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33)

73화

[각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어. 자신이 투자하는 것을 알게 되면 카멜리아 후작이 부담을 느낄 수도 있으니 타국의 귀족으로, 상단을 가진 재벌로 하자고. 그에 대한 준비는 이미 다 해두셨다고 하시더군.]

나 같으면 바로 받아들인다며 녹턴은 싱긋이 웃었다.

그의 말에 루리엔도 이의가 없었다. 아무런 조건도 달리지 않은 이런 좋은 제안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만약 엘리시아가 데이모스 공작을 꺼려하거나 싫어한다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거부했을 것이다. 잘못했다가 사업 때문에 그녀가 발목을 잡히면 안 되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데이모스 공작에게 사과의 뜻으로 목걸이와 귀걸이를 선물 받았다고 귀 끝을 붉힐 정도면 말 다 했지 뭐.’

보이지 않게 어깨를 으쓱한 루리엔은 엘리시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할게, 괜찮지?”

“물론이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엘리시아의 대답에 루리엔은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렇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하게 되어 버린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서.

“고마워. 실수 없이 잘해볼게. 그런데 황후마마께서 말씀하신 사업에 대해서는 찾아봤어? 아까 내게 말했던 외출은 그것 때문이야?”

하르가 헬리오스를 살피기 위해 나갔던 동안 엘리시아는 그녀의 어머니, 전대 카멜리아 후작의 서재에 틀어박혔다. 황후가 말했던 사업에 대한 실마리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두 시간쯤 지난 후 갑자기 집사가 엘리시아의 말을 전해왔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외출한 엘리시아가 집무실로 다시 돌아온 것은 하르가 돌아오기 바로 직전이었다.

“이거 봐봐.”

엘리시아는 옆에 놓아두었던 봉투 속에서 서류를 꺼내어 루리엔과 하르 앞에 내밀었다.

서류의 제목을 확인한 두 사람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엘리 이거…….”

놀란 루리엔의 물음에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황후마마에게 부탁해 어머니가 투자했던 사업의 계약서 사본. 원본은 황후마마께서 가지고 계신 거 같아.”

“어떻게 찾았어? 금고에 없다더니.”

“금고에 있기는 했어. 이 서류는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루리엔 뿐 아니라 하르 역시 의아한 눈빛을 떠올리자 엘리시아는 웃으며 자신이 서류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금고 안을 확인했을 때 다른 서류들과 달리 수도 가게 주소를 적어놓은 종이 한 장이 있었거든. 그때는 별생각 없이 어머니가 뭘 사려고 하셨나보다 하고 넘겼었어. 그런데 집무실을 다 뒤져도 서류가 없기에 혹시나 싶더라고. 그래서 그 주소로 가봤지. 수도의 책방이더라고.”

“거기에 있었구나?”

“응. 거기 가게 주인이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면서 그 서류를 주더라고. 어머니의 오랜 친구라고 하시면서.”

“다행이네. 찾아서.”

루리엔의 시선이 곧바로 서류로 다시 향했다. 잠시 후 그녀의 두 눈이 놀람으로 동그랗게 떠졌다.

“말도 안 돼. 마크벨리라니. 정말 후작님이 여기에 투자하셨다고?”

“나도 깜짝 놀랐어. 마크벨리면 지금 한창 뜨고 있는 신대륙 사업 맞지?”

“한창 뜨고 있기는. 이미 뜰 만큼 떴지. 그래도 아직까지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을 정도로 수익률이 좋은 곳이야.”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류를 쳐다보고 있던 루리엔은 투자금액을 확인하고는 또다시 탄성을 내뱉었다.

“와, 초창기 시절에 이 정도 금액을 투자했다면 지금쯤 수십 배로 불어 있겠는데? 역시 후작님이셔. 사업 감각이 정말 놀라울 정도야. 어떻게 여기에 투자하실 생각을 하셨지? 그 당시는 정말 모험이었을 텐데. 황후마마께서 돌려줄지 말지 고민할만하네.”

오랜만에 흥분한 루리엔을 보며 엘리시아는 진심으로 어머니에게 감사했다. 그녀가 저 정도로 들떴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엘리시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보기엔 지금 네가 진행 중인 사업이 성공하고 이 사업의 수익금까지 받는다면 라세트 공작에게 빚진 것 모두 갚고도 남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루리엔 답지 않게 톤이 올라간 목소리였다.

“충분히 가능하지. 어느 한쪽 사업만 있었다면 부족해서 사업을 하나 더 벌여야 했을 거야. 그만큼 시간도 더 필요했을 거고. 이제 남은 일은 지금 사업을 성공만 시키면 되는 거네. 그럼 자금적인 측면에서의 목줄은 끊을 수 있겠어.”

“좋아. 그럼 이제 베라무스만 어떻게 하면 되겠다.”

엘리시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채무를 모두 청산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베라무스의 공작을 막아낼 정도의 힘을 키우지 않는 한 라세트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 늘어난 빚도 베라무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말이다.

그녀의 시선이 서류를 쳐다보고 있는 하르에게로 향했다. 루리엔이 다 보고 나서 그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하르, 넌 어떻게 할 거야?”

“글쎄.”

“헬리오스의 수장으로 데이모스 공작을 만난다는 건 네 정체를 드러내겠다는 것과 똑같은 거 알지?”

“어. 그는 이미 내 기척을 알고 있으니까.”

