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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93/133)

93화

“너무 걱정하지 마. 각하께서 생각하고 계신 것이 있는 것 같아.”

“각하께서? 그보다 너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루리엔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녹턴을 쳐다보며 묻자 그는 싱긋 미소 지었다.

“네 여왕님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는 것도. 사업도 잘 되어가는 이 상황에서 네가 인상을 찌푸릴 거라면 그것밖에 없잖아.”

“……정말 변함이 없네, 넌. 예전에도 내 마음을 귀신같이 맞추더니.”

“얘기했었잖아, 고민 있으면 넌 항상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고. 고친다고 하더니 못 고친 모양이네.”

녹턴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툭툭 쳤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랬었지. 고치기 힘들면 놔두라고. 네 이마에 주름이 생겨도 상관없다고. 내 눈에는 예쁘게만 보인다고.”

장난기 어린 그의 행동에 피식 웃던 루리엔은 그의 말에 흠칫했다.

“녹턴 너…….”

“지금 당장 부담 줄 생각은 없어. 나 말고도 생각할 게 많을 테니까.”

잠시 말을 끊었던 녹턴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그래도 기억해줘. 너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거. 나 역시 각하의 옆에서 싸우고 있다는 걸. 네 옆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그의 눈빛을 보며 루리엔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사내였다. 녹턴 시에드는.

“그럼 이겨.”

“응?”

그녀가 툭 던진 말에 녹턴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바보 같아 보여 소리 없이 웃은 그녀는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

“이기고 오라고. 나도 이길 거니까.”

그것이 지금의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녹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보며 루리엔 역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 ⚜ ⚜

“그런데 정말 직접 만나실 겁니까?”

“어.”

조셉의 물음에 하르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서부터 로브를 걸친 두 사람은 라세트 공작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특히 하르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가면까지 쓴 상태였다.

걱정 어린 눈빛을 떠올린 조셉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러지 말고 처음부터 제가 나서는 게 어떨까요?”

“됐어.”

“됐다고만 마시고 잘 생각해보십시오. 괜히 먼저 나서셨다가 말씀하신 대로 안 되면요. 아무리 목소리 변조 마도구를 차고 있다고 해도 사람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될 거야.”

“아니 대체 무슨 똥배짱이십니까. 그 사람이 신이라도 된대요? 말한 대로 다 되게?”

“신은 아니지만 믿어도 돼.”

하르의 대답에 조셉은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대체 누구기에 수장이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수장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 자리에 마주앉은 라세트 공작이 굉장히 불쾌한 얼굴로 입을 연 것이다.

“내가 직접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타를 내밀다니. 가면까지 씌우고.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

아니, 그러니까 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진짜 헬리오스 수장입니다만.

조셉은 또다시 어이가 없어졌지만 그런 내색조차 할 시간도 없었다.

라세트 공작의 날카롭고 엄중한 시선이 곧바로 그에게로 향한 것이다.

“날 시험할 생각이 아니라면 자리에 앉는 게 어떤가, 조셉. 아니 헬리오스의 수장.”

이미 라세트 공작은 조셉을 헬리오스의 수장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그는 자신의 수장에게 라세트 공작을 속일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누군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의 수장에게 대타를 내세울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가서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라세트 공작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 거라 말한 사람 말이다.

‘대체 그 사람이 누구지?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을 어떻게 안 거야?’

가능하다면 헬리오스로 영입하고 싶을 정도라고 생각하며 조셉은 준비했던 대로 일부러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역시 소문대로 예리하시군요.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헬리오스의 수장입니다.”

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하르가 재빨리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졸지에 수장을 세워두고 앉게 된 것에 대해 죄책감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은 채 조셉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아 라세트 공작을 마주 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라세트 공작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답했다.

“알아차리라고 세운 것 아니었나? 대타도 적당히 그럴듯한 사람을 세워야 속아 넘어가 주는 척이라도 하지. 척 봐도 머리가 아닌 몸을 쓰는 자가 아닌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라세트 공작 앞에서 조셉은 잠시 침묵했다.

사람이 너무 똑똑해도 안 된다는 말이 왜 있나 했더니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았다.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저를 만나고자 하신 이유는 무엇인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유명한 라세트 공작이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것이 우습기는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조셉에게는 라세트 공작이 무슨 속셈으로 만나자고 한 것인지 확인해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그가 진지하게 묻자 라세트 공작은 곧바로 미끼를 던져왔다.

“바카라를 자네들에게 완전히 넘겨주지.”

조셉은 놀란 눈빛을 떠올렸다.

바카라는 수도의 가장 큰 향락가이자 뒷골목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상권이기도 했다.

