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33)

63화

“그림은 좋은데 상황은 별로 좋지 않네.”

루리엔의 중얼거림에 하르가 느릿하게 고개를 둘렸다. 그의 눈빛에는 무슨 말이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루리엔은 엘리시아가 서 있는 곳을 눈짓하고는 또 다른 쪽을 눈짓했다. 2황자와 황비가 서 있는 곳이었다.

“화기애애한 이쪽과 달리 저쪽은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야. 특히 황비마마께서.”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황비를 쳐다본 하르의 미간이 못마땅한 듯 살짝 접혔다.

황비는 2황자처럼 엘리시아를 노려보고 있지는 않았다. 도리어 보기 좋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의 눈빛 때문일 것이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듯한 의뭉스러운 눈빛.

아니나 다를까 엘리시아가 고개를 돌려 황비를 쳐다보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황비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루리엔 역시 그와 똑같은 걸 본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팔꿈치로 하르를 툭 치며 속삭였다.

“역시나 호출하네. 하르, 엘리 근처에 가 있어. 황비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하르는 곧바로 엘리시아를 향해 움직였다.

그가 소리 없이 사람들 사이로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루리엔은 다시 엘리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비의 부름을 받은 그녀의 친우는 계속해서 밀려드는 귀족들 사이에서 빠져나갈 틈을 재고 있는 것 같았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다른 자리도 아니고 황제까지 참석한 이 연회에서 황비가 엘리시아에게 과도할 정도로 심한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배탈을 내거나 기절을 시키는 정도로 끝내겠지. 황비의 목적은 엘리시아를 이 연회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일 테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황비가 엘리시아에게 뻗칠 마수를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황제 또는 데이모스 공작.

하지만 그들이 개입한다면 라세트 공작이 괘씸죄를 물어 곧바로 카멜리아 가문의 목줄을 죄어올 것이다.

그러면 곧바로 그녀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 헬리오스의 움직임에도 제약이 걸리겠지. 목줄을 끊어내려는 계획 역시 또다시 늦춰질 거고.

‘더 이상은 안 돼. 지금도 투자자를 찾느라 늦어지고 있는데.’

루리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는 전대 카멜리아 후작이 안배해놓은 자금들로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새로운 투자자가 필요했다.

적어도 투자자를 구하기 전까지는 라세트 공작을 자극해서는 곤란했다.

그렇기에 그녀와 하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엘리시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돌보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의 친우가 당할 고통을 생각하자 루리엔은 심기가 뒤틀렸다.

‘황비고 라세트 공작이고 그냥 싹 쓸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녀답지 않게 과격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눈앞에 손 하나가 내밀어졌다. 익숙한 목소리도 함께였다.

“춤추지 않을래?”

루리엔이 고개를 들자 미소 짓고 있는 녹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데이모스 공작을 따라 당연히 참석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곤란해. 지켜봐야 할 것이 있거든.”

루리엔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녹턴의 제안을 거절했다. 실망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비가 엘리시아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한가롭게 춤 같은 걸 출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돌아온 녹턴의 말은 그녀가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추자는 거야. 그럼 눈에 띄지 않고 지켜볼 수 있을 테니까. 자연스럽게 가까이 갈 수도 있을 테고.”

“녹턴, 너…….”

놀란 눈빛을 떠올린 루리엔은 손을 뻗어 녹턴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가 고개를 숙여 오자 그녀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각하께 대충 이야기 들었어. 오늘 네 여왕님이 황비마마의 목표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네게 전하라는 말이 있으셨는데 그건 춤을 춰주면 말해줄게.”

“…….”

“그러니까 잡아.”

루리엔은 자신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녹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2년이라는 시간이 길기는 길었던 모양이다. 떠나는 상대에게 한마디 원망도 못 할 정도로 유순한 사람이 제법 그럴듯하게 유혹을 해오는 것을 보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루리엔은 내밀어진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닿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왔다.

기쁨이 어린 그의 두 눈을 마주하며 루리엔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날 실망시키지 마, 녹턴.”

⚜ ⚜ ⚜

‘오늘따라 인사할 사람들이 많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해 아니라고 해야 해?’

