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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133)

62화

‘이래서 심해로 가라앉게 해달라고 말했는데.’

따갑다 못해 아플 정도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 엘리시아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홀 안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그녀와 라시안에게 쏠린 것 같았다.

‘그래도 전하께는 다행이네. 폐하께서 노리는 대로 화려한 등장이 되었으니. 물론 심기가 불편한 인간도 있는 것 같지만.’

엘리시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경외와 감탄 어린 시선들 사이로 날아드는 살벌한 시선은 쳐다보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 뻔했다.

‘루리엔이랑 하르는 어디에 있지?’

황제가 라시안을 귀족들에게 소개하는 동안 그녀는 친우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홀 안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만큼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도 구분이 가능했으니.

‘저기 있구나.’

루리엔과 하르와 눈이 마주친 엘리시아는 그나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좀 이따 보자고 친우들과 눈인사를 나누던 그녀는 갑자기 날아든 강렬한 시선에 이끌리듯 고개를 돌렸다.

누군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케르와 눈빛이 마주치자 엘리시아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어젯밤 그와 했던 키스가 떠오른 것이다. 입안의 모든 감촉을 음미하려는 듯 샅샅이 훑으며 탐하던, 숨 막힐 정도로 뜨겁고 깊은…….

나름대로 그쪽으로는 경험치가 높다 생각했는데 왜 이리 머쓱하고 부끄러운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어트린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녀의 두 눈에 들어온 부드럽게 휘어진 그의 매력적인 입술이 소리 없는 메시지를 전해온 것이다.

[오늘 정말 예쁘군.]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질리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그의 입을 통해 나왔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고 볼이 화끈해졌다.

엘리시아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계속해서 마주하고 있다가는 온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지도 모른다는 경각심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이케르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가 어떤 모습인지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행히 이케르의 시선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옆의 귀족에게 향해 있었다.

덕분에 엘리시아는 그를 여유롭게 살필 수 있었다.

황금빛 실로 수놓아진 검은 연미복이 그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수려하게 빛나 보였다.

‘오늘 연회에도 파트너를 데려오지 않은 건가?’

그가 혼자라는 걸 확인하자 엘리시아의 가슴에 안도감과 함께 묘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계속해서 흘깃거리며 살피던 그녀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이케르의 크라바트의 색이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 색과 똑같았다. 마치 맞춘 것처럼.

‘응?’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던 엘리시아는 이케르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해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몰래 쳐다보다 들켰다는 사실보다 그가 매고 있는 크라바트에 더 신경이 쏠렸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 그의 행적을 돌이켜 본 엘리시아는 이케르가 그녀의 드레스 색을 미리 확인했다는 쪽에 좀 더 비중을 두었다. 아니 좀 많이.

그에게 선물로 받은 로즈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 역시 드레스에 맞춘 듯 어울리는 색이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자 엘리시아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했던 기분이 그나마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살랑이는 기분에 취해 엘리시아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던 또 한 남자의 눈빛이 의심을 품고 가늘어졌다는 것을.

⚜ ⚜ ⚜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라시안의 인사말을 한쪽 귀로 흘리며 더스틴은 계속해서 엘리시아만을 노려보았다.

저렇게 예쁜 모습으로 자신이 아닌 이복동생의 옆에 서 있다는 것이 짜증스럽고 못마땅하기만 했다.

계속해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잠깐이지만 엘리시아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머무르는 걸 놓치지 않은 것이다.

상대를 확인한 더스틴의 푸른 눈동자에 사나운 열기가 치솟았다.

‘데이모스 공작? 설마 저 녀석과 몰래 만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마탑의 차기 후계자까지 등장해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증언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그 의심은 라세트 공작에게 부탁해 엘리시아의 주변에 사람을 붙이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녀가 누구를 만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받아 본 보고서에 데이모스 공작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더럽고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걸까.

‘어쩌면 저 크라바트 때문인지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데이모스 공작이 착용한 크라바트의 색이 엘리시아의 드레스 색과 똑같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었다면 우연일 거라 생각하고 넘어가겠지만 의심에 젖어있는 사내에게는 의미를 두기 충분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엘리시아를 붙들고 데이모스 공작의 크라바트와 네 드레스 색이 왜 같은 거냐고 다그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던 더스틴은 황비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카멜리아 후작이 내 예상보다 더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곧 이 무대에서 사라지게 될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제 곧 3황자의 말이 끝나고 폐하가 연회의 시작을 알릴 겁니다. 그럼 카멜리아 후작은 첫 춤의 관습대로 3황자와 세 번의 춤을 추겠지요.”

