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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96/133)

96화

아침 일찍 후작저를 방문한 황후의 시녀는 엘리시아에게 황후의 서신을 전했다.

3황자의 수업과 관련하여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오후에 입궁해달라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말도 함께였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놀라기는 했지만 엘리시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도리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오후에 같이 차를 마시자는 더스틴의 제안 아닌 강요를 즐거운 마음으로 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후 3시쯤 입궁하겠다고 황후의 시녀에게 답한 그녀는 더스틴에게 서신을 보냈다. 황후의 부름을 받아 같이 차를 마실 수 없을 것 같다는 거절의 서신이었다.

혹시라도 일찍 보냈다가 오전에 보자고 할까 싶어 점심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별말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라는 답신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평소 지랄 맞은 성격을 생각한다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반응이었다.

또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엘리시아는 일단 황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후 3시에 맞춰 입궁했다.

황후궁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시녀장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라시안 전하의 수업과 관련해 의논할 것이 있다고 하셨지만 그것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도 미친놈과의 약혼 소문 때문에 부르시는 거겠지.’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녀 역시 황후에게 돌려줘야 할 대답이 있었으니까.

라세트 공작이 더스틴과의 약혼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쉽게 하지 못했을 대답이기도 했다.

황후에게 답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엘리시아는 시녀장이 안내한 장소를 보고 내심 놀랐다.

지난번처럼 응접실일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방이었다. 게다가 황후궁에서도 제법 깊숙한 곳에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위치로 봐서는 사용하지 않는 방 중 하나로 보이는데.’

황후가 어째서 이런 은밀한 장소로 자신을 불렀는지 그녀가 의아해하고 있는 사이 시녀장이 노크를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들어오라는 황후의 목소리가 방안에서 흘러나왔다.

시녀장이 열어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엘리시아는 본능적으로 방 안의 모습부터 살폈다.

방은 좀 작은 것 빼고는 그녀의 침실과 구조가 비슷했다.

성인 3~4명은 잘 수 있을 듯한 커다란 캐노피 침대가 있고 욕실이 딸려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흑요석을 깎아 만든 테이블과 그에 어울리는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황후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본 엘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칠흑이 내려앉은 듯한 검은 머리카락과 남자답게 떡 벌어진 어깨. 뒷모습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환각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남자가 황후의 맞은편에 앉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케르?”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엘리시아는 아차 싶었다. 황후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급히 황후에게 다가가 예의를 갖췄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어서 와요, 후작.”

다행히 황후는 불쾌해하거나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도리어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자리를 권했다.

“그쪽으로 앉아요.”

“예.”

별다른 말이 없는 것에 안도하며 엘리시아가 소파로 다가가자 이케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담은 금안이 부드럽게 휘었다. 달달한 꿀이 뚝뚝 흘러 떨어지는 듯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이었다.

그 달콤함에 취해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잊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던 엘리시아는 흠칫 놀랐다.

혹시라도 황후가 그녀와 이케르와의 관계를 눈치챌까 싶어서였다.

엘리시아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이케르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쓸데없는 기우임을 깨달았다.

황후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연 것이다.

“그렇게 눈치 볼 것 없어요. 다 들었으니까.”

“예?”

“그대의 이번 애인이 데이모스 공작이라면서요.”

풍랑을 만난 듯 요동치던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또그르르 굴렀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맞기는 한데 ‘이번’ 같은 단어를 굳이 사용하실 필요가…….

들킨 것도 당혹스러웠지만 황후의 말이 이상하게도 그녀의 양심을 쿡 찔러왔다.

당황해하는 그녀를 보며 소리 없이 웃은 황후는 말을 덧붙였다.

“오늘 이 자리도 공작이 부탁해 만든 것이랍니다. 라세트 공작과 2황자의 감시로 후작을 만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엘리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케르가 황후를 움직였다는 소리가 아닌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녀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묵직한 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옆에서 대신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는데도 이렇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이케르의 인사에 황후는 두 눈을 곱게 접었다.

“별말을 다 하는군요. 나야말로 공작의 첫 부탁이 이렇게 소소한 것이라 놀랐답니다. 우리 라시안에게 공작이 해준 것들을 생각하면 어떤 어려운 부탁이라도 들어줄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카멜리아 후작.”

