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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78/133)

78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 사고가 일어났지.”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황후와 라세트 공작이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 차례대로 떠올랐다.

[세레나가 그러더군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재력으로 귀족파를 흔들고 있다고. 그래서 그들이 모르게 투자하고 싶다고.]

[그럼 후작은 제 어미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되겠지요. 그러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들의 말과 사흘간 확인했던 것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케르 덕분에 알게 된 정황이 합쳐지자 그녀가 상상했던 최악의 가정이 현실로 다가왔다.

‘라세트 공작이 눈치챘던 거야. 어머니가 귀족파를 떠나려는 걸.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 마차사고를 일으킨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라세트 공작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자신이 만들어 낸 것 같은 그런 말을.

‘이상하다 생각했어. 없던 빚이 갑자기 생긴 것도 그렇고.’

그 모든 것이 그녀의 가문을 손에 넣기 위한 라세트 공작의 계략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절로 이가 악물렸다.

지금까지 꾹꾹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엘리시아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에 격한 분노가 일렁임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 잡혀 있던 와인 잔이 산산이 깨져나갔다.

잔에 가득 들어 있던 와인이 그녀의 몸과 테이블 여기저기로 튀며 깨진 유리 조각 중 하나가 그녀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엘리!”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이케르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급히 다가오는 사이 엘리시아는 미동조차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친 곳에 대한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온몸을 태울 듯 격렬하게 솟구쳐 오른 감정에 그대로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오랜 시간 스스로 지켜왔던 맹세는 엘리시아를 울게 놔두지 않았다. 그녀의 입이 일자로 다물리며 보랏빛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엘리시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이케르는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손을 살폈다.

“이런.”

새하얗던 손바닥이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은 것을 확인한 그의 미간이 무섭게 좁아 들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냅킨을 들어 그녀의 손바닥을 꾹 눌렀다. 지혈과 동시에 피를 닦아내 상처의 정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냅킨을 떼자 유리 조각에 베인 상처에서 송골송골 붉은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깊게 베인 것 같지 않자 이케르의 금안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지혈이 되도록 상처 부위를 냅킨으로 단단하게 묶은 그는 고개를 들어 엘리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무서운 눈으로 허공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충격이 많이 컸나 보군.’

새하얀 그녀의 볼에 난 작은 상처를 뒤늦게 발견한 이케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직 사용하지 않은 냅킨을 들어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피를 닦아주었다.

사흘 전 엘리시아가 다음날 방문해 줄 수 있느냐고 하르를 통해 말을 전해왔을 때 그는 물었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알아야 필요한 대답을 준비하지 않겠냐고.

그러자 하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해주었다.

[엘리가 황비와 라세트 공작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직감했다. 황비나 라세트 공작 중 누군가의 입에서 전대 카멜리아 후작의 사고사와 관련된 말이 나왔다는 걸.

그런 위험한 이야기를 대놓고 입에 담을 리는 없으니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말을 했을 거라고.

엘리시아의 반응을 보면 그가 예상한 대로인 듯했다.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오는 그녀의 볼을 냅킨으로 눌러 지혈하면서 그는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엘리.”

“…….”

엘리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에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엘리.”

이케르는 다친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서 한 번 더 불렀다. 그러자 굳어져 있던 그녀의 몸이 움찔하더니 고개가 천천히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는 감정을 읽어내기조차 힘들 정도로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괜찮은 건가?”

“……아니요. 괜찮지 않습니다.”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대답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일단 안도했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어.”

엘리시아의 손목을 잡은 이케르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켰다.

깨진 유리 조각이 그녀의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어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더 이상 다치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왔다.

엘리시아를 소파에 앉힌 이케르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올려다보았다. 그래야 시선을 맞추기가 쉬웠다.

여전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 짙고 어두워져 있었다. 남색에 가까울 정도로.

“…….”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던 그는 자신의 손바닥에 미세한 떨림이 전해오자 눈썹을 꿈틀했다.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그녀의 손목이 떨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떨림이었다.

그런데 떨리는 것은 그녀의 손목만이 아니었다. 작고 둥근 어깨도, 팔도, 다리도 모두 떨리고 있었다.

이케르는 다시 고개를 들어 엘리시아와 눈을 마주했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그녀의 눈빛 깊은 곳에서 달아오른 용암처럼 일렁이고 있는 고통과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터질 것 같은 감정을 꾹 눌러 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곤란하군.’

그의 금안에 난감한 눈빛이 깃들었다. 보통 사람이 감정이 격해지면 화를 내거나 울거나 소리를 치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당연히 엘리시아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성격상 눌러 참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멱살을 틀어쥐면 몰라도.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눈으로 엘리시아를 쳐다보던 이케르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볼을 감싼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화내고 소리 지르기 어렵다면 차라리 우는 것은 어떤가?”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으니 우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울기 시작하면 나머지 감정들도 눈물에 섞여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올 것이고.

“엘리?”

그가 부드럽게 부르자 허공을 향해 있던 엘리시아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에게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가만히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케르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며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례식 날 두 분의 관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까지 그 아이들 앞이 아니면 울지 않기로.”

말을 마친 엘리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날,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느꼈던 그날, 자신들의 슬픔을 누르고 그녀를 위로해주는 친우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그녀는 부모님께 맹세했다.

카멜리아 가문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기 전까지는 울지 않겠다고. 울어도 이 아이들 앞에서만 울겠다고.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녀에게 몇 번의 역경과 고난이 닥쳐왔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날의 맹세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맹세는 반대로 그녀의 족쇄가 되어 버렸다. 계속해서 감정을 억누르다 보니 루리엔과 하르가 없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울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고통과 분노에 휩싸인 심장이 얼어붙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어떻게든 감정을 풀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엘리시아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감싸져 있는 그녀의 한쪽 볼처럼 반대편 볼도 커다란 손이 감싸왔다.

양 볼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놀라 눈을 들자 따스한 금안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가 친우들 앞에서만 울기로 맹세한 것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들뿐이었기 때문이겠지.”

귓가에 울리는 이케르의 깊고 낮은 목소리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엘리시아는 홀린 것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거기에 한 사람 더 추가해주면 좋겠군.”

“……?”

의문 어린 눈빛을 떠올린 그녀에게서 그는 시선을 떼지 않으며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치지 않은 손이었다. 그리고 그 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가져갔다.

정확히 심장이 뛰고 있는 위치에 그녀의 손을 누른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친우들은 오랜 시간으로 그대의 신뢰를 얻었지만 나는 내 심장으로 그대의 신뢰를 얻고자 해.”

“……예?”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뇌신경이 위태롭게 달아올라서인지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그녀가 이해할 필요 없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대를 배신하고 싶어도 배신할 수가 없어. 그대가 이미 내 심장을 가져가 버렸으니까.”

“……!”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군. 그렇게 된 것이. 그리고 이제는 그대가 아니면 뛰지 않아. 그대의 손에 길들어 버려서.”

담담한 그의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그의 심장박동은 무척이나 빠르고 거칠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심장에서 들려오는 울림이 그녀의 손을 통해 가슴으로 전달되면서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심장이 녹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공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멍해져 있던 엘리시아의 귀에 조용히 그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러니 내게도 자격을 주지 않겠어? 그대가 내 앞에서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자격을.”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염원을 담은 그의 말은 가슴으로 흘러 그녀의 심장을 감싸고 있던 나머지 얼음마저 녹여버렸다.

두근. 두근.

풀려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점점 더 커지는 심장박동 소리가 엘리시아의 머릿속을 빠르게 채워갔다.

그리고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만큼 가득 찬 순간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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