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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76/133)

76화

예상대로 볼이 뜨끈하자 엘리시아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모닥불에서 흘러나온 빛이 자연스럽게 볼의 열기를 덮어줄 것 같았다.

이케르 역시 고기에 신경 쓰고 있어 그녀의 두근거림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고기가 꽂힌 쇠꼬챙이를 마법으로 허공에 띄운 그는 모닥불 바로 옆에 있던 큼직한 통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모닥불 위로 쏟아부었다.

통에서 쏟아져 내린 것은 흙이었다. 많은 양의 흙이 불을 덮으며 산소의 공급이 차단되자 불은 곧바로 숨을 죽였다.

이케르가 모닥불을 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시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마법으로는 불을 끌 수 없나요?”

마법을 쓸 줄 아는데 굳이 흙을 쓸 필요가 있나 싶어 그녀가 묻자 이케르는 모닥불 주변을 살피며 답해왔다.

“물의 속성이나 흙의 속성 마법을 쓸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 아쉽게도 난 빛의 속성 쪽이라 불을 피우는 건 가능해도 끄는 건 어려워.”

그의 금안은 혹시라도 살아있는 불씨가 없는지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몇 개의 불씨를 찾아내 처리한 그는 허공에 떠 있던 쇠꼬챙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녁거리도 준비되었고. 돌아가면 될 것 같군.”

고기를 든 채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 이케르를 마주보던 엘리시아는 두 눈을 깜빡였다.

인지 점은 순식간에 세 개로 늘었다.

“잠시만요.”

안 되겠다 싶어 그에게 다가선 엘리시아는 손을 뻗었다.

조심해서 손끝으로 잿가루들을 하나하나 뗀 그녀는 이케르의 입술이 깨끗해지자 뿌듯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됐습니…….”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했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입이 멈춰버린 것이다.

그 사이 매력적으로 휘어진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달싹였다.

“도와줘서 고맙군.”

분명히 단순한 말이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그런데 그의 목소리를 입혔다는 것만으로 등골에 전율이 일며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은 어째서란 말인가.

엘리시아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이대로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겨 키스를 하면…….

그녀의 앙큼한 생각은 다행히 거기서 끝났다. 이케르의 손이 움찔거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온 것이다.

“돌아갈 때도 위험할 수 있으니 잡고 가는 게 좋겠어.”

차가워졌던 손을 감싸오는 따뜻한 온기에 엘리시아는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나 정말 미쳤나 봐.’

당황한 그녀는 어딘가에 머리를 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래서야 하르가 했던 말 그대로가 아닌가. 재범의 가능성이 있는 초범이라는.

‘아무래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엘리시아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곳에 온 것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지 연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별장 안을 확인한 그녀는 또다시 당혹감에 휩싸였다.

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방과 거실, 그리고 주방이 합쳐진 형태였다. 주방 옆에는 작은 욕실이 있는 것 같았다.

“잠깐 기다려주게. 저녁을 준비할 테니.”

그녀를 테이블에 앉힌 이케르는 고기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재빨리 내부를 훑었다.

데이모스 공작의 개인별장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단출했다. 심지어 옷장조차도 없었다.

옷을 걸기 쉽도록 만들어진 나무 갈고리가 벽에 나란히 붙어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로브 역시 거기 걸려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침대가 하나뿐이잖아.’

엘리시아는 난감한 눈빛을 떠올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침대 대신 쓸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파가 있기는 하지만 남자라면 한 명 여자라면 두 명 정도 앉을 만한 크기여서 잘 수 있을 정도의 길이는 아니었다. 완전 쪼그리고 자면 몰라도.

‘바닥에서 자야겠네.’

깔고 잘 이불은 있을까 걱정하는 사이 이케르가 주방에서 나왔다. 그의 양손에는 커다란 접시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잠시 후 엘리시아의 앞에 접시가 놓아졌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이 접시로 향했다.

접시 위에는 먹기 좋게 잘라진 고기가 듬뿍 놓여있었고 옆에 샐러드, 빵이 곁들어져 있었다.

자신의 앞에도 접시를 놓은 이케르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포크와 나이프를 가져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와인 한잔할 텐가?”

