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단지 쳐다만 볼 뿐 이케르가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데도 엘리시아의 뒷덜미가 짜릿하니 달아올랐다. 손끝으로 더듬는 듯한 사내의 시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가 선택한 장소가 그녀의 흥분을 더욱 부추겼다.
당연히 침대에서 사랑을 나눌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예상 밖이 아닌가.
엘리시아는 그녀의 입술에 닿아오는 더운 숨결을 쫓아가 입술을 붙였다.
매끄럽게 혀를 굴려 그의 입술을 적신 그녀는 짙은 보랏빛 눈동자를 기대로 빛냈다.
“당신에게 이런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의외에요.”
“이런 취향?”
“침대를 더 선호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테이블 위라니.”
평소 점잖고 신사다운 그도 좋지만 가끔 이렇게 점잖게 미친 그도 좋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속삭이자 이케르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이유가 좀 있어서.”
“이유요?”
“그대의 머리가 흐트러지면 곤란하거든. 화장도.”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사랑을 나누더라도 그녀의 차림새가 그대로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언제라도 멀쩡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설마 이케르가 말한 불청객이 그 미친놈은 아니겠지?’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손이 단정하게 잠겨 있던 자켓을 풀고 들어와 얇은 셔츠 위로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쥔 것이다. 본능을 자극하는 낮고 깊은 목소리도 함께였다.
“곧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장소 따위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네. 상대가 누구냐가 중요하지.”
아, 진짜. 그런 말을 툭툭 던지면 어쩌라고.
미친놈에 대한 생각은 순식간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화장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그에게 진한 키스를 날리고 싶었지만 엘리시아는 이성을 총동원해 참았다.
대신 손을 뻗어 그가 하고 있던 크라바트를 풀어버린 그녀는 그가 입고 있는 셔츠의 첫 단추 역시 능숙하게 풀어냈다.
툭 소리와 함께 단추가 풀리며 반쯤 가려져 있던 사내다운 목울대가 온전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미동조차 없는 이케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는 계속해서 손을 놀렸다.
두 개가 풀리며 깊게 파인 매력적인 쇄골이, 세 개가 풀리면서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풀어 헤쳐진 셔츠 속으로 미끄러지듯 손을 밀어 넣은 엘리시아는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단단한 탄력이 느껴지는 가슴 아래 밀도 높게 자리 잡은 근육들은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무척이나 오랜 시간 꾸준하게 훈련을 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케르의 몸을 더듬으며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엘리시아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입술 바로 위에서 도발적으로 속삭였다.
“시간 없다면서요. 계속 안 하십니까?”
“그대가 원한다면.”
기다렸다는 듯 올라온 길쭉한 손가락이 그녀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단추가 빠르게 풀려나가며 풀어 헤쳐진 셔츠 사이로 새하얀 레이스로 된 가슴 가리개가 드러나자 사내의 손이 그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가려져 있다고는 하나 얇은 레이스다 보니 손바닥의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전달되면서 그녀의 몸 역시 바짝 흥분했다.
느릿하게 안으로 파고든 커다란 손이 봉긋한 가슴을 움켜짐과 동시에 미끄러지듯 내려간 이케르의 입술이 그녀의 목과 쇄골에 내려앉았다.
뭉근한 손놀림과 함께 얇은 피부 위로 스며든 뜨거운 숨결이 야릇한 감각을 이끌었다.
새하얀 목줄기를 뒤로 젖힌 엘리시아의 입에서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음…….”
항상 느끼는 거지만 느긋하고 점잖아 보이던 손길이 이럴 때는 정말이지 음란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 더 좋았지만.
사내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예민한 곳을 문지르며 자극하자 엘리시아는 나직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쇄골에 자잘한 키스를 퍼붓던 이케르가 살짝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열기가 느껴지는 숨을 내뱉으며 그는 더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으응…… 아.”
달뜬 신음소리가 벌어진 엘리시아의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아랫배가 단단하게 뭉치고 아래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의 입이 주는 느낌도, 단단하고 거친 손바닥이 몸을 어루만지는 느낌도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벨트가 풀리고 바지가 벗겨져 나가면서 서늘한 공기가 맨다리에 닿아오자 엘리시아는 오싹하고 솜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새하얀 가녀린 다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에 오소소소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그는 그녀의 가녀린 발목을 한 손으로 쥐고는 비단 양말 바로 위 맨살에 입술을 내렸다.
“흐응…….”
부드럽고 말캉한 것이 뜨거운 숨결을 남기며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자극적인 느낌에 엘리시아의 등골을 타고 전율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상체를 굽힌 채 서서히 다가오는 이케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점잖음을 벗어던진 그의 금안은 그녀를 한 번에 집어삼킬 것처럼 위험스레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여린 허벅지 살에 닿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 자신의 흔적을 짙게 남기자 엘리시아는 더운 신음을 토했다.
젖은 속옷 위로 열기가 닿으며 속옷이 다리를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천박하고 상스러운 마찰음에 그녀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오싹한 소름이 돋으며 허리가 낭창하게 휘어졌다. 밀어닥치는 쾌락으로 인해 눈가에 열이 오르고 정신이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읏….”