하르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검까지 맞댔었기 때문에 온몸을 가린다고 한들 이케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라세트 공작은 네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만나자고 한 건지도 몰라. 그 인간은 함정 같은 건 눈도 깜빡하지 않고 파는 인간이니까.”

“그것도 예상하고 있어.”

“그래서 둘 중 누구 먼저 만날 건데?”

“……?”

갑작스러운 엘리시아의 물음에 하르의 몸이 움찔했다. 느릿하게 고개를 든 그의 눈빛은 답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는 피식 웃었다.

“너 양쪽 다 만날 생각이잖아. 내가 널 몰라?”

엘리시아는 하르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걱정할까 봐 하려는 일이 위험한 일일수록 말을 아낀다는 것을.

‘글쎄라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둘 다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야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아마 그녀뿐 아니라 루리엔도 눈치챘을 것이다. 하르의 생각을. 그만큼 그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하르의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피해 슬쩍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엘리시아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몇 초간의 짧은 침묵이 흐르고 드디어 굳게 닫혀 있던 하르의 입이 열렸다.

“데이모스 공작부터. 잘하면 협력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언제?”

“그가 영지에서 올라오면 회신을 보낼 생각이야.”

“그다음에 라세트 공작을 만날 거고?”

“어.”

“것 봐. 이미 계획 다 짜놨네. 그러면서 아닌 척 시치미 떼기는.”

엘리시아의 타박에 하르의 입이 다시 다물렸다.

이리저리 구르는 그의 눈동자를 지켜보던 그녀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불렀다.

“하르.”

엇나가 있던 하르의 시선이 그녀의 부름 한 번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와 시선을 맞추며 엘리시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헬리오스의 수장은 너니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할 거라 믿어. 하지만 이거 하나는 꼭 기억해.”

“……?”

“헬리오스와 너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아무 망설임 없이 너를 선택할 거야. 그러니까 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것.”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그녀가 말로 옮긴 것은 혹시라도 하르가 무모하게 움직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자금 부분에서 목줄을 풀 수 있는 기회가 가까이 온 만큼 헬리오스 역시 베라무스에 대적할 수 있게 성장시키고 싶은 욕심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양쪽 수장을 다 만나려 하는 것일 테고.

라세트 공작의 손아귀를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움직여서 친우들이 다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루리엔과 하르는 그녀에게 있어 목숨을 내줘도 아깝지 않은 유일한 가족이니까.

그녀의 말에 하르는 또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이전보다는 짧았다.

“……걱정 마. 조심할 테니.”

그의 대답을 듣고서야 엘리시아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피어났다.

지금까지 그가 그녀와 약속해서 지키지 않은 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지킬 것이다.

그녀가 안도하고 있을 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루리엔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는 넌? 내일 정말로 데이모스 공작각하께 갈 거야?”

“응. 가야지. 가서 듣고 와야겠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엘리시아의 대답에 루리엔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게이트를 이용하더라도 루스테인 영지까지는 제법 먼 거리야.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

“그러지 말고 그냥 각하께서 올라오시면 물어보는 것이 어때? 올라오자마자 방문하시겠다고 했다면서.”

솔직히 루리엔은 엘리시아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사흘 빨리 이야기를 듣기 위해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 먼 거리를 간다는 것이.

아무리 데이모스 공작가의 영지라고 해도 남의 영지가 아닌가. 아무래도 모든 부분에서 제약이 걸릴 터였다.

하지만 엘리시아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루리엔은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착한 듯 보였던 친우의 보랏빛 눈동자는 땅속 깊은 용암처럼 조용히 들끓고 있었다.

“루리엔, 나 지금 당장 내려가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거야. 각하의 공무에 방해가 되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런데 일주일을 참으라고?”

피식 웃은 엘리시아는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꾹 쥐며 말했다.

“그날은 제정신이 아니라 물어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알아내고 말 거야. 내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들이 그런 말을 했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아래로 내리깐 그녀의 시선이 서늘하게 빛났다.

⚜ ⚜ ⚜

“이것으로 이번 정기회의는 끝내도록 하지.”

이케르의 말에 가신들은 ‘드디어 끝났다’라는 생각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기 회의가 만만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만큼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친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나 이번 정기 회의에는 안건이 평소보다 많았기에 가신들은 빨라도 나흘, 늦으면 닷새는 걸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들의 주군은 단 사흘 만에 끝내버린 것이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과 결단력을 보여주면서.

그들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주군께서 시찰을 빨리 나가시고 싶으신 것 같다고.

지금까지 주군의 패턴으로 볼 때 회의가 끝나면 곧바로 시찰을 나가셨으니까.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기에 가신들 중 가장 연장자인 포메르 남작이 입을 열었다.

“각하, 그럼 점심 드실 동안 시찰 나가실 준비를 하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시찰은 내일 오전에 나가도록 한다.”

“예?”

“내일 오전 10시 정도면 될 것 같군.”

시간까지 정해준 이케르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의 옆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는 녹턴을 내려다보았다.

“뒷마무리는 부탁하지.”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놀라 두 눈을 크게 뜬 포메르 남작과 가신들을 뒤로한 채 홀을 빠져나온 그는 곧바로 후문 쪽으로 향했다.

그가 문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집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문밖에는 마구간지기가 흑마의 말고삐를 쥔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네.”

마구간지기로부터 고삐를 건네받은 이케르는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서둘러야겠어.’

태양이 머리 위에 온 것을 확인한 그는 엘리시아와 만나기로 약속한 개인 별장을 향해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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