만적인 남자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식으로 방문할 리가.
루리엔이 고개를 들자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시아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곧바로 물어왔다.
“각하의 방문 이유, 뭔지 알겠어?”
어떻게 할까 아주 잠깐 고민하던 루리엔은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각하께서 준비한 성의가 있는데 초를 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녀는 엘리시아에게 서신을 돌려주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모르겠네. 내가 각하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직접 만나봐.”
“아, 진짜. 갑자기 이러시면 어쩌라고. 침실도 엉망일 텐데. 마리!”
벌떡 일어선 엘리시아는 서신을 움켜쥔 채 전속 시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서두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루리엔은 피식 웃었다.
방문하는 것이 싫으면 오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저렇게 구는 걸 보면 데이모스 공작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벌써 넘어갔는지도 모르고.’
친우의 연애가 잘 되기를 바라며 루리엔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 ⚜ ⚜
“무슨 일로 오신다는 거지? 루리엔이 괜찮다고 했으니 일단 만나기는 하겠지만.”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엘리시아는 열린 창문을 흘깃 쳐다보았다.
지난번과 동일한 방법으로 방문하겠다고 서신에 쓰여 있어서 열어둔 것이었다.
“날짜로 봐서는 내일 연회와 관련 있는 건가?”
오늘이 연회 전날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자신이 평소와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기분도 살짝 들뜬 것 같았고 심장도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마치 이케르의 방문을 기대라도 하는 것처럼.
‘미쳤나 봐, 기대는 무슨.’
당황한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머리를 침대에 박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마가 닿은 곳은 서늘한 침대가 아니라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바닥이었다.
놀라 급하게 고개를 들자 이케르의 조각 같은 얼굴이 그녀의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부드럽게 휘어져 온화하게 빛나는 금안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