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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133)

64화

“카멜리아 후작, 어서 와요. 내 그대를 많이 기다렸답니다.”

화사하게 웃으며 말하는 황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서늘했다.

빨리 안 오고 뭐했느냐는 타박이 실린 황비의 시선에 엘리시아는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도 눈이 있으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봤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기에 그녀는 눈을 내리깔아 감정을 감춘 채 답했다.

“귀족들의 말을 중간에 끊기가 어려워 빠져나올 타이밍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짜증 좀 났다 해서 엘리시아가 몇 년간 황비와 라세트 공작부인을 상대하며 갈고닦아온 연기력이 어디 갈 리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황비가 이러는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귀족파의 수장인 그녀가 자신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을 귀부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는 걸.

엘리시아가 눈치껏 저자세로 나가자 황비는 만족한 듯 미소를 머금고는 입을 열었다.

“하긴 후작도 힘들었겠지요. 마음에도 없는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대해야 했으니 얼마나 피곤했겠어요. 폐하의 지시니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지 않나요, 후작?”

그렇긴 뭐가 그래.

엘리시아는 보이지 않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황비는 엘리시아가 황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라시안의 옆에 섰다는 것을 강조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다 말할 테니 넌 그렇다고 대답만 하면 된다는 저 망할 화법은 여전하네.’

언제쯤이면 저 화법을 상대하지 않아도 될까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마음에도 없는 감사의 말을 내뱉었다.

“제 입장을 고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비마마.”

“후작과 나 사이에 그 정도는 당연하지요. 그보다 오늘 정말 아름답군요, 후작. 마담 카렌이 무척이나 신경을 쓴 모양이에요.”

“정말이에요. 후작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저는 눈을 떼지 못했다니까요.”

황비의 칭찬을 시작으로 라세트 공작부인을 비롯한 귀족부인들이 한마디씩 돌아가며 엘리시아에게 칭찬을 던지기 시작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엘리시아는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

사형선고를 내리기 전에 만찬을 차려주는 딱 그 느낌인데 감사한 마음이 생길 리 있겠는가.

그래도 기분 좋은 것처럼 억지로 웃고 있으니 황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연회의 첫 춤도 잘 보았답니다. 후작의 춤 솜씨는 여전히 감탄할 만하더군요. 첫 춤을 추는 건 영광스럽기도 하지만 힘들기도 하지요. 세 곡을 연달아 추어야 하니. 그렇지 않나요?”

“예. 맞습니다.”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이후로도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더군요. 심지어 목을 축일 틈조차도. 얼마나 안쓰럽던지.”

드디어 본론인가.

가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황비를 보며 엘리시아는 소리 없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우려했던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여기 계신 부인들도 목이 마르다고 해서 칵테일을 준비시켰는데 후작의 것도 준비했답니다. 마음에 들면 좋겠군요.”

황비가 눈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급히 시종이 나가더니 칵테일 잔이 가득 놓인 은색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응?’

쟁반 위 칵테일 잔들을 쳐다본 엘리시아의 두 눈에 의아한 눈빛이 떠올랐다.

모든 잔이 똑같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 속에 담긴 칵테일의 양조차 똑같았다.

‘황비만 알아볼 수 있는 무슨 표식이라도 해놓은 건가?’

그럴 수도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라세트 공작을 닮아 황비 역시 영악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추측은 빗나갔다.

쟁반 위에서 가장 먼저 칵테일 잔을 우아하게 집어 든 황비가 귀족부인들에게 먼저 잔을 권한 것이다.

“한 잔씩 잡으세요. 다들 목이 말랐을 텐데.”

“감사합니다, 황비마마.”

귀족부인들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손을 뻗어 칵테일 잔을 가져갔다.

정해진 것이 아닌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엘리시아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만약 특정한 잔에만 약을 넣어두고 표식을 해놓았다면 지금처럼 귀부인들이 막 가져가게 놔두지 않았을 터였다.

‘뭐지? 다른 속셈이 있는 건가?’

의아해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황비와 눈이 마주치자 움칠했다. 황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칵테일 잔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헤리스!

헤리스가 들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에게는 독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식료품일 뿐인.

“후작도 한 잔 들어요.”

“감사합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여상하게 권하는 황비를 보며 엘리시아는 속으로 치를 떨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고마워하는 것처럼 미소 지으며 칵테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럼 다 같이 건배할까요? 오늘 즐거운 연회가 되기를 바라며.”

황비가 잔을 살짝 들자, 귀부인들 역시 모두 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사람들이 많은 연회에서는 건배 시 소란스럽지 않도록 서로 잔만 들어 보이는 것이 예의였다.

엘리시아 역시 잔을 살짝 들어보이자 황비는 웃으며 말을 건네 왔다.

“목이 많이 말랐을 텐데 쭉 마셔요, 후작. 준비한 내 성의를 봐서라도.”

남기지 말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라는 협박을 당당하게 해오는 황비를 보며 엘리시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웃었다.

헤리스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먹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황비가 내린 잔을 거절할 명분을 만들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그녀로서는 더 짜증스러웠다. 어떻게 하더라도 결국은 마시게 될 테니까.

‘이래서 힘이 없으면 서럽다니까.’

