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전 하르와 만났을 때 라세트 공작이 헬리오스의 수장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은 들었었다.
그럴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이케르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가 라세트 공작이었다고 해도 앞으로의 행보에 가장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헬리오스부터 처리하려 했을 것이다.
헬리오스가 급격한 성장을 해오기는 했지만 아직 베라무스 정도의 세력을 갖추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베라무스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면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베라무스가 입게 될 손해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역모를 준비하고 있는 라세트 공작으로서는 그 부분만큼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르는 라세트 공작을 만날 예정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세트 공작이 지금 상황에서 제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혹시라도 그자가 제 정체를 알아차릴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케르는 하르의 고민에 해결책을 던져주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라세트 공작을 지켜봐 왔기에 가능한 방법이기도 했다.
‘테스케 경이라면 잘하겠지만 그래도 가보는 것이 좋겠어. 엘리의 안전과도 직결될 테니.’
마법으로 서신을 태우는 이케르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하게 빛났다.
⚜ ⚜ ⚜
오페라가 끝난 뒤 엘리시아는 실피르를 데리고 후작저로 돌아왔다.
더스틴이 붙인 감시인 때문에 불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차라리 후작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편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응접실에 자리를 마련한 엘리시아는 실피르를 보며 말했다.
“내일 켈스턴 왕국으로 돌아간다 했지요? 아름다운 왕국이라고 이야기 많이 들었답니다.”
“네. 제국처럼 크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왕국이에요. 후작님께서도 시간 되시면 놀러 오시면 좋겠어요. 삼촌은 저번에 한번 왔다 가셨거든요.”
“각하께서요?”
“예. 다음에는…… 아, 맞다!”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실피르는 고개를 팍 숙이더니 엘리시아에게 가까이 오라고 눈짓했다.
왜 그러나 싶어 엘리시아가 따라 고개를 숙이자 실피르는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편하게 말해도 되나요? 삼촌이 후작님께 확인받고 말하라고 해서요.”
그제야 엘리시아는 실피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말해도 돼요. 다른 건 몰라도 도청에 대한 것만큼은 철저하게 확인하고 있으니까.”
“아, 다행이다. 그럼 안심하고 말할게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세피르는 고개를 들고 조금 전 하지 못한 말을 다시 입에 담았다.
“다음에는 두 분이 같이 오시면 좋겠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예?”
“두 분 사귀시잖아요. 삼촌은 그런 말씀 안 하셨지만 저도 눈치라는 게 있거든요. 집에 틀어박혀 논문을 쓰고 있던 저를 후작님 미끼로 오게 만든 것만 봐도 그렇고요.”
실피르의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빡인 엘리시아는 당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날 미끼로 몬테르 영애를 오게 했다니요?”
“모르셨구나. 저 사실 어제 제국에 들어왔어요. 연락은 그저께 받았고요.”
엘리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결국 실피아 마저도 밀회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미리 준비된 패라는 소리였다.
‘이 남자, 나하고 만나기 위해 어디까지 손을 쓴 거야?’
이케르의 준비성에 또다시 감탄하고 있던 그녀는 이어지는 실피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연락받은 날 삼촌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내일 들어오지 않으면 카멜리아 후작님을 만날 기회가 영영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각하께서 그러셨다고요?”
“정말 그랬다니까요. 항상 점잖은 삼촌 입에서 그런 악당 같은 말이 나오다니. 세상에, 저 진짜 놀랐잖아요.”
실피르의 말을 듣고 있던 엘리시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고 보면 그녀도 그 비슷한 협박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의회가 끝난 후 우연히 3황자를 만났을 때. 엘리시아가 자리를 피하려 하자, 이케르는 사격 이야기를 꺼내 그녀를 붙들었다.
그래서 그때 엘리시아도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악당같이 굴고 있는 걸 알고 있냐고.
그는 자신이 악당같이 굴었다는 걸 부인하지 않았다. 도리어 수려한 눈매를 접으며 악당들이 상대를 입막음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적이었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야. 내 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그가 적이었다면 도저히 이기지 못했을 것 같다고 엘리시아가 생각하는 사이 실피르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서 부랴부랴 들어왔는데 와서 보니 이미 일주일 전에 들어온 걸로 되어 있더라고요. 출국 날짜는 내일로 정해져 있고요. 그래야 계획에 차질이 없다나요. 하여간 삼촌답다 싶으면서 카멜리아 후작님에 대해 더 궁금해졌어요.”
“예?”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엘리시아가 흠칫 놀라자 실피르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후작님이 제국 최고의 바람둥이라는 소문은 들었거든요. 그래서 후작님이 삼촌을 유혹하는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그 반대잖아요. 궁금할 수밖에 없죠. 어떤 분이기에 삼촌을 이렇게까지 푹 빠지게 만들었나.”
“…….”
“실제로 보니 대충 알 것 같지만요.”
그 대충이 뭔지 궁금했지만 엘리시아는 차마 묻지 못했다.
