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도망갈 방법은 없겠지.’
닫혀 있는 문을 올려다보며 엘리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녀들에게 대충 치장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린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완벽하게 꾸며놓을 수가.
하긴 마담 카렌의 드레스와 이케르가 선물해준 장신구를 본 시녀들의 눈빛이 비정상적으로 빛날 때부터 불안하긴 했었다.
‘심해로 가라앉게 해달라니까 하늘 위에서 날아다니게 생겼네.’
우울해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라시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많이 떨리네요. 후작께서도 처음 사교계에 나갔을 때 떨리셨습니까?”
금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겨 올린 라시안은 그녀의 드레스 색과 맞춘 붉은 색 포인트가 들어간 새하얀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긴장이 깃든 황자의 은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과거 자신의 모습과 마주한 느낌이 들어 엘리시아는 살짝 웃었다.
“물론입니다. 더구나 이렇게 화려하게 등장하면 떨리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후작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진심 어린 라시안의 부탁에 엘리시아는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의 코가 석 자라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황자를 도와주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
“가능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제가 도와드릴 수 없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입장하시고 나면 되도록 각하 옆에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황비마마와 라세트 공작이 관련되면 후작이 나서기 힘들 거라고 아바마마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 경우 스승님께 맡기라고 하더군요.”
“폐하의 말씀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전하는 분명 잘 해내실 겁니다.”
생긋 웃으며 엘리시아가 격려하자 라시안의 두 눈에 기쁨이 깃들며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
아직까지 앳됨이 남아 있어서인지 귀엽다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때 황자가 다시 물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후작의 목걸이와 귀걸이가 스승님이 선물하신 겁니까?”
“그걸 전하께서 어떻게…….”
놀란 그녀를 보며 라시안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바마마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드레스와 함께 보석도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스승님이 선수를 치셨다고 말입니다. 대신 아바마마께서 선물하신 것으로 하셨다면서요.”
“그러셨군요.”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어젯밤 이케르와 함께했던 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의 멱살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계속 달아올라 있던 무엇인가가 터져 나온 것 같았다. 그건 그녀뿐 아니라 이케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더없이 야한 열기 속에서 번개를 맞은 것처럼 찌릿찌릿함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작 키스일 뿐인데도 전신의 감각이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었다.
그대로 침대로 직행한다고 해도 아무런 불만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듯 점잖게 물러섰다. 더 이상 하면 참지 못할 것 같다고 하면서.
‘그리고서는 떠나기 전에 말해주셨지. 이 목걸이와 귀걸이를 폐하께서 선물하신 것으로 하기로 했다고. 그래야 뒷말이 없을 거라며.’
그는 올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질척거리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엘리시아지만 너무 담백한 것도 싫어질 것 같다고 생각될 만큼 깔끔한 퇴장이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엘리시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그녀가 몸을 돌리자 황후와 함께 걸어오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금빛 수가 화려하게 수놓아진 흰 정복을 입은 황제는 위엄이 넘쳤고, 기품이 흐르는 은은한 금빛 드레스를 입은 황후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라시안이 황후를 정말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태양과 달을…….”
하지만 그녀의 인사는 중간에 멈췄다. 황제가 손을 들어 막은 것이다.
“인사는 됐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모습을 빠르게 확인한 황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마담 카렌이 일을 제대로 했군. 어떻소, 황후?”
황제가 묻자 황후는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멜리아 후작의 미모에는 항상 감탄을 하지만 오늘은 특히나 눈을 떼지 못하겠군요. 화려한데도 과하지 않고 너무 예쁩니다, 후작.”
“감사합니다, 황후마마. 마마께서도 오늘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칭찬을 듣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귀 끝을 살짝 붉힌 엘리시아가 인사를 하자 황후는 라시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우리 황자의 파트너가 후작이라 다행입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니 사격을 가르칠 때처럼 잘 이끌어주세요.”
황자에 이어 황후까지 부탁을 해오자 엘리시아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못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가장 무난한 말을 입에 담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엘리시아의 표정이 무거워 보였던 것일까, 피식 웃은 황제는 턱수염을 쓸며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네, 후작. 짐도 있고 이케르도 있으니.”
정말이지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사이 황제는 시종장에게 문을 열라고 눈짓했다.
시종들이 홀로 통하는 문을 열기 시작하자 라시안이 에스코트를 위해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왔다.
긴장했다는 말과 달리 황자의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대견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손을 올린 엘리시아는 카네미스 홀로 통하는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설렘과 기대로 가슴이 떨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가슴이 떨리는 건 처음이었다.
