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33)

86화

“아리아,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정확하게 대답해줘요.”

엘리시아의 진지한 눈빛과 표정에서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눈치챘는지 아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말씀하세요.”

“최근에 돌로렌스 가문에서 투자한 사업, 아리아가 직접 찾아내서 투자한 건가요?”

“저희 가문에서 최근 투자한 사업이라면 카롤라 광산 투자 사업 말씀인가요?”

“맞아요.”

“그 사업이라면… 제가 직접 찾아낸 건 아니고 추천받아서 투자했어요.”

“누구에게요?”

“줄스턴 자작께서 추천해주셨어요. 수익률이 좋은 사업이라고 해서 확인해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예상했던 대로의 답이 아리아에게서 나오자 엘리시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제 그녀는 몰리드 백작이 주최한 정기 모임에 참석했었다. 토론회라고도 할 수 있는 작은 소모임으로 하머스 백작이 빠지지 않고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시아 역시 필요에 따라 가끔 참석하던 행사였기에 의심받을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계획했던 대로 하머스 백작을 만났다.

엘리시아는 그에게 아리아에게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하머스 백작의 대답 역시 아리아와 같았다.

그녀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줄스턴 자작이 일부러 하머스 백작과 아리아를 함정에 빠트릴 리는 없어. 줄스턴 자작 역시 누군가에게 사업을 소개받았을 수도 있는 거잖아.’

다른 가문들과 더불어 줄스턴 가문 역시 오랜 시간 그녀의 가문을 충실하게 따랐던 귀족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엘리시아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나머지 사람들도 만나 확인을 해야겠어. 하르에게도 헬리오스를 통해 알아봐 달라고 하고.’

줄스턴 자작을 가장 마지막에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아리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혹시 그 사업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눈치가 빠른 돌로렌스 백작가의 젊은 가주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아직 알릴 필요는 없겠지. 빠져나올 방법도 찾지 못했는데 괜히 불안하게 만들 필요 없으니.’

하머스 백작에게 했던 것처럼 옅은 미소를 지은 엘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살펴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리아, 추가 투자는 일단 하지 말아줄래요? 내가 그랬다고는 하지 말고요. 확인하고 나면 알려 줄 테니.”

“그럴게요, 후작님. 확인되면 꼭 알려주셔야 해요.”

“물론이에요. 그리고 갑작스럽게 부탁했는데도 이렇게 시간을 내줘서 미안하고 고마워요.”

엘리시아의 인사에 이번에는 아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후작님이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야죠. 제게 더 알고 싶으시거나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음, 그럼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요. 내가 먼저 나갈 테니 조금만 더 있다가 나와 줄래요?”

파우더 룸 밖에는 분명 감시인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같이 나가면 곤란했다.

다행히 아리아는 엘리시아의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걱정 마시고 먼저 나가세요, 후작님.”

“정말 고마워요, 아리아.”

엘리시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확인할 것을 다 확인했으니 의심을 받기 전에 그만 돌아가야 했다.

몸을 돌려 룸을 빠져나가려던 그녀의 몸이 순간 멈춰 섰다. 등 뒤에서 들려온 아리아의 말 때문이었다.

“알고 계시죠? 저희는 항상 후작님 편이라는 거.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찾아볼게요”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진심 어린 목소리.

엘리시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그러니 라세트 공작이 저들을 인질로 잡은 것이다. 내가 저들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한 엘리시아는 눈을 뜨고 아리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을 안심시키는 부드러운 미소만이 머금어져 있었다.

“고마워요, 아리아.”

⚜ ⚜ ⚜

미술관에서 돌아온 엘리시아는 점심을 먹고 외출 준비를 했다.

오후 3시에 더스틴과 오페라 관람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더스틴의 일방적인 약속이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간소하게 준비를 마쳤다. 마음에 들지도 않는 놈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서 뭐 한단 말인가.

주인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시녀들 역시 기본적인 화장과 머리 손질만 해주고 물러갔다.

“그 미친놈에게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좋겠네. 아니면 배탈이라도 왕창 나던지.”

엘리시아는 화장대 의자에 앉은 채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라세트 공작 때문에 덧씌워진 목줄로 인해 화가 나 있는데 이케르까지 만나지 못하게 되자 분노가 중첩된 것이다.

그녀는 문득 이케르의 개인 별장에서 떠나올 때의 일을 떠올렸다.

미리 준비해 간 선물을 건네고 반응을 보기가 쑥스러워 살짝 눈을 내리깔았을 때 그가 어떻게 했던가.

쪽 소리가 났던 입맞춤도 그렇지만 그의 길고 수려한 눈매가 매력적으로 접히며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는 아직도 그녀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정말로 기쁜 듯한, 환한 미소였다.

[최대한 빨리 올라가지.]

귓가에 내려앉았던 이케르의 낮고 깊은 목소리를 떠올리자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엘리시아는 헛기침을 했다.

손부채질을 하던 그녀는 슬쩍 화장대 거울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새하얀 볼엔 홍조가 깃들어져 있었다.

어쩐지 민망해져 그녀는 두 손으로 볼을 감싸고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해하지 않으셨다니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라세트 공작이 붙인 감시인을 눈치챈 엘리시아는 하르에게 이케르를 만나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혹시라도 그녀를 찾아왔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까 봐 걱정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오해를 하는 것이 싫었다.