자신을 둘러싼 귀족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엘리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서 있는 3황자와 데이모스 공작 때문인지 귀족파의 귀족들은 물론 평소 이야기를 나누지 않던 황제파의 귀족들과 중립에 서 있는 귀족들까지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황비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 늦춰진 것은 좋았지만 그만큼 황비가 벼르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벼운 대화를 끝낸 귀족들이 자리를 떠나자 엘리시아는 황비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귀부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황비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전보다 확연하게 내려와 있는 입꼬리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바로 가지 않으면 한소리 단단히 듣겠는데.’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라시안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전하, 죄송하지만 잠깐 황비마마께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황비마마께요?”

“예. 아까 부르셨는데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라시안의 눈빛에 걱정이 깃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어린 황자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작이 가기 싫다면 말해주세요. 내가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는 것보다 안위를 걱정해주는 라시안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이러니 자꾸만 도와주고 싶어지지.’

정말 누구누구와는 떡잎부터가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황비마마와 맞설 것이 아니라 귀족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혹시 제가 갑자기 연회에서 물러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당황하지 마시고 지금처럼만 하십시오. 각하께서 옆에 계시니 잘 인도해주실 겁니다.”

“하지만 후작.”

“저도 제 입장이 있는지라 전하께서 나서시면 곤란해질 수가 있습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엘리시아가 황비 쪽으로 몸을 돌리려고 했을 때였다.

저음의 목소리가 조용하고 묵직하게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후작.”

흠칫 놀란 엘리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케르의 강렬하고 아름다운 금안이 그녀와 눈을 마주쳐 왔다.

단상에서 내려온 이후 그녀가 이케르와 마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시안의 옆에 선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인사는커녕 대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귀족들을 상대할 뿐이었다.

얼마 전 수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 때문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갑작스러운 그의 부름이 그녀로서는 의아하기도 하고 약간은 당혹스럽기도 했다.

‘왜 부르신 거지?’

그녀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케르의 수려한 눈매가 부드럽게 접히며 매력적인 입술이 또다시 그녀에게 소리 없는 말을 전해온 것이다.

[걱정할 것 없어.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약속하지.]

직접 들은 말도 아니고 그저 입술의 움직임으로 읽어낸 말일 뿐이었다. 그런데 가슴에 퍼져 가는 이 안도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조금 전까지 불안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려 엘리시아는 잠시 멍해졌다.

말을 전한 이케르는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곧바로 고개를 바로 하고는 귀족들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만약 라시안이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어버린 채 그대로 그를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후작?”

“아…… 예, 전하.”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엘리시아가 급히 시선을 돌리자 라시안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괜찮다고 하시니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눈치 빠른 황자의 말에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어졌다. 난감함과 함께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아니 얘는 언제 또 그걸 봤대?’

볼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그녀는 서둘러 라시안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체면이 있지, 이케르와의 대화 좀 들켰다고 붉어진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라시안의 옆을 떠나 황비가 있는 곳으로 향하면서 엘리시아는 손을 들어 슬쩍 볼에 대보았다. 얇은 장갑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다행히도 미약한 온기였다.

‘많이 붉어지지는 않았나보네.’

그녀는 안도했다. 살짝 달아오른 볼은 이동하는 동안에 원래의 제 색을 찾을 터였다.

고개를 든 엘리시아의 눈에 귀부인들과 대화하고 있는 황비의 모습이 들어왔다.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이케르의 말 덕분인지 이전처럼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까짓것, 좀 아프고 말면 되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속으로 심호흡을 깊게 한 그녀는 황비를 향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왕 당할 거라면 빨리 당하고 끝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조금 전 라시안으로 보았을 때 그녀가 없다고 해도 주도권을 빼앗길 것 같지는 않았다. 옆에 이케르도 있고.

엘리시아가 다가가자 라세트 공작부인을 비롯해 황비를 둘러싸고 있던 귀부인들이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보네.’

황비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녀를 흉보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 엘리시아는 관심을 껐다.

그녀의 신경은 오로지 귀부인들의 중심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있었다.

자신이 부른 상대가 온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황비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황비의 심기가 상했음을 눈치챈 엘리시아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황비 마마.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중한 사과의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나서야 황비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