‘꼭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네.’
문이 완전히 열리고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외침을 들으며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부디 멀쩡하게 귀환했으면 좋겠다고.
⚜ ⚜ ⚜
‘나쁘지는 않군.’
노버트 후작 영애의 손을 잡고 입장하면서 귀족들의 반응을 살핀 더스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감탄 어린 눈빛으로 그와 노버트 후작 영애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시안에게 엘리시아를 빼앗긴 것에 대해 그가 분노하자 황비는 곧바로 노버트 후작 영애를 그의 파트너로 추천했다.
[요즘 사교계의 꽃으로 떠오르고 있는 영애지요. 카멜리아 후작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 누르기는 어렵겠지만 나이가 어리고 정반대 매력을 지니고 있으니 비등하게는 보일 겁니다. 무엇보다 노버트 후작가가 황자를 지지한다는 것을 귀족들에게 인지시킬 기회가 되겠지요.]
제국 최고 규모의 상단은 데이모스 공작가가 소유한 아덴 상단이었다. 그다음으로 규모가 큰 상단이 델머드 상단으로, 노버트 후작가가 주인이었다.
그렇기에 라세트 공작은 노버트 후작가를 그들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상권 측면에서 데이모스 공작가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상황에서 노버트 후작 영애를 파트너로 추천한다는 것은 이야기가 잘 끝났다는 말이기도 했다.
엘리시아 외에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지만 파트너가 필요한 데다 이모저모로 이점이 많다고 생각한 더스틴은 황비의 제안을 수락했다.
노버트 후작 영애가 엘리시아와 비등하게만 보여도 라시안에게 향할 관심을 어느 정도는 꺾을 수 있을 테니까.
연회 당일 실제로 만난 노버트 후작 영애는 소문대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엘리시아가 화려한 장미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그녀는 백합 같은 청순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외모에 황비가 공을 들여놓았으니 홀 안의 귀족들이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정도면 그 녀석에게 밀리지는 않겠어. 어차피 엘리와 키도 비슷할 테고.’
열다섯 살짜리가 커봤자 얼마나 컸겠는가.
황후를 닮아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해도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녀석이 이미 한껏 피어난 엘리시아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엘리의 화려함에 묻혀버릴지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쪽 입매를 비틀던 더스틴은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궁금했다. 자신의 이복동생과 엘리시아가 어떤 모습일지.
하지만 황제와 황후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라시안과 엘리시아를 보는 순간 더스틴의 입가에 어려 있던 옅은 미소는 씻은 듯 사라졌다.
‘비등하다고? 누가 누구와?’
더스틴은 매섭게 눈매를 치켜 올린 채 이를 악물었다.
그의 두 눈에 박힌 엘리시아의 모습은 지금까지 연회에서의 봐 왔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꾸민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반올림해 늘어트리고 어깨를 드러낸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화려한 아름다움이었다.
걸을 때마다 목과 귀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로즈 다이아몬드 역시 그녀의 미모를 한껏 살려주고 있었다.
잔뜩 불편해진 더스틴의 심기는 이복동생을 확인하면서 완전히 뒤틀렸다.
붉은색 포인트가 들어간 새하얀 연미복을 입은 라시안은 마지막으로 본 이후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다.
키도 엘리시아보다 컸고 체격 역시 호리호리하면서도 탄탄한 것이 소년이 아닌 남자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엘리시아의 옆에서도 전혀 묻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리어 은은하고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 그녀의 화려한 아름다움과 어우러져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홀 안의 귀족 모두가 넋을 잃고 엘리시아와 라시안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봐도 오늘의 승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으득하고 이가는 소리와 함께 더스틴이 주먹을 쥐었다. 손등 위로 시퍼런 힘줄이 툭툭 튀어 오를 만큼 힘을 주었을 때 황비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진정하세요, 황자. 폐하께서 확실히 카멜리아 후작에게 공을 들이셨군요. 그렇다고 해서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내가 가져야 할 것을 저 자식이 모두 가져갔는데.”
엘리시아도 귀족들의 관심도 모두 빼앗긴 더스틴으로서는 울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그가 으르렁대며 사납게 말하자 황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의 팔을 잡았다.
“기다리세요. 조금만 지나면 모두 돌아오게 될 겁니다. 카멜리아 후작도, 저들의 관심도.”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마지막 말을 소리없이 중얼거리는 황비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