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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95/133)

95화

“공무도 아닌데 정복이라니, 카멜리아 후작은 드레스보다 정복이 더 편한가 보군요. 아니면 천박하게 몸매가 드러나는 걸 즐기는 편인가?”

우아한 말투로 독설을 내뱉는 황비를 보며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부터 이 정도면 미리 각오하는 것이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에 대한 황비의 독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붓감으로 조신하고 고분고분하며 내조를 잘하는 여자를 들이라고 했는데 황자가 말을 뒷등으로도 들어먹지 않더군요. 정반대의 여자를 고집하는 걸 보면 청개구리인가 싶기도 하고. 대체 누굴 닮아 고집이 저렇게 센지.”

한마디로 너 같은 건 내 성에 조금도 차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엘리시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어차피 저와의 약혼은 귀족파를 묶기 위한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까. 결국 전하께서는 황비마마께서 원하시는 타입인 노버트 후작 영애와 결혼하시게 될 테니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을 뿐인데 곧바로 황비의 눈이 뾰족해지자 엘리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지금 황자의 결혼 상대를 걱정하는 거로 보입니까? 황자가 후작을…….”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던 황비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더니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생략된 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노버트 후작 영애와 결혼한 후에도 그 미친놈이 내게 집착할까 봐 신경 쓰이는 거겠지. 저러는 걸 보면 라세트 공작이 나에 대해 더스틴에게 약속한 건 확실하고.’

보지 않아도 라세트 공작과 더스틴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것 같아 엘리시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웃었다.

그냥도 아니고 목줄을 걸어서 쥐여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래야 더스틴이 무슨 짓을 하든 그녀가 고분고분 따를 테니까.

‘웃기고 있어. 누가 잡혀 준대?’

잡는 게 취향이지 잡히는 건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멱살이든 뭐든 말이다.

짜증이 치미는 것을 꾹 참고 있던 엘리시아는 문득 이케르가 급격히 그리워지는 걸 느꼈다.

화를 내는 그녀를 꼭 안아주던 팔도, 달래주던 깊고 낮은 목소리도, 그녀의 몸을 기쁘게 만들어줬던 그것까지도.

‘아, 또 빌리고 싶다.’

아무래도 가볍게 빌려서 그런 것 같다고 그녀가 아쉬워하고 있을 때 황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됐습니다. 지금부터는 입 닥치고 고개만 끄덕여요, 후작. 쓸데없는 그대의 의견 따위는 필요 없으니.”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온화했지만 황비의 말은 살벌함 그 자체였다. 눈빛 역시 서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리시아는 황비가 시킨 대로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애초부터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건 그녀 쪽이었기에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황비가 테이블 위의 종을 흔들자 응접실 문이 열리며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중년 여인 들어왔다.

황비가 주로 이용하는 델로이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 마담 오브레였다.

“어서 오게, 마담 오브레.”

황비의 인사에 마담 오브레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비마마. 2황자 전하와 카멜리아 후작님의 약혼식 예복을 맞추시려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잘 알고 있군. 새로 나온 디자인이 있나?”

“그렇지 않아도 마침 이번에 새로 고안한 디자인이 몇 개 있어 가지고 왔습니다.”

마담 오브레는 손에 들고 있던 디자인 북을 펼쳐서 황비에게 건넸다.

드레스 스케치를 본 황비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어렸다.

“이번 작품들은 다 괜찮군. 특히 세 번째 것이 눈에 들어오는데 샘플이 있나?”

황비가 디자인북을 돌려주며 말하자 마담 오브레는 엘리시아를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카멜리아 후작님께서는 디자인을 확인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으신지……?”

“후작은 약혼식 관련해서 모든 준비를 내게 일임했다네. 그렇지 않나, 후작.”

일임이라는 단어의 뜻이 바뀌었나. 웃기고 있네.

속으로 욕설이 치밀어 올랐지만 엘리시아는 황비가 시켰던 대로 마담 오브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어차피 고르라고 해도 고르고 싶지 않던 드레스였기에 뭐가 되든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소망은 곧바로 깨져버렸다. 노크도 없이 더스틴이 문을 벌컥 열고 응접실로 들어온 것이다.

“어머니.”

엘리시아의 예쁜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황비 하나 상대하기도 벅찬데 미친놈까지 얹히다니 이게 무슨 흉복이란 말인가.

망했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들어온 더스틴을 쳐다보는 황비의 표정이 어쩐지 좋지 않았다.

‘약속된 것이 아니었나?’

엘리시아가 의아해하는 사이 황비는 우아한 미소를 지은 채 더스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마담 오브레가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조금 전 놀라고 못마땅해하던 표정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황자가 웬일로 이 시간에 어미의 처소에 방문을 다 하였습니까? 정무를 볼 시간이 아니던가요.”

황비의 물음에 더스틴은 엘리시아를 쳐다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정무도 중요하지만 제 예비 약혼녀가 드레스를 고른다는데 당연히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안 와도 되거든?

저 미친놈을 다시 돌려보낼 수 없을까 엘리시아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더스틴은 마담 오브레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던 참이지?”

“황비마마께서 샘플을 보고 싶어 하셔서 막 보여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잘 됐군. 나도 같이 보도록 하지.”

돌아가기는커녕 엘리시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더스틴은 보란 듯이 한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순간 그의 팔을 쳐낼 뻔 했던 엘리시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깨에서부터 전해지는 불쾌함을 눌러 참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은 더스틴은 빨리 시작하라고 마담 오브레에게 눈짓했다.

