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엘리시아는 마차 창을 통해 스쳐 지나가는 숲의 경치를 눈에 담았다.
짙은 노을이 나뭇가지 틈 사이로 흘러내리면서 붉은빛으로 물든 풀과 이파리들이 한 폭의 명화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하지만 노을이 사그라지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그녀는 마차 창문을 닫았다.
어두워지면서 사물의 분간이 어려워 볼 것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공기가 갑자기 서늘해졌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온도가 확 내려간 것 같았다.
“숲이라 그런가? 쌀쌀하네.”
어쩌면 추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로브를 여미던 엘리시아는 주머니에 손이 닿자 멈칫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넣어 로브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였다.
“샀으니 일단 가져오기는 했는데…….”
어제 어머니가 맡겨놓은 서류를 찾으러 수도의 거리로 나갔던 엘리시아는 우연히 한 쌍의 커프스를 발견했다. 근처 보석상 진열대에 장식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 커프스를 보는 순간 그녀는 누군가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 뒤로는 무엇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보석상 안으로 들어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커프스를 사서 나온 것을 보면.
심지어 선물 포장까지 하지 않았던가.
수공예 작품이라 단 하나밖에 없다는 둥,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둥의 보석상 주인의 입에 발린 말은 한쪽 귀로 흘리면서 말이다.
괜히 샀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 엘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까지 각하께서 내게 해주신 것들을 생각해봐. 잘 산 거야. 이 정도 선물이라면 각하께서도 부담가지시지 않을 거고.”
기회를 봐서 건네주던지 몰래 놓고 오는 것도 좋겠다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 온 건가?”
엘리시아는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창문에 닿기 전 마차가 멈추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가 마차 내부로 흘러들었다.
“엘리.”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린 엘리시아는 마차 문 앞에 서 있는 이케르를 발견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길게 뻗은 수려한 눈매를 곱게 접으며 손을 내밀었다.
“도착했으니 그만 내리는 게 어떤가?”
엘리시아는 이케르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옅게 미소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째서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 건지.
못 본 지 한 달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니고, 고작 사흘 지났을 뿐인데.
“엘리?”
멍해 있던 그녀는 이케르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단단하게 잡아왔다.
고작 그것뿐인데도 가슴이 술렁여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케르의 도움을 받아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폴이 다가왔다.
“각하,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 일찍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오늘 수고했네.”
“아닙니다. 손님이 무사히 오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인 폴은 마차 문을 닫고는 마차를 몰고 떠나갔다.
사라지는 마차를 쳐다보고 있던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춥지는 않나? 걸친 로브가 얇은 것 같은데.”
“좀 춥기는 합니다. 마을과 온도 차이가 많이 나네요.”
“별장 안으로 들어가 있게. 벽난로를 피워놨으니 따뜻할 거야.”
그녀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고는 내심 놀랐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은 크고 화려한 별장이 아닌 작은 통나무집 하나가 전부였다.
별장이라기보다는 산지기들이 사용하는 집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무척이나 예쁘게 지어진 집이기는 하지만.
“각하께서는요?”
주인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려니 머쓱한 마음이 들어 엘리시아는 이케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지었다.
“지켜봐야 할 것이 있어서. 금방 따라 들어갈 테니 쉬고 있게.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지켜봐야 할 것이 있다고?
엘리시아의 예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설마 누군가 따라붙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요?”
“음?”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이케르의 눈빛에 엘리시아는 당황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니 좀 전에 지켜보신다고 하셔서…….”
“아, 그것 말이군.”
이케르는 입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러움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뭔지 알고 싶은가?”
“궁금하기는 합니다.”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별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잠깐 거기서 기다려. 보러 가기 전에 가져올 것이 있으니.”
이케르를 따라 움직이려던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말대로 가만히 있자 잠시 후 그가 손에 망토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이걸 걸치면 춥지 않을 거야.”
망토를 펼친 이케르는 그것을 엘리시아의 몸에 둘러주었다.
두툼한 천이 몸 위로 내려앉으며 은은한 우드향이 바로 코앞으로 밀려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망토를 흘러내리지 않도록 핀으로 고정하느라 가까워진 그의 얼굴이 그녀의 두 눈 가득 들어와 박혔기 때문이었다.
