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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71/133)

71화

자신에게 곧바로 쏘아져 오는 살기에도 이케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궁금해했던 것을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따라붙는 자가 없는지 확인한 그는 살기를 따라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커다란 나무 앞에서 이케르가 멈춰 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나무 뒤쪽에서 하르가 걸어 나왔다.

예상했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이케르는 입매를 부드럽게 늘어트렸다.

“테스케 경은 항상 살벌하게 날 부르는 것 같아. 정상적으로 부를 생각은 없는 건가?”

농담이 깃들어진 그의 말에 하르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엘리가 눈에 띄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난번과 한 치의 다름도 없는 똑같은 대답이었다. 눈앞의 청년을 쳐다보는 금안에 희미한 웃음기가 깃들었다.

“그 말이 나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참 한결같군. 그래, 그녀가 전하라는 말은 뭔가?”

엘리시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이케르는 하르가 가져온 그녀의 메시지부터 물었다.

마주 선 청년의 성격상 직접적으로 묻는 것보다는 상황을 통해 원하는 내용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것처럼 곧바로 하르의 대답이 돌아왔다.

“내일 저녁 방문해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라 했습니다.”

“내일 저녁?”

이케르의 미간이 살짝 접히며 금안에 희미하게 난감한 눈빛이 깃들었다.

평소 그답지 않은 모습에 하르가 의아해하는 사이 잠시 침묵했던 이케르가 느릿하게 답했다.

“웬만하면 시간을 맞춰주고 싶은데 내일은 곤란할 것 같군. 아침 일찍부터 영지에서 정기 회의가 있어.”

그제야 하르는 그가 난감해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지를 가지고 있는 가문이라면 대부분 분기마다 정기회의가 있었다. 그 시기는 가문마다 다르지만 가신들과 함께 영지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고 단합을 도모하는 것이다.

중요한 회의인 만큼 가문의 가주가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엘리시아 역시 얼마 전 카멜리아 가문의 정기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영지에 다녀왔었다.

“그럼 오늘 게이트를 타고 내려가시겠군요. 정기 회의면 사흘간 영지에 계시는 겁니까?”

확실히 내일은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하르는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엘리시아가 조급해하는 만큼 이케르가 영지에서 머무르는 정확한 일정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보통은 나흘 정도 걸리지만 이번에는 가신들과 함께 영지사찰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다 보니 좀 더 걸릴 것 같군. 일주일 뒤에나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

일주일이라는 말에 하르의 눈빛이 살짝 굳어졌다. 그리고 그 미세한 변화를 이케르는 놓치지 않았다.

‘엘리에게 무슨 일이 있나보군.’

이케르의 잘생긴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갑자기 내일 저녁 방문해달라는 엘리시아의 말도 그렇고 하르의 반응도 그렇고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듯했다.

그는 중천에 뜬 달을 흘깃 쳐다보았다.

게이트를 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한두 시간 늦게 간다고 큰일 날 일은 없었다.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은 없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궁금한 것 정도는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거고.

무엇보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으면 영지로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을 정한 이케르는 하르를 쳐다보았다.

“지금 엘리는 어디에 있나?”

⚜ ⚜ ⚜

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정원에 서서 엘리시아는 스스로를 타박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들어놓고도 잊어버리다니.”

라시안의 파트너로 홀에 서 있을 때 데이모스 가문의 가신 하나가 이케르에게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던가. 내일 아침 정기 회의에서 뵙겠다고.

데이모스 가문의 정기 회의가 내일 아침부터 시작이라면 쉬지도 못하고 오늘 밤에 바로 내려가야 할 테니 많이 피곤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감정에 휩쓸려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케르에게 내일 저녁에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하르가 떠나고 나서야 기억났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자신의 요청을 받고 곤란한 눈빛을 떠올릴 그를 상상하자 엘리시아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정기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회의인데. 정말 미쳤나 봐.”

황비와 라세트 공작의 대화를 엿들은 이후로 아무래도 어느 정도 이지가 날아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감정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던 엘리시아는 자신의 두 손을 들어보았다. 좀 전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미세한 떨림이 남아있었다.

오늘 만날 수 있음에도 내일 만나자고 한 것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스스로 생각해도 무척이나 불안정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이케르를 만난다면 어떤 꼴을 보일지 자신이 없었다.

