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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74/133)

74화

말을 몰고 알바로스 마을에 들어선 엘리시아는 조금씩 붉은 기운이 퍼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영지를 하나 끼고 오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리네. 여덟 시간 정도 걸린 건가?”

그녀의 물음에 하르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답했다.

“정확히 여덟 시간 반 걸렸다.”

“어쩐지. 엉덩이가 아프더라. 점심 먹을 때 빼고는 계속해서 말을 달렸으니.”

엘리시아는 지쳤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와 하르는 이케르가 권유한 대로 데이모스 공작가의 영지인 루스테인에서 가장 가까운 게이트를 이용했어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게이트를 이용했다. 루스테인의 근처에 있는 타 귀족의 영지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혹시라도 라세트 공작이나 더스틴이 그녀가 게이트를 통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공용시설인 게이트는 누가 언제 어디로 이용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되어 있으니까.

다행히 루스테인 근처 영지의 주인은 멜튼 자작 가문이었다.

대대로 카멜리아 가문을 따르던 가문으로 이번 대의 멜튼 자작 역시 엘리시아를 따르고 있었다.

덕분에 알리바이에 대해 말을 맞춰두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멜튼 자작에게 부탁해 말과 로브를 빌린 두 사람은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온몸을 로브로 감싸고 곧바로 루스테인으로 향했다.

근처라고는 하지만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보니 아침 일찍 출발했음에도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미리 연통이라도 넣을걸. 각하께서 걱정하시겠네.”

기다리고 있을 이케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중얼거리던 엘리시아는 하르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콘드라 여관이군.”

“어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말로 ‘콘드라 여관’이라 써진 간판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거의 마을 초입에 있는 여관이었다.

두 사람은 말을 몰아 여관으로 다가갔다.

여관 앞에 도착한 하르는 먼저 말에서 내려 엘리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하르.”

그의 손을 잡고 내린 엘리시아는 발이 땅에 닿자 살 것 같다는 표정을 떠올리며 여관을 올려다보았다.

“빨리 들어가자. 지금도 많이 늦었어.”

이케르를 기다리게 했다는 초조한 마음에 서두르려던 엘리시아는 하르가 앞을 막아서자 눈을 깜빡였다.

“왜?”

“넌 여기서 기다려. 내가 다녀올 테니.”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안이 어떤지 모르니까. 기다리고 있어.”

하르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 엘리시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놔두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를 데리고 나왔다.

갈색 곱슬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30대 정도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였다.

“이분이야? 날 데려다주실 분이?”

엘리시아의 물음에 하르 대신 남자가 답해왔다.

“맞습니다, 아가씨. 데이모스 공작가의 별장지기 폴이라고 합니다. 각하의 지시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각하께서는 도착하셨나요?”

“예. 점심 때쯤 도착하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폴의 대답에 엘리시아는 이케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약속 시간을 별도로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회의를 사흘 안에 끝내 달라고 뻔뻔하게 강요했던 건 그녀가 아니던가.

안전을 위해 돌아온 것도 결국은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인지 그녀는 마음이 급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이케르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만 아가씨께서 늦게 도착하시면 각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뭔가요?”

설마 오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엘리시아는 불안한 마음으로 폴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행히 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걱정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내용도 아니었다.

“각하께서 계신 별장을 둘러싸고 있는 숲이 영지 깊숙이 있다 보니 밤이 되면 야생 늑대들이 무리 지어 출몰합니다. 그래서 밤에는 말이나 마차를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별장으로 가신다면 내일 아침에나 이곳으로 돌아오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은지 확인을 받고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폴이 길게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지금 가면 오늘 못 돌아온다는 소리였다.

엘리시아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당혹감을 느꼈다.

물론 거리가 멀다 보니 하룻밤을 자고 갈 생각으로 오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별장에서 돌아온 후 여관에 묵을 생각이었지, 이케르와 함께 별장에서 밤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녀가 망설이고 있자 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말씀하시길 오시는 것이 부담스러우시면 꼭 오시지 않으셔도 된다 하셨습니다. 돌아가 계시면 올라가자마자 찾아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시아는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돌아가긴 어디를 돌아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오는데 들인 시간도 아까웠지만 어머니에 대해 듣고 싶은 마음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컸다.

