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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133)

88화

싫다고 해서 엘리시아가 그의 손을 뿌리치면 마차에서처럼 또다시 다른 가문들을 들먹이며 협박을 해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점잖게 굴고 있기도 하고.

‘하기야 저 미친놈 성격에 침대로 들어오라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지.’

더스틴 같이 성격 더러운 인간이 스스로를 제어할 리 없으니 라세트 공작이 그녀를 대하는 행동에 있어 주의를 준 것이 분명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라세트 공작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능숙하다고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목을 조르면서도 숨 쉴 틈은 남겨두어 발악을 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더스틴이 그녀를 강제로 취하려 했다면 그녀도 가만있지 않겠지만 그녀의 친우들이 먼저 치고 나갈 것이 뻔했다.

그 끝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그녀를 지키려 하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결말이라고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친우들과 함께 악당을 물리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작은 소망이 있었으니까.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손 좀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엘리시아는 더스틴이 그녀의 손을 만지게 내버려 둔 채 무대에 집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매가 또다시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손을 만지던 더스틴의 손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소매 속으로 은근슬쩍 들어와 손목의 여린 살결을 더듬은 것이다.

명백한 의도를 띤 그 느릿한 움직임에 엘리시아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더스틴의 손을 섣불리 뿌리치지는 못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뿌리치면 이 미친놈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 하늘은 그녀를 저버리지 않았다. 때마침 주연배우의 마지막 노래가 끝난 것이다.

엘리시아는 다른 관중들처럼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녀의 손은 자연스럽게 더스틴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옆에서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극이 끝나면 당연히 박수를 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무대 예절이고 매너였다.

가장 늦게까지 박수를 치고 그녀가 앉자 더스틴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빈정거리는 목소리였다.

“아주 열심이군. 손바닥이 닳아 없어지겠어.”

“훌륭한 공연이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제 손바닥이 보기보다 튼튼해서요.”

솔직히 손바닥이 좀 얼얼했지만 엘리시아는 더스틴을 마주보며 아닌 척 뻔뻔하게 답했다. 그러자 곧바로 직설적인 말이 돌아왔다.

“내 손길이 싫었던 것은 아니고?”

당연히 싫지. 너라면 좋겠냐?

엘리시아는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꾹 눌러 참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한 채 대답하지 않자 못마땅한 듯 입매를 비튼 더스틴이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서로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며 뜨거운 숨결과 함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 정도는 익숙해지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언제까지 내 인내심을 시험할 생각이지?”

“…….”

더스틴이 분노를 드러내면서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날 선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타고 흘렀다.

절대 익숙해질 수 없을 거라고 속으로 욕하며 엘리시아는 눈을 내리깔았을 때였다. 마침 다행히 그녀를 구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멜리아 후작님, 안에 계세요? 저 실피르 몬트레에요.”

더스틴의 미간이 바로 찌푸려지며 엘리시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무섭게 문을 노려보고 있던 그는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오자 이를 으득 갈고는 잡고 있던 엘리시아의 턱을 놔주었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군.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지. 다녀와.”

“……알겠습니다.”

굴욕감을 눌러 참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엘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실피르가 기다리는 문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케르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만약 그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실피르를 보낸 것이라면 그 역시 자리를 비울 터였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몸을 조금 더 틀었는지 아까와 달리 뒷모습만 보이는 것을 빼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움직일 생각 역시 없어 보였다.

‘역시 내가 잘못 봤던 건가?’

이케르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실망감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고서 엘리시아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실피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서 있었다.

“카멜리아 후작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실피르는 그녀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아왔다. 그러면서 더스틴에게 인사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작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더스틴은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살짝 들어 보였다. 허락은 했지만 그녀를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은 듯했다.

그런 그를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더스틴의 시선이 어딘가 특정한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저 미친놈이 어딜 보고 있는 거지?’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 실피르가 손을 잡아왔다.

“어서 가요, 후작님. 쉬는 시간은 길지 않단 말이에요.”

“……그래요. 실피르.”

실피르의 손에 이끌려 박스석을 나가면서 엘리시아는 재빠르게 더스틴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가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그 대상을 확인한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놀랍게도 더스틴은 이케르를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엘리시아는 섬뜩함을 느꼈다.

‘설마 함정이었던 건가?’

더스틴이 예비 약혼자로서의 너그러운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실피르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이케르와 몰래 만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일지도.

굳어진 그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이케르도 알고 가만히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적어도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움직이는 남자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엘리시아는 흠칫 놀랐다. 어느새 그녀는 실피르에게 이끌려 프라이빗 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프라이벳 룸은 귀족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극장마다 여섯 개가 구비되어 있었는데 작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룸이 달랐다.

실피르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로얄룸으로 왕족 또는 공작위 이상의 귀족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나의 거실과 방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삼촌이 미리 잡아놓으셨더라고요.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가는 실피르를 쳐다보던 엘리시아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또 하나의 로얄룸으로 향했다.

이 룸을 이케르가 빌렸다면 저 룸은 분명 더스틴이 빌렸을 것이다.

그런데 더스틴이 이곳으로 오지 않고 박스석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녀의 가정에 확신을 더하게 했다.

‘함정이 분명해. 나와 이케르를 노린 함정.’

미친놈이 감도 좋다고 속으로 욕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실피르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후작님?”

실피르는 왜 들어오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

엘리시아가 겸연쩍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실피르는 문을 닫고 안쪽에 있는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이 방에 잠깐 들어가 계세요. 저는 이야기하면서 마실 음료를 좀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몬테르 영애.”

엘리시아는 별생각 없이 실피르가 열어준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실피르가 닫았나 싶어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 기다렸다는 것처럼 누군가가 뒤에서 부드럽게 안아왔다.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어졌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당혹감을 띠고 또르르 굴렀다.

그녀의 몸을 감싸오는 팔도 체격도 이케르가 분명한데 그 특유의 우디향이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여기에 있을 리 없었다.

당황한 그녀는 하르에게 배웠던 대로 두 손을 내리고 오른쪽으로 몸을 빼려 했다. 상대의 팔과 그녀의 몸 사이에 공간이 나오면 급소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엘리시아의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익숙하다 못해 이제는 그리워진 깊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은 것이다.

“엘리.”

그녀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이케르의 목소리였다.

생각지 못한 목소리에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어졌다.

“이케르?”

엘리시아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단 말인가. 더스틴이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는데.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군. 나도 모르게 먼저 손이 나가버려서. 그대가 많이 그리웠거든.”

멍해 있던 엘리시아는 따스한 숨결이 귓가에 닿아오며 저음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귀에 감기자 지금 이 상황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정말 그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는 급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깊고 매력적인 눈매 속에서 빛나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와 시선을 맞춰왔다.

걱정과 애정이 듬뿍 담긴 따스하고도 온화한 눈빛을 띤 채.

“……!”

그를 보는 순간 엘리시아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뇌가 움직이기 전에 이미 그녀의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이케르의 품속으로 파고든 그녀는 탄탄하고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두 팔이 단단하게 그녀를 안아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위로하듯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것만으로도 더스틴을 상대하느라 날 섰던 신경이 누그러지며 꽉 막혔던 가슴 역시 조금이나마 트이는 것 같았다.

이제야 숨을 쉴 것 같다고 생각하던 엘리시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이케르에게 다급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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