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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1/133)

91화

엘리시아는 박스석 문이 완전히 닫히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의자에 늘어진 채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미친놈이 예리하기까지 하니까 짜증나네.”

사실 그녀의 볼에 남아 있던 홍조는 프라이빗 룸에서 이케르에게 가볍게 빌렸던 것에 대한 여운으로 생긴 것이었다.

정말 맛보기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흥분할 만큼 흥분했고 절정까지도 갔다 왔으니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 당연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서서 하다 보니 그녀가 올라탈 수 없었다는 것과 몬트레 영애에게 소리가 들리게 하지 않기 위해 드레스 자락을 물고했다는 것 정도랄까.

그래도 프라이빗 룸에서 박스석까지의 거리가 있으니 가는 동안 얼굴이 식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홍조가 약간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내 냄새를 맡기까지 하고.”

더스틴의 더운 숨결이 목에 훅 끼쳐왔을 때를 떠올리며 엘리시아는 몸서리를 쳤다.

드레스 자락을 꼭 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에게 주먹을 날렸을지도 몰랐다.

물론 나가려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엘리시아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프라이빗 룸을 나올 때 이케르가 그녀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대가 돌아가고 내 대타가 자리를 비우면 2황자가 따라 나올 거야. 그때 잠시만 시간을 끌어주게.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하지.]

“그러고 보면 그것도 그가 말한 대로였지. 그 남자는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걸까.”

엘리시아는 프라이빗 룸에서 짧은 후희까지 즐긴 후 그의 품에 안겨 가쁜 숨을 진정시킬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느 정도 숨이 골라지자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늘은 왜 그 특유의 향기가 나지 않냐고. 그래서 그가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다른 사람인 줄 알고 놀랐다고.

그러자 그는 나른하게 웃으며 답했다.

[향수를 뿌리게 되면 내 향이 그대에게 배일 테니까. 사내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수컷의 냄새에 민감하거든.]

아무리 의심을 하고 있다고 해도 설마 더스틴이 그녀의 냄새까지 확인할까 싶었다. 개새끼도 아니고.

그런데 정말 그럴 줄이야.

이케르 데이모스는 정말이지 감탄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완벽한 남자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남자라는 것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앞으로 더스틴을 미친놈이 아니라 개새끼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미친 개새끼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닫힌 문을 흘깃 쳐다보았다.

2부 공연이 시작했음에도 더스틴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케르의 말처럼 정말 그인지 확인하러 나간 듯했다.

그럼에도 엘리시아는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그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까. 그보다 남자에게 선물할 만한 것이 커프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헤어지기 전 이케르는 그녀가 선물한 커프스가 달려 있는 소맷자락을 보여주었다. 선물 받은 이후로 한시도 떼 놓은 적 없다는 말과 함께.

그 말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뭔가 더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문제는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녀가 선물을 받은 적은 있어도 준 적은 없는 데다 이케르에게 준 첫 선물조차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이기에 더 그랬다.

‘나중에 하르에게 물어봐야겠다.’

아무래도 같은 남자니 받고 싶은 선물 정도는 알지 않을까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 ⚜ ⚜

‘이상하단 말이지.’

더스틴은 앞서가는 장신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뒷모습뿐이었지만 저 사내가 데이모스 공작이라는 것 정도는 그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데다 태초부터 타고난 것처럼 고고함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사내는 귀족들 중에서도 데이모스 공작뿐이었으니까.

키와 체격이 비슷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고유의 분위기까지 비슷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공작의 뒷모습을 꼼꼼히 훑고 나서야 그는 어쩔 수 없이 의심을 풀었다.

‘아까는 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건지 모르겠군.’

더스틴은 못마땅한 표정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순간적으로 느꼈던 묘한 위화감 때문이었다. 공작이면서도 공작이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박스석 사이의 거리 때문에 착각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더스틴이 움칠했다.

앞서가던 데이모스 공작이 우뚝 멈춰서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이다.

강렬하고 형형한 금안과 마주친 순간 더스틴은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졌다. 하지만 곧 그 사실을 깨닫고 그는 곧바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상대의 눈빛에 눌려 멈춰섰다는 것이 기분 나쁘다 못해 치욕적이기까지 했다.

‘망할.’

역시 없애버리고 싶은 사내라고 생각하며 간신히 얼굴을 편 더스틴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데이모스 공작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공작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선 더스틴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물었다.

“왜 여기에 서 있는 건가, 공작.”

“제게 볼일이 있으신 것 아니셨습니까?”