그래서 그녀는 폴을 보며 말했다.

“괜찮으니 각하께 데려다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마차를 끌고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폴은 몸을 돌려 여관 뒤쪽으로 걸어갔다.

“정말 괜찮겠어?”

하르의 물음에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각하신걸. 내가 먼저 덮치면 몰라도 각하가 그러시는 일은 없을 거야. 손도 허락받고 잡으시는 분이니까.”

“그러니까 묻는 거야. 덮치지 않을 자신 있냐고.”

이게 무슨 소리야?

엘리시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제 보니 하르는 그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케르를 걱정하고 있었다.

못마땅함에 그녀의 눈매가 위로 휙 치켜 올라갔다.

“너 지금 날 뭐로 보는 거야?”

“재범의 가능성이 있는 초범.”

“…….”

하르의 말에 엘리시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다. 어쨌든 내가 했던 짓이 있으니 초범은 그렇다고 치고 재범 가능성은 뭐야?”

“얼마 전에도 네가 먼저 데이모스 공작에게 키스를 했…….”

“자, 잠깐.”

당황한 엘리시아는 재빨리 손을 뻗어 하르의 입을 틀어막았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루리엔이 그러던데. 네가 말했다면서.”

하르의 대답에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또그르르 굴렀다. 그러고 보니 실수로 루리엔에게 말한 적이 있기는 했었다.

‘그렇다고 그걸 냉큼 말하다니, 루리엔, 이 배신자 같으니라고.’

엘리시아는 속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이래서야 재범의 가능성이 있다는 하르의 말을 부인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폴이 마차를 끌고 오면서 하르와의 곤란했던 대화가 끊겼다는 것이었다.

“타십시오, 아가씨.”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폴은 엘리시아가 올라탈 수 있도록 마차의 문을 열어주고는 한발 옆으로 물러섰다.

하르가 내민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탄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구박이란 구박은 다 하더니 막상 떠날 때가 되니까 걱정이 되는지 그녀의 친우는 미간을 살짝 접은 채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다녀올게. 각하를 덮치는 일 같은 건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녀의 농담에 하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고.”

“응. 내일 봐, 하르.”

엘리시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자 잠시 침묵하던 그는 조용하게 그녀를 불렀다.

“엘리.”

“응?”

“잊지 마. 네 옆에는 나와 루리엔이 있다는 걸.”

그의 말에 잠시 굳어졌던 엘리시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알아. 각하께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충격받지 않고 잘 듣고 올게.”

그녀의 말에 그제야 안심한 듯 하르는 마차 문을 닫아주었다.

그가 물러섬과 동시에 마차가 출발했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이케르가 있는 별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갔다.

⚜ ⚜ ⚜

“아무래도 이 시각이면 엘리가 오기 힘들 것 같군.”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케르는 아쉬운 눈빛을 떠올렸다.

영지에서의 정기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는 점심도 먹지 않고 곧바로 별장으로 이동했다.

혹시라도 엘리시아가 먼저 도착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폴을 콘드라 여관으로 미리 보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그가 직접 맞아주고 싶었다.

별장에 도착한 이케르는 가져온 물품들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보기 좋게 올려두었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들은 찻잎과 쿠키, 초콜릿 등이었다.

그녀가 먼 길을 오는 만큼 허기도 느낄 거라 생각해 집사에게 준비하라고 말해둔 것들이었다.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내부를 꼼꼼히 살핀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엘리시아를 기다렸다.

하지만 오후가 다 가도록 그녀가 콘드라 여관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급한 일이 있어 늦어지나 보다고 생각한 이케르는 노을이 지기 전 폴에게 연통을 보냈다. 그가 있는 별장에 대해 경고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자의라면 상관이 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하룻밤 묵고 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수도로 올라가서 찾아가 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 그가 몸을 돌리려 했을 때였다. 허공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케르가 고개를 들자 그를 향해 날아드는 비둘기 한 마리가 보였다. 폴에게 연통을 보낼 때 썼던 전서구였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비둘기는 기다렸다는 그의 손등 위로 내려앉았다.

“수고했다.”

비둘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이케르는 비둘기의 발목에 매달린 작은 통에서 접힌 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내용을 확인한 그의 수려한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저녁을 준비해야겠군.”

몸을 돌리는 이케르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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