“예, 황후 마마.”

갑작스러운 황후의 부름에 엘리시아는 내심 긴장했다.

조금 전 이케르를 쳐다볼 때까지만 해도 황후의 얼굴에 어려 있던 옅은 미소가 그녀를 보는 순간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황후가 무엇을 물을지 짐작하는 데다 이미 답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역시나 엘리시아가 예상했던 물음이 황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후작에게 고민할 시간을 좀 더 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그렇지 못하군요. 그러니 이제 후작의 대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마음의 결정은 내렸습니까?”

“예, 황후 마마.”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황후마마께서 관리하고 계신 제 어머니의 사업, 돌려받고자 합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엘리시아의 대답에 황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후작의 그 말은 우리의 편에 서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 묻고 싶군요. 데이모스 공작과의 관계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라세트 공작과는 결코 같은 길을 갈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시아의 눈빛이 분노를 담고 서늘하게 빛났다.

그녀의 부모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줄스턴 자작이었지만 그 뒤에는 라세트 공작이 있었다.

그런 주제에 그녀와 카멜리아 후작가에 목줄을 씌우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그녀가 아끼는 가문들까지 함정에 빠트리지 않았던가.

엘리시아는 도저히 라세트 공작을 용서할 수 없었다. 루리엔과 하르에게 말했던 것처럼 끝까지 싸워보고 싶었다.

그녀의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황후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후작 그대에게는 피하는 것보다 부딪치는 것이 더 잘 어울리니까. 세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던 엘리시아는 이어진 황후의 말에 움찔했다.

“그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후작 그대가 세레나보다 한 수 위군요. 데이모스 공작을 고른 걸 보면 말이에요.”

칭찬이 분명한데 왜 이리 양심이 찔리는 건지.

황후가 말한 ‘고른다’라는 건 적어도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선택한다는 것이지, 이성이 완전히 나간 상태에서 아무거나 선택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명백히 후자였다.

슬쩍 눈을 내리깔아 황후의 시선을 피하던 엘리시아는 문득 연회의 밤을 떠올렸다.

‘그때는 망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케르의 몸 위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이었다.

황제파의 수장인 그와 몸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아득함이란. 그것도 그녀가 멱살을 쥐고 침대로 끌어들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좀 당황스럽기는 했네. 브리프까지 벗겼을 때는 많이 당황했었고.]

[손으로 움켜쥐었을 때는 놀랐지.]

[그러다가 내 위로 내려앉았을 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네. 무척 힘들어하는 것 같았는데 용케 넣더군.]

술집에서 들었던 그의 말은 그녀가 그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엘리시아는 어쩐지 더워지는 것 같아 손을 들어 슬쩍 부채질을 했다.

그때만 해도 점잖게 미친 것 아니냐고 의심했던 그와 이런 관계로 발전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녀의 손에 이케르의 멱살이 쥐어진 건 정말이지 천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뭐, 운도 실력의 일부라잖아.’

애써 민망함을 누르며 좋은 쪽으로 돌려 생각하고 있던 그녀의 귀에 황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쨌든 후작이 우리를 선택해줘서 안심했어요. 내심 걱정했거든. 혹시라도 라세트 공작의 협박 때문에 그의 편에 서는 건 아닌가 하고.”

엘리시아는 주제가 바뀐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황후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결의에 차 단단하게 빛났다.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듣던 중 가장 반가운 말이네요. 자, 그럼 이제 용무가 다 끝났으니 방해꾼은 퇴장해 볼까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황후는 두 남녀가 자신을 따라 일어서자 엘리시아를 보며 말했다.

“이야기가 다 끝나면 응접실로 와요. 후작 그대가 돌려 달라 한 계약서를 준비해 둘 테니.”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그리고.”

그녀와 이케르를 번갈아 쳐다본 황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방이니, 좋은 시간이 되기 바라요.”

너희가 뭘 할지 뻔히 안다는 듯한 웃음기가 달린 황후의 짓궂은 목소리에 엘리시아는 또다시 민망해져 눈을 내리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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