헬리오스도 그곳에 진출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 30% 정도의 이권밖에 얻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그곳의 이권을 통째로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파격적인 제안이군요. 그런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저희 쪽으로 넘겨주시겠다니. 그만큼 바라시는 것도 위험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조건이 뭡니까?”

신중한 조셉의 물음에 라세트 공작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펼친 후 그에게로 밀었다.

종이를 받아 내용을 확인한 조셉은 눈살을 찌푸렸다. 종이에 써진 이름들이 결코 평범치 않기 때문이었다.

“제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수도를 지키는 4대 근위대장의 이름으로 보입니다만.”

“제대로 보았군.

“이들을 포섭이라도 하라는 말씀입니까?”

“역시 헬리오스의 수장다워. 이름만 보고도 내 의도를 거기까지 파악하다니. 그 정도는 되어야 바카라를 받을 자격이 되지 않겠나.”

조셉의 눈살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수장에게서 라세트 공작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말을 미리 들었기에 그가 무슨 속셈으로 제안을 한 건지 눈에 훤히 보였다.

지방에 주둔하는 사병들이 수도로 밀고 올라올 때 수도 근위대에서 막아서면 곤란해지니 미리 처리하고자 하는 것일 터였다.

“베라무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아쉽게도 베라무스는 수사국으로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어서 말이야. 내게는 수사국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말이 필요하지.”

“그것이 우리 헬리오스입니까?”

“맞네.”

라세트 공작의 대답에 조셉은 잠시 침묵했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속으로 60까지 수를 센 그는 종이를 다시 라세트 공작 쪽으로 밀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헬리오스는 각하의 거대한 포부에 가담할 생각이 없습니다. 바카라가 탐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제 조직원들의 목숨이 비싸서 말입니다. 잘못되면 헬리오스가 사라질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그것은 이미 준비된 대답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라세트 공작이 헬리오스를 역모에 가담시킬 것이라는 걸 눈치채고서 수장과 함께 고민해 만들어 둔 것이다.

누가 봐도 위험한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면 그게 더 의심스럽지 않은가.

헬리오스를 필요로 하는 라세트 공작이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도 거절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라세트 공작은 수장과 그의 예상대로 불쾌해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음산하게 끌어올렸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내 제안을 거절해도 헬리오스는 사라지게 될 테니.”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저희와 부딪치면 베라무스 역시 무사하지는 않을 텐데요.”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조셉이 반박하자 라세트 공작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베라무스는 사라지지 않겠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테고.”

“하지만 복구까지 오래 걸리겠지요. 그렇게 되면 각하께서 지금 품고 계신 원대한 포부도 물거품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네 말대로 내 계획 역시 어쩔 수 없이 뒤로 미뤄지겠지. 하지만 헬리오스라는 변수를 두고 일을 진행시키는 것과 시간이 걸리더라도 헬리오스라는 변수를 치워버리고 가는 것 중 선택해야 한다면 난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할 거라네.”

“…….”

“사라지는 것이 결정된 미래보다는 살아남아 더 큰 부흥을 꿈꿀 수 있는 미래가 낫지 않겠나?”

그것은 제안이 아닌 협박이었다.

굳어진 조셉을 쳐다보는 라세트 공작의 입꼬리가 잔혹함을 띠고 더욱더 길게 올라갔다.

⚜ ⚜ ⚜

“연기하는 것도 힘들군요. 정색하느라 입가에 경련 나는 줄 알았습니다.”

조셉의 투덜거림에 하르는 고생했다는 눈빛으로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라세트 공작과의 밀회를 끝난 두 사람은 약속 장소를 벗어나 좀 떨어진 곳에 이동해 있었다.

이제야 좀 살겠다는 듯 기지개를 쭉 켠 조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어느새 달이 떠 있었다.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본 그는 다시 시선을 하르에게로 돌렸다.

“그런데 4대 근위대장은 어떻게 포섭할 생각이십니까? 보통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요.”

“해줄 사람이 있어.”

“예? 그게 무슨……? 혹시 아까 그 방법을 수장에게 알려준 그 사람입니까?”

“맞아.”

하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셉은 궁금하다는 듯 두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그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라세트 공작이 속아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4대 근위대장까지 포섭할 수 있다니. 대체 그 사람이 누굽니까?”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셉에게 돌아온 것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묻지 말고 봐. 마침 온 것 같으니.”

무뚝뚝한 하르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장신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느긋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누군가 싶어 쳐다보던 조셉은 달빛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수사국의 국장이자 황제의 오른팔인 데이모스 공작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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