극소수만이 가진 부작용이다 보니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헤리스 부작용이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어릴 적에 조금 마신 것만으로도 고열을 심하게 앓지 않았던가. 물론 그녀의 경우 커서는 다른 쪽으로 부작용이 더 강해진 것 같지만.

어쨌든 그런 것을 앞에 두고 있으니 당연히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와서인지 태연한 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나 헤리스를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홀을 빠져나갈 시간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칵테일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엘리시아의 두 눈이 안도감으로 젖어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하르가 서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단단한 눈빛을 지은 채. 그리고 가까운 곳에는 루리엔이 춤을 추며 그녀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친우들 덕분에 그나마 긴장이 풀린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케르가 있는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의 뒷모습뿐인데 어째서 마음이 놓이는 건지. 그가 건네 왔던, 걱정할 것 없다는 소리 없는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엘리시아는 속으로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칵테일을 쭉 들이마셨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마시고 나자 황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말했다.

“정말 목이 많이 말랐나 보군요, 후작. 한 잔 더 마시는 것이 좋겠어요. 마리타 자작 부인?”

“예, 황비마마.”

마리타 자작 부인은 황비가 부르자마자 재빨리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새로운 음료가 담긴 잔을 하나 들고 왔다.

“드세요, 카멜리아 후작님.”

엘리시아는 마리타 자작 부인이 들고 있는 음료수 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 마신 칵테일과 달리 저 음료수에는 분명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생길 경우 원인으로 지목하기 위해 가져온 것이겠지.

그녀의 시선이 음료수 잔에서 마리타 자작 부인으로 옮겨갔다.

떨리는 손과 불안한 눈빛을 보는 순간 그녀가 희생양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 황비 대신 죄를 뒤집어 쓸 희생양 말이다.

‘뭔가 황비에게 약점이라도 잡혔나 보네. 아니면 댓가를 두둑하게 받았던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엘리시아는 마리타 자작 부인이 내민 잔을 받아 한입에 다 마셨다.

그녀가 빈 음료수 잔을 마리타 자작 부인에게 돌려주자 황비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우리가 바쁜 후작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요. 자, 이제 돌아가 보세요. 3황자가 눈 빠지게 기다리겠어요.”

한마디로 돌아가서 쓰러지라는 소리였다. 그것도 라시안 옆에서 극적으로.

‘와, 저 불여우. 꼬리가 대체 몇 개야? 다 뽑아버리고 싶네.’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황비에게 엘리시아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녀의 배려에 감사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비마마. 그럼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황비가 넣은 헤리스의 양에 따라가다가 비틀거릴 수도, 라시안의 옆에 도착해서 비틀거릴 수도 있었다.

경험상 후자 쪽일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엘리시아가 원하는 것은 전자였다.

하르가 그녀를 챙길 수 있도록 최대한 천천히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던 엘리시아는 누군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아 오자 흠칫 놀랐다.

“나랑 춤이나 한 곡 추지, 후작.”

그녀의 앞을 막아선 남자는 놀랍게도 더스틴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엘리시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 이 미친놈이 왜 여기서 나와?’

황비와 뭔가 약속한 거라도 있나 싶어 황비 쪽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황비의 눈빛에 당혹감이 떠오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그녀는 한 발 나서 더스틴의 행동을 저지하기까지 했다.

“황자, 후작이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어 그만 돌아가야 한답니다. 춤은 나중에 추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미친놈에게 제 어미의 말이라고 한들 먹힐 리 없었다.

“어차피 비운 자리, 춤 한 곡 추고 돌아간다고 달라질 건 없지 않겠습니까.”

더스틴의 대답과 함께 황비와 더스틴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주변에 있던 귀부인들도 당황했지만 가장 당황한 것은 엘리시아였다.

아니, 당황했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황비와 더스틴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린 엘리시아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황비는 그녀가 라시안의 옆에서 쓰러지기를 바라며 헤리스를 먹였다. 그런데 2황자가 그런 그녀의 계획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갑자기 왜? 저 미친놈이 개과천선을 했을 리도 없고. 속셈이 뭐지?’

생각에 잠겨 가늘어졌던 엘리시아의 두 눈이 다시 크게 떠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 역시 미친놈.’

더스틴의 새카만 속내를 알아차린 엘리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부작용이 나타나면 그녀는 이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질 것이다. 지난번 연회에서도 그랬었으니까.

이상을 느끼고 재빨리 홀을 빠져나갔지만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었지.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케르 위에 앉아있었다. 그것도 몸이 연결된 채로.

더스틴은 그걸 노리는 것이다.

춤을 추다 자신의 품 안에서 쓰러진다면 치료를 핑계로 그녀를 안으려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이 미친놈은 왜 이런 나쁜 쪽으로 머리가 이렇게 비상하게 굴러가는 거야?’

이렇게 된 이상 황비가 기 싸움에서 이기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지키러 나선 하르와 더스틴이 충돌할 것이고 하르가 다칠 것이 뻔했다.

졸지에 황비를 응원하게 된 엘리시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라시안의 옆에서 쓰러지는 것이 최악이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가다가 쓰러지려고 했었고.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최선이라니.

‘아 진짜 개 같은…….’

욕설이 절로 치미는 것을 느끼며 엘리시아는 초조한 마음으로 모자간의 신경전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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