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밤이 깊어가는 시각, 이케르는 황제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내일 오후에나 올라올 예정이었던 그가 지금 황궁에 있는 것은 정기회의와 마찬가지로 영지 시찰 역시 빠르게 진행해 일정을 하루 앞당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시찰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듯 움직였다.
평소와 다른 살인적인 스케줄에 가신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을 보면서도 그는 그들을 배려해 줄 만한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수도에서 날아든 소식이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으니까.
이케르가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문 앞에서 서 있던 시종장이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황제는 집무실 책상이나 소파에 앉아 있지 않고 창가에 서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하다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황제는 몸을 돌려 이케르를 쳐다보았다.
“자네도 소식을 들은 것 같군.”
“어제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자네는 선견지명이 있는 모양이야. 영지 일정을 이틀이나 앞당겨 끝내다니.”
엘리시아를 위해서 이틀을 앞당겼던 거지만, 이케르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라세트 공작이 나와 전면전을 할 모양이더군. 카멜리아 후작을 더스틴의 약혼녀로 내세우다니. 일을 치르기 전에 귀족파를 하나로 묶겠다는 속셈이겠지.”
못마땅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집무실 책상으로 이동한 황제는 자리에 앉아 입매를 비틀었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은 이케르를 향하고 있었다.
“짐이 웬만하면 자네의 사생활을 지켜주고 싶었네만 더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니 말해보게. 카멜리아 후작과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가?”
“잘되어 가고 있습니다.”
“약혼은 자네가 아닌 딴 녀석과 하는데도 말인가?”
자신의 아들을 딴 녀석이라고 칭하면서까지 도발하는 황제의 말에 이케르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잠시 침묵했던 그는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라세트 공작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리라는 건 폐하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표정이나 눈빛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젊은 공작의 목소리에는 미세하게 불쾌감이 깔려 있었다.
심기가 불편한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에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진 황제는 이전보다는 느긋한 기분으로 다시 말을 던졌다.
“짐작과 확신은 다르니까. 난 후작이 자네에게로 돌아섰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네. 설마 아직까지도 쫓아만 다니는 건 아니겠지?”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과 달리 황제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라세트 공작 쪽의 일도 중요했지만 눈앞에 서 있는 젊은 공작의 연애에도 그는 관심이 많았다. 공작의 연애가 곧 도박의 결과와도 연결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공적인 일을 이용해 사적인 호기심까지 한번에 해결하려는 황제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이케르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젊은 공작의 새하얀 셔츠의 소맷부리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이자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황금으로 빚어낸 섬세한 세공 위에 붉은 루비가 박혀 있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화려한 커프스였다.
평소 이케르가 하고 다니던 무채색의 커프스와는 느낌부터가 너무나도 다른 것으로 누가 봐도 선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 선물을 한 상대가 누구인지도.
“이걸로 답이 되겠습니까?”
길게 말하기 싫다는 듯 선물 받은 것을 보여주는 이케르를 보며 황제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살다 보니 이케르 자네가 선물 자랑하는 걸 다 보는군. 그래 그건 언제 받은 건가?”
“이틀 전에 받았습니다.”
“음? 자네 그때 영지에 있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황제의 눈빛에 의아함이 어렸다.
선물에 발이 달려 스스로 갔을 리는 없을 테니 엘리시아가 직접 건네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케르의 영지까지 내려갔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래서 황제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후작이 거기까지 내려갔단 말인가? 단순히 그 선물을 주려고? 허허, 언제 두 사람 그렇게 가까워 진 건가.”
진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니냐며 짓궂게 웃던 황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곧이어 들려온 이케르의 대답 때문이었다.
“선물을 주러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대 카멜리아 후작에 대해 물으러 왔었습니다.”
“전대 카멜리아 후작에 대해?”
“라세트 공작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로 인해 전대 카멜리아 후작의 마차 사고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답해주었나?”
“제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대답해주었습니다.”
“후작의 반응은?”
“폐하께서 짐작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이케르의 말에 황제는 침묵한 채 채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느릿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황제가 생각에 잠겼을 때 나오는 버릇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케르는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이상 후작이 라세트 공작 쪽으로 돌아설 일은 없겠군. 혹시라도 이케르 자네와 감정적인 문제가 생겨도 말이야.”
잘 나가다 또 쓸데없는 말씀을 사족으로 붙이시는군.
여전히 짓궂음이 어려 있는 황제의 목소리에 이케르는 눈매를 살짝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너무 그렇게 장담하면 안 된다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남녀 사이의 일이거든. 뭐, 어쨌든 앞으로 지켜보면 될 일이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원인부터 확인하려 합니다.”
“그래야겠지. 그래야 후작을 무엇으로 협박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헬리오스의 수장과 만날 생각입니다.”
이케르의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네. 수사국만으로 베라무스를 상대한다는 것은 어려울 테니. 라세트 공작도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황제가 라세트 공작에게 손을 대지 못하는 건 베라무스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은 베라무스가 거대한 암흑조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들의 전부는 아니었다.
베라무스는 정확히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어둠의 경로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뒷골목의 지배자들, 그리고 제국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인재와 병력을 끌어들이는 포섭자들.
수사국의 힘만으로 그 두 가지를 모두 다 막기는 어려웠다. 그렇기에 이케르는 헬리오스를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황제는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이케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불리한 상황이 분명한데도 조각 같은 얼굴에는 조금의 불안감도 없었다.
이 전쟁에서 당연히 승리할 거라 자신하는 것처럼.
그 패기와 자신감에 휩쓸려 졸지에 취미에도 없는 도박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느슨하게 입매를 늘어트린 황제는 입을 열었다.
“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어차피 자네를 믿고 시작한 판이니 마음껏 패를 펼쳐보게. 베팅은 짐이 할 테니.”
그것은 헬리오스를 만나 거래를 해도 된다는 황제의 허락이었다. 또한 그 거래에 어떤 조건을 내밀어도 허용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폐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신이 원하던 말을 얻어낸 이케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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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의 독대를 마친 이케르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말에 올랐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밤하늘로 향했다.
‘지금쯤 자고 있겠군.’
달이 중천을 넘어선 것으로 보아 적어도 자정은 지난 것 같았다. 엘리시아를 만나러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영지에서의 일정을 조금 더 당겼어야 했나.’
두세 시간이라도 더 줄였다면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라세트 공작에게 어떤 협박을 받은 건지도 물어볼 수 있었을 테고.
길쭉하고 사내다운 손가락이 소맷부리에 달아놓은 커프스를 매만졌다.
엘리시아에게 선물 받은 이후로 그는 그것을 몸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었다.
내일 저녁까지 기다리기가 무척이나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케르는 공작저를 향해 말을 몰았다.
한 시간 가까이 달려 그가 공작저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익숙한 살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르가 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케르의 미간이 좁아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내일 저녁 그는 엘리시아를 찾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루 전부터 하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반드시 그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엘리시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눈살을 찌푸린 이케르는 곧바로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게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살기가 날아드는 곳을 향해 그가 말을 몰고 가자 달빛 아래 서 있는 하르의 모습이 보였다.
말에서 내린 그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는 하르를 보며 가장 궁금한 것부터 입에 담았다.
“엘리는 괜찮은가?”
“기분이 좋지 못한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하르의 대답에 이케르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게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본인이 그렇게 우기고 있으니 그렇다고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마디로 전혀 괜찮지 않다는 소리였다.
엘리시아답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케르는 이어진 하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보다 엘리가 각하께 급하게 전해달라는 말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뭔가?”
“찾아오시지 말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