내리깐 길고 짙은 속눈썹 아래로 엿보이는 온화한 황금빛 눈동자도 그렇지만 높은 콧대 아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 역시 무척이나 감미롭게 보였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이케르를 쳐다보고 있던 엘리시아는 그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다 됐군.”
“……감사합니다.”
확실히 그가 가져온 망토의 효과는 놀라웠다.
조금 전까지 로브를 뚫고 옷 속으로 스며들던 한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혹시라도 그녀가 추울까 봐 망토를 단단히 여미어주는 그의 손길 덕분에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아직도 추운가?”
“이제 괜찮습니다.”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박동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엘리시아가 답하자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을 텐가?”
“예?”
“숲이다 보니 돌부리나 풀뿌리 같은 것이 많이 튀어나와 있지. 나는 익숙해서 어두워도 괜찮지만 엘리 그대는 익숙지 않을 것 같아서.”
“아닙니다. 조심해서 걸으면 됩니다.”
엘리시아는 재빨리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안 그래도 심장이 제 속도를 자꾸 이탈하는 중인데, 손까지 잡으면 아예 달려 나가버릴 것 같았다.
이케르의 금안에 살짝 아쉬움이 깃들었지만 그걸 눈치챌 만큼의 여유는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럼 조심해서 따라오게.”
몸을 돌려 걸어가는 이케르를 엘리시아는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그의 말대로 달빛에만 의존해 처음 본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 몇 번은 돌부리와 풀뿌리를 잘 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살짝 튀어나와 있는 풀뿌리를 보지 못하고 걸려 중심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어느새 뻗어온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양팔을 잡아 지탱해 준 것이다.
부드러운 저음이 그녀의 귓가에서 울렸다.
“조심해야지.”
“……감사합니다.”
이케르의 도움을 받아 바로 선 엘리시아는 몸을 흠칫 굳혔다. 팔에서 떨어져 나간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왔기 때문이었다.
“역시 잡는 게 좋겠어.”
“…….”
넘어질 뻔한 사람으로서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이케르에게 손이 잡힌 채 발걸음을 옮기면서 엘리시아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의 손에서 전해져온 따스한 온기가 차가워진 그녀의 손뿐만 아니라 가슴까지도 데운 듯했다. 조용하게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을 보면.
얼마 걷지 않아 이케르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다 왔군.”
그의 말에 고개를 든 엘리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곳에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이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지켜볼 것이 있다고?’
엘리시아가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손을 놓고 이케르는 모닥불 가까이로 다가갔다.
무엇인가를 확인한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불렀다.
“엘리.”
이케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간 엘리시아는 그가 눈짓하는 곳을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긴 쇠꼬챙이에 끼워진 두툼하게 잘린 고깃덩어리가 모닥불 옆에 꽂혀 있었다.
“지켜보셔야 한다고 했던 게…….”
“저녁거리가 타버리면 곤란하니까. 다행히 타기 전에 온 것 같군.”
쇠꼬챙이를 땅에서 뽑아낸 그는 비어있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손안에 빛으로 만들어진 작은 칼이 나타났다.
“그거 마법입니까?”
호기심이 가득 담긴 엘리시아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마법이지. 마법사가 아니다 보니 이 정도 크기밖에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나름 쓸모가 있더군.”
마법 칼로 쇠꼬챙이에 꽂혀 있는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낸 그는 칼끝으로 쿡 찍어 엘리시아에게 내밀었다.
“먹어보겠나?”
“아…… 예.”
배도 고프고 해서 엉겁결에 고기를 받아먹은 그녀는 내심 감탄했다.
어떻게 양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기는 부드럽고 잡내 하나 없는 데다 은은한 나무 향까지 배어 무척이나 맛있었다. 더 먹고 싶을 정도였다.
“맛있습니다.”
엘리시아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이케르는 다행이라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야. 열심히 구운 보람이 있군.
그의 대답에 엘리시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이거 저 때문에 구우신 겁니까?”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어.”
“…….”
부인하지 않는 이케르의 모습에 그녀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모닥불에 고기 굽는 비법을 알려주시면서 그러시더군. 적어도 이 정도 요리는 할 줄 알아야 좋아하는 여자에게 점수를 딸 수 있다고. 오늘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대체 이 남자, 연애도 처음이라면서 왜 이렇게 말을 잘하는 거야?
잠잠하게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엘리시아는 슬쩍 손을 들어 볼에 가져다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