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그 미친놈이 감시하고 있어요.”
“미친놈이라면 2황자 말인가?”
제국의 황자를 스스럼없이 미친놈이라 부르는 그녀가 귀여운지 이케르의 금안에 웃음기가 깃들었지만, 마음이 다급한 엘리시아는 미처 보지 못했다.
“예. 제가 자리에서 나올 때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몬테르 영애의 부탁을 허락한 것도 의도가 있어서인 것 같았어요. 그러니 당신이 자리를 비운다면 바로 의심할 겁니다. 어서 자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만나자마자 헤어지는 건 그녀로서도 싫었지만 그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더스틴이 눈치채는 것만큼 최악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었음에도 이케르는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도리어 더 단단하게 안아오는 것이 아닌가.
“이케르?”
당황한 엘리시아가 이케르를 올려다보자 그는 수려한 눈매를 부드럽게 접었다.
“걱정할 것 없어. 2황자는 내가 자리에 앉아있다고 생각할 테니.”
“그게 무슨……?”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춘 이케르는 입술을 옆으로 옮겨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장난기가 깃든 목소리였다.
“그대가 나오면서 본 사람이 정말 나였나?”
“예?”
“정말 나였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 묻고 있네.”
“설마……!”
엘리시아는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동시에 세피르에게 이끌려 나올 때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더스틴이 이케르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녀가 본 것은 이케르의 뒷모습뿐이었다. 옆모습도 아닌 뒷모습.
그것이 정말 그였냐고 묻는다면 엘리시아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이케르였다는 기억만 믿고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아니, 그 상황이었다면 그녀가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더스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지금도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이케르라고 생각하고 시선을 떼지 않고 있겠지.
하지만 이케르는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말하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옅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남자에게 이런 짓궂은 면도 있었던가?’
조금 전 그녀가 다급히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평소 그의 점잖은 성격을 생각한다면 대타를 놔두고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바로 대답이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이케르는 그러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질문을 통해 그녀가 스스로 대답을 찾게 했다.
‘관계가 바뀌어서인가. 좀 더 편하게 대해주시는 것 같은데….’
이런 것도 새롭고 좋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 미친놈, 아니 2황자가 당신을 감시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까?”
“2황자의 성격이라면 그럴 거라 생각했네.”
“그래서 일부러 몬테르 양을 데려오신 거군요. 그럼 제가 당신과 만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몬테르 양의 부탁을 2황자가 들어줄 테니까요.”
“그대의 추측이 맞기는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아. 세피르는 그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어. 날 도와주는 대신 오페라가 끝난 후 2시간은 온전히 그 아이에게 주기로 했지.”
“잘하셨습니다. 어차피 감시가 딸려서 만날 수도 없었을 거예요. 지금이야 자신과 같이 있으니 감시를 물렸지만요. 그것도 이미 다 계산하신 거지요?”
“일단은.”
아, 진짜 이 매력적인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엘리시아는 가슴속에서 울컥하고 솟구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
더스틴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의 품이 너무나도 따스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의 가슴에 볼을 대고 규칙적인 심장 고동 소리를 듣고 있던 엘리시아는 문득 궁금해져서 고개를 빼꼼 들고 물었다.
“그럼 그건 누굽니까? 당신 대신에 앉아 있는 사람이요.”
“다행히 수사국 직원 중에 나와 키도 체격도 비슷한 자가 하나 있더군.”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설마 수사국을 다 뒤진 겁니까?”
“그런 건 그대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그보다 귀족들은 다 만나본 건가?”
능숙하게 말을 돌린 이케르의 입술이 또다시 그녀의 귓불에 닿았다.
자신이 선물한 귀걸이를 피해 부드럽게 귓불 끝을 물어오는 그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얕은 신음을 뱉으면서 엘리시아는 정말이지 그답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생색낼 만한 일조차도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려하지 않는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한한 애정으로 그는 그녀를 착실하게 녹여가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아니, 이미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지만.
“줄스턴 자작 한 사람 빼고는 다 만났습니다. 다들 줄스턴 자작이 사업을 권유했다고 하더군요.”
“줄스턴 자작과도 만날 생각인가?”