이케르를 만나고 온 하르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고 했다. 오해는커녕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먼저 알아채더라고.

이케르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엘리시아는 마음이 쓰였다. 별장에서 그가 했던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족했다고 하니 앞으로 다른 건 사용하지 않으면 해서. 그대가 원하면 어쩔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질투를 하게 될 것 같아.]

그 남자가 질투라.

문득 그녀는 궁금해졌다.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조절하는 그가 질투를 하면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동시에 그가 보고 싶어졌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보지 못하게 되니 더 보고 싶은 것 같았다.

“커프스가 잘 어울리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는데.”

엘리시아가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2황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망할. 미친놈은 배탈도 안 나나.

치밀어 오르는 욕을 삼키며 일어서려던 그녀의 눈에 보석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3황자의 탄신연회 전날 이케르가 선물해준 귀걸이와 목걸이가 들어있는 상자였다.

상자를 가만히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천천히 상자로 손을 뻗었다.

⚜ ⚜ ⚜

말끔하게 올린 황금빛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금빛 자수가 새하얀 슈트 위에서 화려하게 반짝였다.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랜드 중앙계단 아래에 서서 엘리시아를 기다리던 더스틴은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를 발견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굵게 웨이브 진 붉은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트리고 크림색의 외출용 드레스를 입은 엘리시아는 역시나 아름다웠다.

오페라고 뭐고 때려치우고 끌고 들어가 침실에 틀어박히고 싶을 만큼.

‘지금은 참아야겠지. 나중에 온전히 내 것이 되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을 테니.’

불쑥불쑥 치솟는 음습하고 진득한 욕망을 눌러 감춘 채 엘리시아의 머리끝부터 찬찬히 훑어내러 오던 그의 시선이 그녀의 귀걸이에서 멈췄다.

“…….”

미세하게 찌푸려졌던 미간은 엘리시아가 한 목걸이에서 한 번 더 찌푸려졌다.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 3황자의 탄신 연회에서 엘리시아가 했던 장신구였다.

라시안 그 어린 새끼를 빛내기 위해 부황이 제국 최고의 장인에게 주문해서 선물했다던가.

‘하필이면 저런 걸 하고 나오다니.’

더스틴의 입매가 절로 비틀렸다.

많고 많은 장신구 중에 왜 하필이면 저것이란 말인가.

그 사이 엘리시아는 어느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억지로 약혼하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척이나 무표정한 표정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녀의 인사에 그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장신구도 표정도 모두 못마땅했지만 어쨌든 그녀를 자신의 옆에 세운 데다 강제로 약혼을 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라 어느 정도는 참아주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점잖게 행동하라는 공작의 당부도 있었고.

“오늘도 예쁘군. 그럼 갈까?”

더스틴은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어진 엘리시아의 행동에 그는 짙은 눈썹을 꿈틀했다.

팔짱을 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새하얀 장갑 낀 손을 그의 팔에 올릴 뿐이었다. 그것도 마지못해 잡는다는 표정으로.

더스틴의 얄팍한 인내심이 끊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억지로 팔짱을 끼게 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으르렁대듯 속삭였다.

“그대가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러니 빨리 적응하는 게 좋을 거야.”

“…….”

그의 위협적인 말에 엘리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손을 빼지 않는다는 것에 더스틴은 그럭저럭 만족했다.

그는 그녀를 끌다시피 데리고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도 창밖으로 시선을 둔 엘리시아가 입을 꾹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자 그는 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

오페라 극장에서도 그녀가 이런 식으로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했다. 억지로 약혼했다고 광고하는 셈이 아닌가.

결국 더스틴은 라세트 공작이 준비해준 무기를 꺼내들었다.

“아무래도 어느 가문이든 하나가 무너져야 입을 열 것 같군.”

창밖을 향해있던 엘리시아의 시선이 빠르게 그에게로 향했다.

화가 난 듯 짙어진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한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대와 가장 친한 가문이 어디더라. 돌로렌스 백작가였던가? 그 당돌한 백작 계집이 가주인.”

“……손대지 마십시오.”

드디어 엘리시아의 입이 열리자 더스틴의 입꼬리가 좀 더 위로 올라갔다.

“그럼 말을 잘 들어야지. 그대를 따르는 가문들의 목숨 줄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 텐데.”

“…….”

“극장에 도착하면 웃어. 웃음이 나오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라고. 약혼녀 역할을 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하란 말이야.”

위협하듯 으르렁대는 그의 협박에 침묵했던 엘리시아는 눈을 내리깐 채 나직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분노와 짜증이 사라지고 체념이 대신 자리한 그녀의 눈빛을 보며 더스틴은 기분이 그나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계속해서 굴복시키고 좌절시키면 제까짓 것이 어쩌겠는가. 그래 봐야 계집이니, 결국은 그의 손에 들어올 터였다.

하지만 극장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린 순간 그는 다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비슷하게 도착한 마차에서 내리는 한 사내로 인해.

말끔하게 넘겨 올린 검은 머리카락, 조각 같은 얼굴, 검은색 슈트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데이모스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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