거리낌 없는 실피르의 성격으로 보아 어쩐지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말들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대신 그녀는 좀 더 편한 주제로 말을 돌렸다.
“실피아가 말한 대로 각하와는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냥 좋은 관계는 아니신 거 같던데.”
엘리시아는 흠칫했다. 당혹감에 그녀의 눈동자가 또그르르 굴렀다.
‘설마 드레스 자락까지 물었는데 소리가 흘러나갔던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찔린 엘리시아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빨리 주제를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그보다 우리 가문에 대해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맞다. 그러니까 3대 카멜리아 후작께서 내세우셨던 정책에 관해서인데요.”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진지한 눈빛으로 변한 실피르를 보며 엘리시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어쩐지 그녀와의 대화가 즐거울 것 같은 예감이었다.
⚜ ⚜ ⚜
루리엔은 찻잔을 들어 한입 마시고는 자신이 가져다 준 보고서를 꼼꼼히 읽고 있는 녹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진행 중인 사업에 대한 보고서를 데이모스 공작에게 전달하기 위해 수도의 조용한 찻집으로 녹턴을 물러냈다. 룸이 있어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사심이 70% 들어있다 해도 투자는 엄연한 투자이니 절차를 지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스타일도 그렇고 이제 완전히 제국인 같아 보이네.’
제국으로 온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강했었다.
그런데 3황자의 탄신연회 때부터 그 느낌이 옅어지더니 이제는 말하지 않으면 제국인이 아니라는 걸 모를 정도였다.
‘뭐, 녹턴답기는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그가 보였던 빠른 적응력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문득 그녀는 녹턴이 처음 다가왔을 때를 떠올렸다.
과제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말을 걸어왔을 때만 해도 그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었다. 한번, 두 번, 세 번, 계속되는 우연한 만남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같이 다니게 되고 모든 것을 함께 하게 되면서 루리엔은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녀에겐 처음 찾아온 사랑의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감정을 조용히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버리려고 했다. 언젠가 그녀는 돌아가야 했고 그는 남아야만 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고백을 받았을 때 조건을 내세웠던 것도 그래서였다. 거절하자니 아쉬웠고 받아들이자니 마음에 걸렸다.
설마 그가 자신을 따라서 모든 것을 버리고 제국으로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2년이나 지나서.
‘하여간 바보라니까.’
여왕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할 수 있는 길을 차버리다니. 어쩌면 재상의 자리까지도 넘볼 수 있었을 텐데.
루리엔이 속으로 혀를 쯧 하고 찾을 때 그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녹턴의 고개가 들렸다.
“바보 같은 선택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서류를 내려놓고는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예상했던 대로 잘 되어가고 있네. 네가 하는 일이니 당연하겠지만. 이거 받아.”
“뭐야, 이건?”
봉투를 받아 속에 있는 것을 꺼낸 루리엔의 눈빛에 놀람이 깃들었다. 그것은 수표였다.
“각하께서 전하라고 하셨어. 지금쯤 그 정도 금액이 필요할 거라고.”
녹턴의 말에 그녀는 진심으로 데이모스 공작에게 감탄했다.
사업이 생각보다 더 잘 흘러가면서 조금 더 투자 자금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하려 했는데 먼저 보내온 것이다.
“감사히 잘 쓰겠다고 전해줘. 두 배 이상으로 돌려드리겠다는 것도.”
루리엔의 말에 녹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전할게.”
“대단한 분이야, 데이모스 공작 각하는. 안 그래도 자금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려고 했거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옆에서 보좌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 나름대로 제법 꼼꼼하다 생각했는데 각하에 비하면 아직 멀었더라고.”
“그 정도야?”
“한 가지도 허투루 하시는 것이 없어. 각하께서 움직이는 것에는 항상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지. 꼭 앞날을 내다보시는 것 같다니까.”
“하긴. 그러니 엘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겠지.”
영지에 다녀온 이후로 데이모스 공작에 대한 엘리의 태도는 확실히 변해 있었다.
연인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부터가 그랬다.
지금까지 엘리시아가 만났던 남자들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 또는 ‘파트너’로 불리는 것이 다였으니까.
아직까지 사랑이라는 단어까지는 꺼내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 그 단어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제는 라세트 공작과 2황자인데.’
비열한 라세트 공작은 엘리시아에게 기존에 걸었던 목줄 외에도 추가적으로 목줄을 더 걸었다. 그녀가 아끼는 가문들을 인질로 잡은 것이다.
라세트 공작에게 불려갔다 돌아온 그 날, 엘리시아는 창백하지만 결의가 어린 얼굴로 그녀와 하르에게 말했다.
[이대로 저들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아. 싸울래. 그 끝이 파멸이라도 싸워보고 싶어. 나 그래도 될까?]
그래서 루리엔은 말해주었다. 당연한 것은 묻지 말라고.
‘이전보다 빠져나가기는 더 어려워졌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겠지.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녹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