세 번의 춤. 잊고 있었던 사실을 일깨워 준 황비의 말에 더스틴의 눈빛에는 짜증이 깊게 배어들었다.

엘리시아가 라시안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의 춤을 추는 걸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니.

하지만 이어진 황비의 말에 그는 짜증 내던 것도 잊고 그대로 굳어졌다.

“연달아 추는 세 번의 춤은 생각보다 몸을 지치게 한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음식을 잘못 먹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엘리에게 약을 쓰겠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후작은 실수로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먹게 될 뿐이랍니다.”

“……헤리스 말씀이군요.”

황비의 말뜻을 알아들은 더스틴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엘리시아가 헤리스에 부작용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지난번 귀족파의 임시 회의로 인해 참석했던 모든 귀족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카멜리아 후작이 헤리스에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아는 귀족은 많지요. 평소 그녀에게 불만이 있었던 누군가가 그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준비한 것이 될 겁니다.”

“그 이후로 엘리가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 먹이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다는 것을 엘리시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아무 음료에나 손을 댈 리가 만무했다.

그의 말에 황비는 소리 없이 웃었다.

“걱정 말아요, 황자. 내가 직접 먹일 테니까.”

“어머님께서 말입니까? 그랬다가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까? 내 아버지가 그녀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요.”

황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후작은 알면서도 헤리스가 들어간 음료를 마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기더라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지요.”

“…….”

더스틴이 생각에 잠겨 있자 황비는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잡았다.

“황자는 후작이 사라지면 노버트 후작 영애와 함께 귀족들의 관심을 돌릴 준비나 하세요. 파트너를 잃어버린 3황자는 황자의 적수가 되지 못할 테니까요.”

연회의 첫 춤을 추기 위해 홀로 나가는 엘리시아와 라시안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 ⚜ ⚜

‘세 곡을 연달아 춰본 건 정말 오랜만이네.’

연회의 첫 춤을 무사히 마치고 라시안과 함께 홀에서 내려온 엘리시아는 살짝 가빠진 숨을 조용히 골랐다.

열심히 연습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황자는 그녀의 리드에 무리 없이 따라왔다.

처음에는 긴장한 듯 살짝 뻣뻣하게 움직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유연해졌고 마지막 곡에서는 그녀를 리드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놀랄 만큼 빠른 적응력이었다.

덕분에 실수 하나 없이 주어진 임무를 잘 마무리할 수 있어 엘리시아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라시안이 춤을 마치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이케르가 황제파 귀족들을 이끌고 다가온 것이다. 그에 질세라 그녀를 따르는 귀족들 역시 몰려들었다.

그로 인해 엘리시아는 라시안을 가운데 두고 이케르와 나란히 선 채 귀족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황제파와 귀족파의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색적인 풍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상황의 최고의 수혜자는 라시안이었다. 이케르와 엘리시아의 가운데 선 황자는 양쪽 파의 귀족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귀족파라 해도 엘리시아를 따르는 귀족들이었기에 라시안에게 반감을 가지거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어느새 귀족들 사이에 녹아들어 있는 라시안을 보며 엘리시아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그녀를 라시안의 파트너로 한 것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만들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왼쪽에는 황제파의 수장, 오른쪽에는 귀족파의 수장이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라시안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더불어 황제의 뜻이 누구에게 있는지도 명확히 전달되겠지.

라시안이 황태자로서 충분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엘리시아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황비나 라세트 공작 쪽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 상황을 무너트리기 위해 곧 손을 써올 것이 뻔했다.

‘루리엔이 그랬지. 이 상황에서 연회의 분위기를 바꾸는 방법은 내가 쓰러지는 거라고.’

그녀가 쓰러져서 연회에서 빠지게 되면 지금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깨어질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스틴이 라세트 공작과 함께 치고 나오겠지.

그리고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엘리시아는 조금 전부터 강렬하게 날아들던 또 하나의 시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쳐다보라고 명령하는 것 같은 그 시선을 따라간 그녀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인 황비, 샬롯이 그녀를 쳐다보며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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