마담 오브레가 네 가지 샘플을 선보이자 그는 오만한 눈빛으로 두 번째 샘플을 가리켰다.

“그게 제일 낫군.”

더스틴의 선택에 마담 오브레는 난감한 눈빛으로 황비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린 것이다.

황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황자, 세 번째 드레스가 낫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답답해 보이는 면이 있어요.”

“저는 두 번째가 더 마음에 듭니다. 세 번째 드레스는 노출이 과합니다.”

“원래 어느 정도 노출이 있어야 멋스러운 겁니다. 드레스는 원래 여자가 더 잘 보는 법이지요. 그러니 그냥 내게 맡기세요.”

“제 약혼녀의 드레스니 제가 선택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어마마마께서야 말로 제게 맡겨주시지요.”

드레스 선택이 자존심과 연결이라도 되는 것처럼 황비와 더스틴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치열하게 의견대립을 보이는 모자를 보며 마담 오브레도 난감한 눈빛이었지만 가장 어이가 없는 것은 엘리시아였다.

실제로 드레스를 입을 사람은 그녀인데 왜 저 둘이 드레스를 두고 싸운단 말인가.

모자의 기싸움은 드레스에서 끝나지 않았다. 액세서리, 구두까지 계속해서 이어진 것이다.

오늘 하루가 무척이나 길고 힘겨울 것 같은 느낌에 엘리시아는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결국 그녀가 후작저로 돌아온 것은 어둑해질 때쯤이었다.

“난 왜 부른 거야. 둘이 알아서 정하면 될 것을.”

아무래도 하루 종일 고문을 하려고 부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그대로 침대에 파고들었다. 더스틴 모자에게 당한 정신적인 피로가 너무나도 커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자고 일어나니 하르가 부탁했던 정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서류를 건네는 하르의 표정도, 지켜보는 루리엔의 표정도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덩달아 엘리시아도 불안해졌다.

“둘 다 얼굴이 왜 그래? 심각한 내용이라도 있어?”

두 친우의 눈치를 보며 그녀가 묻자 한숨을 내쉰 루리엔이 서류를 눈짓했다.

“네 눈으로 직접 봐.”

“뭔데?”

하르에게 받은 서류를 읽기 시작한 엘리시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며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한 장이 넘어가면서 서류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두 장째를 넘어가면서 그녀의 몸 역시 같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엘리시아는 이를 악문 채 서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콰직 소리와 함께 서류가 힘없이 구겨졌다.

그녀가 하르에게 받은 서류는 과거 마차 사고 전 갑자기 파산해서 몰락한 귀족파의 가문들에 대한 조사서였다.

총 다섯 가문이었는데 하나같이 카멜리아 후작가와 친분이 두텁던 가문이기도 했다. 그녀 역시 어릴 적에 들어본 적이 있던 이름들이었다.

문제는 그 가문들이 몰락한 과정에 공통적인 한 귀족 가문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요 근래 엘리시아가 아리아를 포함한 다른 가주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기도 했다.

“줄스턴 자작…… 역시 그자였어.”

엘리시아는 이를 바득 갈았다.

지금만이 아니었다. 과거부터 이미 라세트 공작의 앞잡이가 되어 귀족파를 휘저어놓고 있었던 거다.

오랜 시간 내부에 숨어있던 배신자를 확인하자 손끝이 차게 식으며 격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지금까지 줄스턴 자작을 같은 편이라고 믿고 있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충격과 분노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자 걱정이 된 루리엔이 손을 뻗어 덜덜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엘리.”

“…….”

“네 잘못이 아니야. 저들이 너무 교묘하게 숨어있었어. 알지?”

“……알아.”

“그럼 됐어. 일단 심호흡부터 하고 감정을 가라앉혀. 분노한 상태로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으니까.”

루리엔의 말에 엘리시아는 움찔했다. 언젠가 들었던 똑같은 말이 떠올라서였다.

[다행이군. 적을 상대할 때 감정에 휩싸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지. 난 그대가 위험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떨리던 그녀의 몸을 안아주던 그의 단단한 팔, 귓가에 내려앉던 다정한 목소리.

어째서일까. 그와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용암처럼 들끓던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은.

심호흡을 하지 않았는데도 떨리던 그녀의 손도 몸도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뜬 엘리시아는 친우들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손끝은 차가웠지만 이성은 완전하게 돌아와 있었다.

“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녀의 말에 루리엔과 하르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그런 친우들을 쳐다보며 엘리시아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머릿속에 정리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어머니는 줄스턴 자작가가 배신했다는 것을 아셨던 것 같아. 루리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루리엔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자신의 가정에 확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말하려 하는데도 자꾸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래서 마차 사고가 났던 그날 줄스턴 자작 부자가 찾아왔던 거야. 어머니의 입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말을 멈춘 채 앙다문 엘리시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자 걱정스러운 눈빛을 띤 하르와 루리엔이 재빨리 나섰다.

“됐어. 그만 말해.”

“그래, 우리 다 알아들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두 주먹을 꾹 쥔 그녀는 이를 악문 채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며 말했다.

“그들 부자로 인해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그것도 처참하게. 그러니…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회유를 받았든 협박을 받았든 상관없어.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겠어. 반드시.”

그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하는 맹세였고 각오였다.

짙은 남색으로 가라앉은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분노로 매섭게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엘리시아는 황후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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