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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99/133)

99화

‘분명 두 연놈이 만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잠깐 얼굴만 보겠다는데 돌려보내려 할 리 없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문 채 응접실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더스틴의 두 눈은 의심과 질투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기사가 들어간 후 시녀장이 나올 때까지의 시간만으로 의심스러운 정황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걸리는 시간 정도였다.

아무래도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곧바로 시녀장을 내보낸 것 같았다. 그리고 데이모스 공작과 엘리시아에게 그의 방문을 바로 알렸을 것이다.

밀회가 황후궁의 어느 방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응접실이 황후궁 정문에서 가까운 만큼 비슷하게 도착하거나 그가 먼저 도착할 확률이 더 높았다.

만약 그가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엘리시아가 없거나 급하게 돌아온 듯한 흐트러진 모습이라면 그의 의심은 더 이상 의심이 아닐 것이다.

뒤에서 기다려달라는 시녀장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더스틴은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전 황후궁에 두세 번 와본 적이 있었기에 응접실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응접실에 도착한 더스틴은 잠시 멈춰 서서 닫혀 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과연 저 안에 엘리시아가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 것인가.

그것에 따라 앞으로 그녀의 처우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명분이 생기면 가둬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입매를 비틀고 있던 그는 숨찬 시녀장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저, 전하, 기다려…….”

황후의 말도 무시한 더스틴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연 그는 응접실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섰다.

하지만 내부의 모습은 그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응접실 안에는 은은한 차향이 흐르고 있었고 소파에는 두 여인이 찻잔을 든 채 상반되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품위가 느껴지는 드레스를 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우아한 중년여인과 단정하게 정복을 차려 입고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매혹적인 젊은 여인.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 모두 명화 속에서 갓 뽑아낸 것처럼 그린 듯 아름답다는 것과 놀란 눈빛으로 더스틴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만들어진 자리라고는 볼 수 없는 차분한 분위기에 더스틴의 눈빛이 동요했다. 하지만 황후의 서늘한 목소리에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황자?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황후는 불쾌감이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대해 책망하는 시선도 함께였다.

예상이 빗나가 당혹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이런 정상적인 상황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더스틴은 재빨리 예의바른 미소를 머금고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황후마마. 제 예비 약혼녀에게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을 선물하고 싶어 이렇게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꽃이 시든다기에 조급한 마음에.”

미소와는 달리 뻔뻔스러운 그의 대답에 황후의 눈빛에 불쾌감이 더욱 짙어졌다.

“의외로군요. 황자가 내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할 만큼 로맨틱한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사내가 사랑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모양입니다. 부디 눈먼 사내의 무례를 황후마마의 넓디넓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역시 미친놈.

입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매끄럽게 변명을 늘어놓는 더스틴을 보며 엘리시아는 어이없다는 눈빛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 앞에서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다니.

뒤통수를 한 대 갈겨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커다란 장미꽃다발이 눈앞에 들이밀어지자 흠칫 몸을 굳혔다.

“엘리, 그대를 위해 준비했어. 받아주겠나?”

언제 다가온 건지 더스틴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고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수려한 외모. 동화 속에서 나오는 왕자님 같은 외모를 보며 엘리시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겉껍데기만 보면 참 정상적인데 말이지. 속도 정상이면 얼마나 좋아.’

미친놈이 주는 꽃다발 따위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거절했다가는 또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몰라 그녀는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꽃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주는 놈이 문제지.

“감사합니다, 전하.”

올라가지 않으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잡아 올려 엘리시아가 인사하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더스틴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오늘 못 마신 차는 내일 마시도록 하지.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해, 나의 엘리.”

나의 엘리? 누가 네 엘리야?

엘리시아는 구겨지려는 얼굴을 가까스로 바로 했다. 하지만 입매가 바르르 떨리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즐거운 눈빛을 떠올린 더스틴은 손을 떼고 황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례를 끼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래요. 다음에는 이런 불쾌한 일이 없도록 해줬으면 좋겠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전혀 알아들은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만 번드르르하게 한 더스틴은 곧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황후와 엘리시아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한 타이밍에 돌아와서 다행이었어요, 후작.”