아찔함을 견디지 못하고 탁하게 흐려진 엘리시아의 눈동자에 그가 고개를 드는 것이 비쳤다. 달칵 하고 벨트 풀리는 소리도 함께.
그녀의 양쪽 허벅지가 그의 손에 의해 한껏 벌려지며 묵직하고 거대한 것이 천천히 밀고 들어왔다.
또다시 가해지는 자극적인 통증과 쾌감에 엘리시아가 신음을 터트리며 몸을 휘자 한 치의 틈도 없이 몸을 바짝 붙인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위험스럽게 속삭였다.
“이번엔 가능한 무겁게 빌려드리도록 노력해보지. 주인께서 원하는 것이라면.”
⚜ ⚜ ⚜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마친 더스틴은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을 확인한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전달된 급한 서류들로 인해 예상했던 것보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늦춰졌지만 별 상관없을 듯했다. 자리를 비운 그 자가 돌아왔다면 시종장이 알리러 왔을 테니까.
집무실을 나오자 꽃다발을 소중하게 안고 있던 시종장이 곧바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데이모스 공작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스틴의 눈매가 매서워지며 입매가 일자로 단단하게 다물렸다.
그는 지금 엘리시아와 이케르가 황후궁에서 밀회 중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오페라 극장에서 함정을 판 것은 물론 실피르의 행적까지 꼼꼼하게 확인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했다.
어째서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감이 둘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 같다고 끊임없이 경고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황후의 부름을 받아 같이 차를 마실 수 없다는 엘리시아의 거절 서신이 도착했다.
처음에 들었던 불쾌한 마음은 곧 사라지고 어쩌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스틴의 머릿속을 채웠다.
데이모스 공작이라면 충분히 황후를 움직여서 엘리시아를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황후의 암묵적인 묵인 하에 밀회도 가능하겠지.
그는 엘리시아가 황후를 만나기로 한 시간에 시종장을 황제궁으로 보냈다.
데이모스 공작이 아침 일찍부터 황제의 부름을 받아 입궁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데이모스 공작은 황제의 집무실에도 자신의 집무실에도 보이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입궁하기 20여 분쯤 갑자기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확인한 더스틴은 확신을 가졌다.
데이모스 공작이 엘리시아를 만나러 간 것이 분명하다고.
더스틴은 엘리시아가 입궁하면 약간의 시간 텀을 두고 황후궁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비 약혼녀를 잠시 만나러 왔다 하면 황후도 막아설 명분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들어온 급한 서류 건으로 인해 30분 정도 자리에 붙잡혀 있다가 이제야 움직인 것이다.
데이모스 공작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과 엘리시아를 만나고 있을 거라는 불쾌감이 뒤섞인 채 더스틴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시종장이 재빨리 안고 있던 꽃다발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지시를 받고 황실 정원에서 꺾어온 붉은 장미로 만든 꽃다발이었다.
“제법 볼만하군.”
화려한 꽃다발을 흘깃 본 더스틴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엘리시아에게 잘 어울릴 만한 꽃다발이었다.
꽃다발을 든 그가 궁을 빠져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 넷이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평소 그가 가까이 두는 시종들이었다.
더스틴은 시종들을 이끌고 황후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후궁 바로 앞에 도착한 그는 시종들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잘 지켜보도록.”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시종들은 곧바로 자신들이 맡은 장소로 이동했다.
그런 그들을 쳐다보는 더스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정말로 데이모스 공작이 엘리시아를 만나기 위해 황후궁을 방문했다면, 그래서 지금 저 안에 있다면, 그에게 들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몰래 빠져나올 것이 분명했다.
‘황후궁에서 나오는 길은 모두 4개. 어디로 나오든 걸릴 수밖에 없지.’
자신이 판 완벽한 함정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더스틴은 황후궁 정문으로 들어섰다.
황후궁을 지키는 기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자 그는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예비 약혼녀 카멜리아 후작은 지금 어디에 있나?”
“응접실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사의 대답에 더스틴은 보란 듯 늘어트렸던 꽃다발을 들어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황후마마께 아뢰게. 2황자가 예비 약혼녀에게 줄 것이 있어 잠시 들렸다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전하.”
기사가 사라진 뒤 몇 분 지나지 않아 황후의 시녀장이 기사와 함께 돌아왔다.
그녀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황후의 말을 더스틴에게 전했다.
“죄송하오나 황후마마께서는 후작님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신 중이라 지금 바로는 곤란하다 하셨습니다. 돌아가 계시면 이야기가 다 끝나고 사람을…… 저, 전하!”
하지만 더스틴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럼 꽃다발만 잠깐 전해주고 오지.”
시녀장의 말을 잘라먹은 그는 거리낌 없이 황후궁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전하, 기다려주십시오. 황후마마께서……!”
뒤에서 다급한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을 황후궁 안으로 들이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그는 확신했다.
엘리시아와 데이모스 공작이 분명 이곳에 같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