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칠흑이 내려앉은 머리카락과 강렬한 황금빛 눈동자.
조각같이 수려한 외모를 제외하더라도 이 두 가지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데, 데이모스 공작 각하?”
조셉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하르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요즘 자주 만난다고 했잖아.”
“그거 진담이셨습니까?”
“내가 농담한 적 있어?”
“그렇긴 합니다만…….”
조셉은 얼이 빠진 얼굴로 하르와 데이모스 공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교성이라고는 찾아보기도 힘든 이 인간이 언제 저런 거물을 사귀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들 앞에 멈춰선 이케르의 시선이 조셉에게로 향했다.
흥미로운 눈빛이 금안에 깃드는 것을 보며 조셉은 움찔했다. 단순한 시선임에도 폐부까지 꿰뚫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공작의 시선은 곧 그의 수장에게로 옮겨갔다. 동시에 묵직한 저음이 느긋함을 띠고 공기 중으로 흘렀다.
“이야기는 잘 끝났나 보군.”
“덕분에 잘 끝났습니다. 만나자고 했던 이유도 각하의 예상대로더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조셉은 하르와 이케르의 대화에 다시 한번 놀랐다.
‘뭐야, 라세트 공작의 제안도 이미 예상했던 거였어?’
데이모스 공작이 정치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수완이 좋고 혜안이 뛰어나다는 것은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과장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소문이 실제보다 훨씬 못한 것이 아닌가. 통찰력마저 탁월하니 말이다.
얼이 빠져 있던 조셉은 그만 가보라는 하르의 눈짓에 두 눈을 껌뻑였다.
“저 혼자요?”
“그럼?”
“아닙니다.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뭔가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나보다 하고 조셉은 아지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조셉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자 이케르가 입을 열었다.
“3년 전 베라무스에 의해 몰살당했던 블랙로즈의 리더가 헬리오스의 부수장을 맡고 있을 줄은 몰랐네.”
그의 물음에 답답했는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진 하르가 되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조셉이 블랙로즈의 숨겨진 리더라는 것 말입니다.”
“제국 내 암살조직에 대해서는 대충 다 파악하고 있으니까. 라세트 공작이 손을 뻗은 조직들은 더욱더 주의 깊게 보고 있고.”
“대체 모르시는 게 뭡니까?”
“나라고 다 아는 건 아니야. 테스케 경, 자네가 헬리오스의 수장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나.”
“그것도 의심은 갑니다만.”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하르의 눈빛에 이케르는 수려한 눈꼬리를 살짝 접었다.
“설마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겠나. 그보다 그날 조셉 대신 죽었던 것이 그의 친형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몸보다 머리를 쓰는 것이 더 능숙한 조셉을 위해 형이 대신 리더인 척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그날 조셉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랬군. 라세트 공작이 그들을 몰살시킨 이유가 1황자의 암살을 거절했기 때문이 맞나?”
“그렇습니다. 거절한 날 바로 습격해왔다고 들었습니다.”
“1황자 암살에 대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한 거겠지. 라세트 공작다운 짓이야. 그래도 다행히 침착해 보이더군.”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아, 라세트 공작이 조셉에게 준 것입니다.”
하르는 조셉에게 받아두었던 종이를 이케르에게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든 이케르는 쓱 훑어보고는 하르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전에 말했던 대로 진행하면 되겠어. 그쪽에 무리는 없겠나?”
“상황만 꾸미면 되는 거라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부탁하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건 방법이 있는 겁니까?”
언제나 그렇듯 앞을 모두 잘라먹은 질문이었지만 이케르는 그가 무엇을 묻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가문들에 대한 문제라면 풀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있네. 하지만 이건 엘리가 선택해야 할 부분이지. 그녀가 승낙하면 진행할 생각이야.”
“오늘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만나놓고 그것도 안 물어봤냐는 하르의 눈빛에 이케르는 입매를 살짝 휘었다.
“그것까지 물어볼 시간은 되지 않았네. 어려운 숙제를 하나 줬기도 했고 그녀의 부탁도 들어줘야 해서.”
“그 녀석 유혹에 넘어가신 모양이군요.”
“서로 간에 원했던 거라 해두지.”
이케르의 금안에 즐거운 눈빛이 옅게 깃드는 것을 보며 역시 엘리답다고 하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조차도 그냥 넘기지 못하다니.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개보다도 못하게 보는 인간과 함께 있어야 하니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그런 와중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긴 그 녀석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긴 했지.’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인 하르는 이케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언제 물으실 겁니까?”
“곧.”
이미 만날 방법을 생각해두었다는 듯 느슨하게 입매를 늘어트리며 미소 짓는 이케르를 보며 하르는 생각했다.
저 사내가 적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고.
⚜ ⚜ ⚜
다음날 저녁, 엘리시아는 수도에서도 이름난 음식점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를 은은하게 밝히는 촛불과 잔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붉은 와인, 고풍스럽고 우아한 접시 위에 놓인 고급스런 요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그녀는 평소와 달리 즐길 수가 없었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좋은 요리를 저 미친놈과 같이 먹어야 한다니.’