“음… 예, 한 잔 주십시오.”

그의 권유에 잠시 망설이던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메인이 고기이기도 하고.

다시 주방으로 간 이케르는 와인병 하나와 잔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빈 잔을 그녀 앞에 놓아준 그는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능숙하게 따고는 잔의 반 정도만 채워주었다.

“감사합니다.”

목도 마르고 내심 긴장도 되었던 엘리시아는 잔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입 마신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향도 그렇고 맛도 무척이나 뛰어난 와인이었다.

“훌륭한 와인이네요.”

그녀의 말에 이케르는 긴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나도 좋아하는 와인이지. 그대의 입맛에도 맞는다니 다행이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식사부터 하지. 여기까지 오느라 허기졌을 텐데.”

그는 어서 먹으라는 듯 접시를 그녀 쪽으로 좀 더 밀어주었다.

엘리시아는 손을 뻗어 포크를 집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가 먹여준 한 조각의 고기 때문에 배에서 꼬르를 소리가 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말을 타고 달린 데다 또다시 마차를 타고 이곳까지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식사를 시작하자 이케르도 자신의 포크로 손을 뻗었다.

식사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와 잔 내려놓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맛있지?’

엘리시아는 고기를 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접시에 놓인 것은 고기와 샐러드, 그리고 빵뿐이었다. 후작저에서 먹는 식사와 비교한다면 무척이나 초라한 차림이었다.

그런데 주방장이 차려준 것보다 이케르가 차려준 것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고기 때문인가 봐.’

고기 하나는 정말 예술적으로 잘 구워졌다고 감탄하던 그녀는 이케르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잘 먹는군.”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자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두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애정이 느껴지는 그의 눈빛에 머쓱해진 그녀는 말을 슬쩍 돌렸다.

“고기가 정말 맛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요리에도 재능이 있으신가 봐요.”

“그런가?”

“예. 제가 느끼기에는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엘리시아의 물음에 이케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들어보지 못한 것 같군. 내가 요리한 음식을 먹은 사람은 그대가 처음이라.”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야, 이것도 내가 처음이야?’

이상하게도 입꼬리가 절로 실룩거렸다. 게다가 제멋대로 기어 올라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란 엘리시아는 재빨리 작게 헛기침을 했다.

와인을 먹어서 기분이 좋은 거라고 애써 속으로 변명하던 그녀는 문득 그에게 항상 궁금했던 것을 떠올렸다. 단둘이 있는 이런 기회가 아니면 묻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엘리시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각하.”

“둘이 있을 때는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는데. 내가 그대를 엘리라고 부르는 것처럼.”

“…….”

당황한 엘리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케르는 와인잔을 느릿하게 돌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부담스럽다면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

아니 그게 더 부담인데요?

속으로 허허 웃으며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차라리 강요를 했다면 ‘내가 왜?’라는 반발심에 그녀는 곧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슬쩍 찔러놓고서 한발 물러서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해’하고 결정권을 넘겨버리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그녀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각하께서 그동안 내게 해주셨던 것들도 있고. 단둘만 있을 때 이름을 부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 같은데.’

결국 이것저것 이유를 들어 스스로를 납득시킨 엘리시아는 흠흠 하고 낮게 헛기침을 했다. 결심은 했지만 막상 부르려니 머쓱함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케르?”

그런데 그녀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의 이름은 무척이나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여러 번 불러본 것처럼 말이다.

어째서 이렇게 익숙하게 나오는 건지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말에 흠칫 몸을 굳혔다.

“그날 밤 이후로 처음 듣는군. 그대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제야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왜 익숙하게 느껴지는지 깨달았다.

그날, 그와 밤을 보냈을 때 쾌락에 젖어 미친 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동시에 그와 했던 행위들도 떠올라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도 생생히.

‘망할.’

얼굴이 화끈하고 달아오르자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시선을 피한 채 애꿎은 고기와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댔다.

그런 기억을 떠올린 다음에 그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찍어댄 모양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포크에는 고기와 샐러드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이거 어쩌지?’

다시 빼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다고 먹자니 한입에 넣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난감한 시선으로 엘리시아가 포크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이케르가 손을 뻗더니 그녀가 쥔 포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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