제정신일 때도 매번 휘둘렸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를 만난다면 속에 있는 말을 모두 꺼내놓고 말 것이다. 아직 정리도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안 돼. 좀 더 이성을 찾고 만나야…….”

고개를 숙인 채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엘리시아는 자신을 부르는 낮고 깊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자 그대로 굳어졌다.

“엘리.”

이젠 환청까지 들리나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케르의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환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또다시 들려오는 것을 보면.

“엘리?”

엘리시아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자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금안이 그녀와 시선을 맞춰왔다.

이케르가 그녀의 바로 눈앞에 있었다.

“……각하?”

그녀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풍랑이라도 만난 것처럼 정신없이 흔들렸다.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아서인지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고개를 휙 돌리자 이케르의 뒤쪽에 서 있는 하르가 보였다.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젓는 것도.

“테스케 경에게 뭐라 하지 말게. 내가 그대를 만나야겠다고 고집한 것이니.”

당황한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하지만 이케르의 손이 더 빨랐다.

“얼굴이 창백하군. 대체 무슨 일인가? 내일 방문해달라는 것도 그렇고.”

그녀의 팔을 단단하게 잡은 이케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그가 나타나면서부터는 정신없이 뒤섞여 뭐부터 물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그와 시선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랬다가는 지금 자신의 불안정하고 약한 내면을 모두 읽혀 버릴 것 같았다.

눈을 내리깐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아무 말도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

이케르가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또다시 자괴감이 몰려들어 엘리시아는 두 주먹을 꾹 쥐었다.

‘기껏 와줬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각하께서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차라리 그냥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런 연약하고 바보 같은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들려온 그의 말은 그녀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 내일 저녁에 다시 오면 되겠나?”

“……?”

“지금 말할 수 없다면 내일은 얘기해줄 수 있는 건가? 그대가 왜 이런 얼굴인지.”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 잠시 멍해졌던 엘리시아는 흠칫 놀라 급히 고개를 들었다.

“내일은 정기 회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올 수 있겠냐고 그녀는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케르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엘리시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오로지 그녀에 대한 걱정만이 짙게 배어 있었으니까.

“그건 그대가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내일 다시 오지.”

어째서일까. 가문의 회의도 미루고 찾아오겠다는 그의 말에, 성난 파도처럼 불안하게 요동치던 그녀의 가슴이 잠잠해지기 시작한 것은.

동시에 달아났던 이지도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뒤섞여 있던 머릿속이 점차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엘리시아는 속으로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심호흡을 하고 나자 놀랍게도 그녀는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만큼은 아니었지만 감정에 휩쓸려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정도로는.

정신을 차린 엘리시아는 가장 먼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이케르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저은 것이다.

“괜찮습니다. 내일 오지 마십시오.”

“하지만 엘리.”

“가문의 정기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위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걱정할 것 없…….”

하지만 이케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갑자기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이번 영지의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빨리 답하라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나흘간 정기 회의가 있고 그 이후에 영지 시찰이 잡혀 있어 일주일 정도 걸릴 듯해.”

“그럼 제가 가겠습니다.”

“……?”

단호한 그녀의 말에 이케르는 의아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런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그녀는 다시 말했다.

“제가 사흘 뒤 영지로 가겠습니다.”

“그대가 내 영지로?”

그의 금안이 평소보다 살짝 크게 떠지는 것이 보였다.

답지 않게 놀란 듯한 이케르를 쳐다보며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개인적인 일로 각하의 공무를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저도 마음이 굉장히 불편할 것 같고요. 그러니 제가 가겠습니다. 대신 회의는 사흘 안에 끝내주십시오. 그 이상은 기다리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어이없고 무례한 부탁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랬으니까.

데이모스 가문은 제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영지가 넓으니, 정기 회의도 오래 걸릴 것이다. 카멜리아 가문의 정기회의도 기본 사흘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그렇게 말한 것은 이 남자에겐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사흘 이상 기다릴 자신도 없었고.

그리고 이케르는 그런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사흘 뒤 영지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그의 대답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길고 수려한 눈매가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는 다짐했다.

사흘 뒤 그를 만날 때는 오늘처럼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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