맞은편에 앉은 더스틴을 흘깃 본 엘리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오페라 극장에서 더스틴은 그녀와 이케르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너그러운 척하며 그녀를 실피르에게 양보했다.
그래놓고 큰 선심을 썼으니 당연히 만나야 한다는 것처럼 오늘 곧바로 그녀를 불러낸 것이다. 정말 양심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 음식이 무슨 죄가 있겠어. 일단 먹자.’
입맛은 없었지만 뭐라도 먹어둬야 힘이 날 것 같아 엘리시아는 스튜를 한 스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무슨 스튜인지도 모르고 먹었던 그녀는 그것이 고기스튜라는 것을 깨닫자 잠시 멈칫했다.
이케르가 별장에서 끓여줬던 스튜가 기억난 것이다.
분명 일류 주방장이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 끓인 스튜일 텐데 어째서 별장에서 먹었던 것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걸까.
‘그건 정말 단순히 버섯과 고기만으로 끓인 거였는데.’
추억에 잠겨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으로 스튜를 느릿하게 휘젓고 있던 엘리시아는 더스틴의 목소리에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나?”
“아니요. 음식은 맛있습니다.”
“그런데?”
“입맛이 좀 없어서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라도 주방장을 불러 괜한 분풀이를 할까봐 엘리시아는 재빨리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제 이케르와 만나 위로받은 덕분에 이 정도는 참고 웃어줄 수 있었다.
꾸민 것이라도 그녀가 미소 짓는 것이 마음에 든 것일까, 더스틴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내심 안도한 엘리시아는 포크와 나이프로 고기를 얇게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무엇이든 먹는 모습을 보여야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잘하면 체하겠는데.’
아무래도 돌아가자마자 소화제부터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기와 샐러드 몇 조각을 그녀가 억지로 씹어 삼켰을 때였다. 더스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제 그 영애와의 시간은 어땠나? 그대와 그대의 가문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질문을 많이 하더군요. 저녁식사까지 하고 돌아갔습니다.”
“데이모스 공작에 대한 이야기는 없던가?”
갑작스럽게 이케르가 언급되었음에도 엘리시아는 놀라지 않았다. 더스틴이라면 질문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상관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하게 답했다.
“아주 잠깐 나오기는 했었습니다. 좋은 사촌 오빠라고요.”
“그게 다인가?”
“눈이 너무 높아 큰일이라고도 했습니다. 저러다 혼자 늙어 죽을 것 같다면서 걱정하더군요.”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피르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케르 오빠가 눈이 높아 걱정했는데 후작님을 만나려고 그랬었나 봐요. 이제 오빠가 혼자 늙어죽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그래서 남녀 사이가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렇게 확신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실피아가 뭐라 했던가.
[어릴 때부터 이케르 오빠는 한번 선택한 건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고르기까지가 오래 걸려서 그렇지. 그리고 만나보면 아시겠지만 이케르 오빠만한 남자도 없을 거예요.]
실피르의 마지막 말은 엘리시아도 인정하는 바였다. 이케르만한 남자는 확실히 없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더스틴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데이모스 공작이 눈이 높긴 하지. 엘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요?”
“데이모스 공작 말이야. 지난번 틴신 연회 때 보니 꽤나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부드러워 보이는 더스틴의 눈빛 뒤로 숨어있는 날카로움을 눈치채지 못할 엘리시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담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도움받은 것도 있고 하다 보니 이전처럼 날을 세우기는 어렵더군요. 그래서 최대한 미소 지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후작이 수장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데이모스 공작 덕분이기는 하니까. 그런데 엘리.”
“예.”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 그자가 귀족파의 임시회의까지 찾아와서 그대와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변명한 것이. 그것도 차기 마탑주까지 데리고.”
이 미친놈. 역시 나와 이케르 사이를 의심하고 있는 거 맞네.
순간 섬뜩함이 들었지만 엘리시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런 질문을 받을까 싶어 미리 대답을 준비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저 같은 바람둥이와 얽히는 것이 억울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깨끗하게 쌓아온 각하의 평판이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성명까지 발표했는데 베르첼 후작이 그렇게 나왔으니 기분 나쁘셨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회의가 끝나고 그자와 무슨 얘기를 했나? 회의장에 둘만 남아있었다고 하던데.”
“사과드렸습니다. 도와주셨는데 곤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다음에는 주의해서 음식을 먹으라는 충고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헤어졌습니다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녀가 답변해서일까, 더스틴의 표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잡히지 않자 성질이 난 것 같기도 했다.
묘하게 날 선 침묵 속에서 엘리시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음식을 먹는 것뿐이었다.
억지로 먹은 결과는 돌아오는 마차에서의 급체로 이어졌다.
급하게 호출된 주치의가 지어준 약을 먹고 간신히 체기를 면한 그녀는 쉬지도 못하고 다음 날 오전 바로 황궁으로 입궁했다. 황비가 더스틴과의 약혼을 빌미 삼아 그녀를 부른 것이다.
‘아주 모자가 쌍으로 괴롭히네. 날 말려 죽이려는 속셈인가?’
어제는 더스틴, 오늘은 황비.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하며 소파에 불편하게 앉아 잇던 엘리시아는 황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