“내가 말인가? 뭔가 오해한 것 같군. 난 프라이빗 룸으로 잠깐 쉬러 가는 길이었네.”

더스틴의 뻔뻔한 거짓말에 그를 잠시 쳐다보던 공작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셨군요. 제가 오해한 모양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공작도 프라이빗 룸으로 가는 길이었나?”

“그렇습니다.”

“여자들 때문에 쉬지 못한 모양이군. 이럴 줄 알았으면 내 프라이빗 룸을 내줄 걸 그랬어. 엘리도 그게 더 편했을 텐데.”

일부러 엘리시아의 애칭에 힘을 주며 말한 더스틴은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라도 반응하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공작은 여전히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살짝 나른해 보이기까지 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 아이 때문에 온 거라. 그런데 전하께서도 쉬시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쪽 방은 비어있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허를 찌르고 들어온 질문에 더스틴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잠시 침묵했던 그는 천천히 입을 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휴식 시간이 끝났더군. 그래서 이제 좀 쉬려 하네. 그럼 공작, 다음에 보지.”

공작의 뒷말은 기다리지 않은 채 더스틴은 걸음을 옮겼다.

팔이 아슬아슬하게 스치지 않고 지나갈 정도로 일부러 가까이 붙어 지나가면서 더스틴은 공작이 눈치채지 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자 은은한 우디향이 그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확실히 만나지 않은 것은 맞군.’

조금이라도 엘리시아와 데이모스 공작이 접촉했다면 공작 특유의 저 향이 그녀의 몸에 배었을 것이다. 밀회를 하면서 얼굴만 마주보고 대화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

‘뭐 그렇다고 해서 재수 없는 건 변하지 않지만.’

한쪽 입매를 사정없이 비틀며 더스틴은 프라이빗 룸으로 향했다.

간다고 해놓고 가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십여 분 정도 쉬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

앞서 가는 더스틴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이케르는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2황자가 따라붙을 거라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평소보다 더 느릿하게 걸은 것도 있었다.

휴식 시간 동안 박스석에 앉아있던 사람이 그가 틀림없다는 걸 확인시켜 줘야 했으니까.

더스틴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의 몸에서 흐르는 우디향은 그가 프라이빗 룸을 빠져나오기 전에 뿌린 거라는 걸.

‘엘리가 시간을 적당하게 잘 끌어 줬어.’

대타와 바꿔치기할 시간을 벌기 위해 부탁했던 건데 기대했던 대로 그녀는 무척이나 잘 해내 주었다.

벽에 기대어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 그의 품 안에서 흐트러졌던 엘리시아를 떠올린 이케르의 금안이 짙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보는 순간부터 안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있던 그였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가볍게 빌려주기 위해 무척이나 많은 인내심을 사용해야 했지만 덕분에 그 역시 아주 약간의 갈증은 해소할 수 있었다.

‘제대로 해소하려면 일단 라세트 공작과 2황자부터 처리해야겠지.’

입매를 살짝 비튼 이케르가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부관 미하엘이었다.

“오셨습니까.”

“그자는?”

맞은편 소파에 앉은 이케르는 미하엘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자리에 다시 앉은 그의 부관은 곧바로 상황을 보고했다.

“조금 전 무사히 극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가발을 벗고 청소부 옷으로 갈아입고 나갔으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입단속은 단단히 시켰겠지?”

“입단속이고 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각하에 대한 충심으로 가득 차 있는 녀석이라서요. 오늘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오죽하면 바라는 대가가 각하가 쓰시던 펜이겠습니까.”

미하엘은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차며 답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딴 쓸데없는 것 말고 두둑한 보상으로 받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상사는 그런 면에서는 무척이나 너그러웠다.

“녹턴에게 전달해서 보상을 두둑이 해주라고 해. 받은 것이 많아질수록 입은 무거워질 테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각하께 전해달라는 서신이 하나 있었습니다. 급한 건이라고 하더군요.”

미하엘은 내민 봉투를 받아든 이케르는 밀봉을 확인하고 눈빛을 날카롭게 빛냈다.

날아오르는 새의 모습이 찍힌 밀봉, 그것은 하르가 그에게 서신을 보낼 때 찍어서 보내겠다고 약속했던 문양이었다.

곧바로 밀봉을 깬 이케르는 봉투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종이를 꺼냈다.

종이에는 무적이나 짤막한, 그러나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PM 6시, 체르빌 거리 데망트. B.R 거래 예정.]

‘오늘 오후 6시, 베라무스의 라세트 공작과 만난다는 거군.’

이케르는 종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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