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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66/133)

66화

“죄송합니다만, 형님. 제 파트너를 그만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놀란 엘리시아가 고개를 돌리자 언제 다가온 건지 옆에 서 있는 라시안이 보였다.

“전하?”

그녀의 부름에 라시안은 싱긋 미소 지었다.

신비롭게 반짝이는 황자의 은빛 눈동자에는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이 담겨 있었다.

“후작께서 제 옆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두시는 것 같아 데리러 왔습니다.”

엘리시아는 기분이 묘해졌다.

구해주러 와 준 것은 고마웠지만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어쩐지 머쓱해서였다.

한편으로는 더스틴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 걱정도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시안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더스틴의 짙은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보는 눈도 많아서인지 다행히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는 않았다. 대신 말은 곱지 않았다.

“네 보호자라면 데이모스 공작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만. 양쪽에 하나씩 끼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기라도 한 거냐?”

너 잘 걸렸다 싶었는지 더스틴의 말에는 조롱과 비웃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엘리시아조차 짜증날 정도로 기분 나쁜 말투였다.

‘여기서 말려들면 안 되는데.’

그녀는 더스틴과 대치하고 있는 라시안을 쳐다보며 걱정으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어린 혈기에 발끈해서 말싸움이라도 나게 되면 더스틴은 라시안이 어려서 감정조절을 못 한다고 몰아갈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잘 쌓아온 귀족들 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한 번에 무너지면서 라시안의 데뷔 무대가 망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스틴의 도발에 라시안이 침착하게 대응해 온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연회에서 파트너를 오랜 시간 혼자 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기에 온 것뿐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엘리는 계속해서 나와 함께 있었는데 누가 혼자 두었다는 거지?”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후작이 아닙니다. 형님의 파트너인 노버트 후작 영애 말입니다.”

“……!”

제대로 날아든 직격탄에 더스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실제로 그가 엘리시아와 함께 있는 동안 노버트 후작 영애는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가 2황자의 파트너이다 보니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영식들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한 것이다.

방치라고 해도 솔직히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노버트 후작 영애는 사교계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혼자 있으니 안쓰럽게 보여서요. 그렇다고 제가 제 파트너를 놔두고 노버트 후작 영애를 에스코트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조용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조곤조곤 말하는 라시안을 보며 엘리시아는 내심 감탄했다. 열다섯의 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어른스러웠다.

아무래도 이케르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라시안의 말투나 행동을 보고 있으면 그가 겹쳐 보일 때가 간간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지도 몰랐다.

말을 마친 라시안은 은빛 눈을 곱게 접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이번 춤은 제게 양보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형님.”

겉에서 보기에는 아우가 형에게 정중하게 요청하는 모양새였지만 속 내용을 까보면 실상은 달랐다.

한마디로 이제 그만 내 파트너를 내놓고 너는 네 파트너에게 가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할 더스틴이 아니었다.

더스틴의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가며 다물린 입술 사이로 으득하고 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제대로 열 받은 것 같은데.’

옆에서 두 황자의 대치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시아는 눈동자를 또그르르 굴렸다.

그녀가 쓰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짜증이 나 있을 텐데 라시안까지 와서 더스틴의 속을 긁은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더스틴은 미친놈이기는 하지만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건을 일으킬 리 없었다. 나중에 몰래 살수를 보내면 몰라도.

엘리시아의 예상대로 더스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놔주었다. 하지만 라시안을 보는 시선은 여전히 죽일 듯 사나웠다.

그럼에도 라시안의 표정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더스틴에게 담담하게 인사를 건넨 어린 황자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미소를 지은 채 자유의 몸이 된 엘리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엘리시아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환영해야 할 입장이었다.

라시안의 손을 잡은 그녀는 황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중에도 계속해서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엘리시아는 더스틴을 눈짓하며 라시안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나셔서도 괜찮으신 겁니까?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부딪쳐야 하는 상대니까요. 그리고 후작을 형님 손에서 빼내 와야 스승님의 눈빛이 좀 풀리실 것 같았습니다.”

“예? 그게 무슨……?”

당혹감을 느낀 엘리시아가 되묻자 라시안은 나직하게 웃으며 답했다.

“후작이 형님과 춤을 추는 동안 스승님 기분이 저조해지셔서 말입니다. 제자로서 스승님의 기분 정도는 풀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기분이 저조했다고? 언제?