황후의 말에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녀가 응접실에 도착한 것은 더스틴이 들어오기 2~3분 정도 전이었다.

자리에 앉아 자세와 표정을 가다듬고 찻잔을 든 지 얼마 안 돼 그가 들이닥친 것이다.

시간 맞춰 온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녀는 응접실로 오기 전 기억을 떠올렸다.

⚜ ⚜ ⚜

“후우.”

거칠어진 숨을 고른 이케르는 새하얀 목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는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능한 무겁게 빌려준다 하더니 거짓말이 아니었다.

프라이빗 룸에서 했던 것은 전초전이라고 말하는 듯 그는 정말 그녀의 몸과 정신을 녹진하게 녹여놓았다.

그 짧은 사이에 대체 몇 번을 간 건지 모르겠다고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그는 딱 한 번 사정했는데 말이다.

연회의 밤이나 별장에서의 밤을 생각한다면 그가 정말 많이 참고 움직였다는 것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기다려.”

그녀의 볼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이케르가 떨어져 나가자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어 엘리시아는 몸을 살짝 떨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뒤처리를 한 그는 흐트러졌던 바지를 말끔하게 정리하고는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나온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건이 들려 있었다.

“깨끗하게 해줄 테니 조금만 참아.”

“읏……!”

따스한 수건이 하복부에 닿아오며 그의 손가락이 잔뜩 민감해져 있는 몸속으로 파고들자 엘리시아는 들뜬 신음을 내뱉었다.

자신의 흔적을 깨끗하게 끌어낸 이케르는 수건으로 그녀의 노출된 하반신뿐 아니라 주변까지 꼼꼼하게 닦아내고는 벗겼던 속옷을 다시 입혀주었다.

그가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바지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나직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그자가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자? 더스틴을 말하는 건가?

엘리시아가 귀를 쫑긋하자 이케르는 피식 웃으며 바지를 가지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꽤나 마음이 초조했던 모양이군. 5분 정도는 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 미친놈, 아니 2황자 말입니까?”

그녀의 물음에 그는 들고 온 바지를 입혀주며 답했다.

“그래. 급한 서류들을 넘기고 왔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낸 모양이야.”

“그럼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서둘러야겠네요.”

허벅지까지 올라온 바지를 끌어 올리고 벨트를 채운 엘리시아는 풀어져 있던 셔츠의 단추도 단정하게 채웠다.

자켓을 바로 한 그녀는 급히 테이블에서 내려오려다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 때문이었다.

확실히 프라이빗 룸에서보다 무겁게 빌렸구나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때 이케르의 두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왔다.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가볍게 그녀를 들어 올린 그는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주며 속삭였다.

“그렇게 서두를 것 없어. 그자가 황후궁까지 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빠져나갈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저도 응접실로 돌아가야 하고.”

걱정 어린 엘리시아의 말에 이케르는 소년처럼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속삭였다.

“황후마마께서 이 방을 특별한 방이라고 하신 것은 이유가 있지.”

“예?”

“그래도 미리 움직여서 나쁠 것은 없으니 이쪽으로.”

풀어진 크라바트를 떼서 주머니에 넣은 이케르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배려한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그가 그녀를 데리고 향한 곳은 방문이 아닌 욕실이었다.

“여기는 왜……?”

의아한 눈빛으로 욕실을 둘러보던 엘리시아는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케르가 막힌 벽 옆 어딘가를 만지자 갑자기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입구가 생긴 것이다. 열린 입구 뒤쪽으로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는 통로가 보였다.

“설마 비밀통로입니까?”

황궁에 비밀통로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엘리시아는 놀라 물었다.

그러자 이케르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는 여유롭게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속삭였다.

“황후마마께서 알려주시더군.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그자가 오기 전에 응접실까지 안전하게 모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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