귓가에서 속삭여서일까, 이케르의 깊고 낮은 목소리는 전율이 되어 엘리시아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반응하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합니다. 어쨌든 그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니까요.”
엘리시아의 대답에 이케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케르?”
왜 그러나 싶어 그녀가 부르자 그는 고개를 들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그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는 이야기라고? 무슨 이야기이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케르가 그렇게 말할 정도의 이야기라면 결코 가벼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피해갈 생각도 없었기에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말해주세요.”
“테스케 경에게 그대의 사정을 듣고 나도 나름대로 알아보았어. 지금 라세트 공작에게 약점을 잡힌 가문들에 대해서.”
“그런데요?”
“다른 가문들은 별다른 특이점이 없더군. 그대가 말한 것처럼 줄스턴 자작의 권유를 받아 투자했고. 문제는 줄스턴 자작인데.”
“그에게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심각해진 표정으로 엘리시아가 묻자 이케르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세트 공작으로부터 비밀리에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어. 아주 오래전부터.”
“……!”
“라세트 공작과 처음 손을 잡은 건 전대 줄스턴 자작이었던 것 같고.”
이케르의 말에 충격을 받은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어졌다.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녀는 내심 줄스턴 자작을 믿고 있었다. 오랜 시간 그녀의 가문을 믿고 따라준 가문 중 하나였으니까.
줄스턴 자작 역시 사정이 있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속아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줄스턴 자작이 날, 우리 가문을 배신했다고? 그것도 전대 줄스턴 자작 때부터?’
충격으로 흔들리던 엘리시아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불현듯 떠오른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
엘리시아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리며 눈매가 저절로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반응이 격했던 것일까 이케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괜찮은가?”
“아니요.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이를 악문 채 엘리시아가 답하자 그는 위로하려는 듯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하는 것만큼 기분이 더러운 것도 없지. 그대의 상심이 크겠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이냐는 이케르의 반응에 엘리시아는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창백해진 새하얀 그녀의 얼굴 사이로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매섭게 빛나자 그의 금안에 놀란 눈빛이 깃들었다.
엘리시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차 사고가 있던 그날……, 줄스턴 자작 부자가 후작저에 왔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엘리시아의 말에 이케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 부모님과 의논할 것이 있다면서요.”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마차 사고가 났던 그 날 아침, 전대 줄스턴 자작이 지금의 줄스턴 자작을 데리고 후작저에 방문했었다. 미리 약속되지 않은 방문이었다.
전대 줄스턴 자작은 그녀의 부모님과 대화를 하러 응접실로 들어갔고 지금의 줄스턴 자작은 정원을 구경하겠다며 밖으로 나갔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었는데 줄스턴 자작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들의 행동이 갑자기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날 후작저를 방문한 것이 계획된 것이었다면?
정원으로 나갔던 줄스턴 자작의 목표가 그날 그녀의 부모님이 탈 마차였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그녀의 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면?
순식간에 치밀어 오른 배신감과 분노로 인해 엘리시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엘리시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불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
걱정이 가득 담긴 이케르의 목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울리자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놓지 마십시오. 놓으면 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이케르의 두 팔이 그녀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머리끝까지 치민 화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를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엘리시아의 말에 그의 팔이 더욱더 단단하게 그녀를 안아왔다.
“놓을 생각 없어. 그대가 우는 것도 화내는 것도 모두 내 품 안에서 했으면 하니까.”
“…….”
“아무리 해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내 멱살이라도 잡아. 어차피 내 멱살은 그대 전용이지 않나.”
녹아내릴 듯 다정한 이케르의 목소리가 엘리시아를 감싸면서 바짝 날이 선 그녀의 신경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사그라지며 그녀는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가 뭘 그리 많이 잡았다고 그러십니까.”
엘리시아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낮게 웃은 이케르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깃털이 살짝 내려앉는 것처럼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그래도 괜찮을 만큼 그대가 좋다는 소리야. 이제 좀 진정은 된 건가?”
“그럭저럭요.”
“다행이군. 적을 상대할 때 감정에 휩싸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지. 난 그대가 위험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감정을 앞세우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그래, 아직 증거가 없으니.’
심증만으로는 어떤 것도 증명해 낼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는 일이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짙은 보랏빛 눈동자는 완전히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