믿기지 않은 엘리시아가 이케르 쪽을 쳐다보자 라시안은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후작은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감정조절 능력이 뛰어나시니까요. 하지만 오랜 시간 같이 있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같은 표정을 짓고 계셔도 미세하게 차이가 있지요.”

말을 마친 황자는 자신의 스승을 흘깃 보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지금은 만족스러워하시는군요.”

엘리시아의 두 눈에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라시안을 따라 이케르를 쳐다봤지만 어떤 부분이 바뀐 건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각하의 어디가 달라졌다는 말씀이신지?”

힌트라도 달라는 그녀의 눈빛에 라시안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게… 말로는 설명이 좀 어렵습니다. 앞으로 후작이 스승님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저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으니까요.”

더 많은 시간…….

묘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던 엘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같이 있으신 시간이 5년 아니었습니까?”

5년간 함께 지내면서 간신히 안 사실을 지금 나보고 알아내라는 거냐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돌려 말한 것이었다.

라시안의 입가에 소리 없는 미소가 번졌다.

“걱정 마세요. 후작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제가 보장하지요.”

엘리시아를 쳐다보는 어린 황자의 아름다운 은빛 눈은 웃음기를 가득 담고 반짝이고 있었다.

⚜ ⚜ ⚜

“것 봐, 여왕님께 아무 일도 없지?”

녹턴의 말에 루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라시안과 함께 이케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엘리시아에게 머물러 있었다.

황비가 잔을 내밀었을 때도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를 더 긴장하게 했던 것은 2황자였다. 갑자기 그렇게 등장할 줄이야.

그가 엘리시아를 끌다시피 데리고 홀 중앙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는 정말이지 초조함에 피가 말랐었다.

2황자의 품 안에서 엘리시아가 쓰러지게 된다면 데려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황족이라는 걸 내세워 자신이 보호하겠다고 막아섰겠지.

그랬다면 충돌 없이는 엘리시아를 빼내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유일하게 충돌 없이 상황을 정리할 힘을 가진 황제는 황후와 함께 이미 자리를 떠났으니.

‘하르가 나서고 3황자와 데이모스 공작까지 나섰으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겠지.’

그렇게 되면 엘리시아는 되찾아올 수 있겠지만 2황자와 라세트 공작과는 제대로 척을 지게 되었을 것이다. 곧바로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거고.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내쉰 루리엔은 칵테일을 홀짝거리고 있는 녹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녀와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켰다.

춤을 추는 동안 엘리시아가 잘 보이는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고 데이모스 공작이 그녀에게 전하라는 말도 해주었다.

더스틴과 춤을 추는 엘리시아를 그녀가 걱정이 담긴 시선으로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각하께서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각하께서?]

[응. 그렇게 전하라 하셨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루리엔은 솔직히 걱정의 반 정도를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이모스 공작이 그렇게 말했다면 뭔가 준비한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황자와 춤을 추는 동안 엘리시아는 멀쩡했고 3황자가 와서 그녀를 빼내갔다. 조금의 충돌도 없는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물론 황비와 2황자에게는 무척이나 불만족스러운 결말이겠지만.’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황비에게 다가가는 2황자를 흘깃 쳐다본 루리엔은 라세트 공작의 움직임에 앞으로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황비도 2황자도 오늘의 수모를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이제 폐하의 비호를 받은 3황자가 전면으로 나섰으니 곧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될 거야. 엘리를 지키려면 빨리 사업을 확장 시켜야 하는데.’

역시나 투자자를 빨리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루리엔은 녹턴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참. 각하께서 하나 더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었는데.”

“뭔데?”

고개를 든 루리엔이 묻자 그녀와 시선을 맞춘 녹턴은 싱긋 미소 지었다.

“한 곡 더 춰주면. 그럼 말해줄게, 루리엔.”

능청스럽게 손을 내밀어 오는 그를 보면서 역시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루리엔은 생각했다.

‘뭐, 나쁘지는 않지만.’

녹턴의 손을 잡으며 그녀는 엘리시아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녀의 친우는 데이모스 공작과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하르까지 확인하고서야 루리엔의 시선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젠 괜찮을 것 같네.’

엘리시아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은 그녀는 데이모스 공작이 전하라는 두 번째 말을 듣기 위해 녹턴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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