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33)

100화

비밀통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좁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너비인 데다 벽 곳곳에 박혀 있는 발광석들이 은은한 빛으로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엘리시아는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이케르를 흘깃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넘어질까 싶은지 그녀의 손을 단단하게 감싸 쥐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도 그렇고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갈까 봐 느릿한 발걸음도 그렇고….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랑을 나눈 것 때문에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갈까 싶어 배려해 주고 있다는 것을.

‘근데 이렇게 천천히 가도 괜찮은 건가?’

문득 걱정이 든 그녀는 이케르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좀 더 빨리 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미친놈이 먼저 도착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아직은 괜찮아. 2황자 궁에서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 있으니.”

“그래도요. 저도 저지만 이케르 당신도 빠져나가야 하잖아요.”

걱정스러운 엘리시아의 말에 이케르의 눈매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그럼 좀 빨리 가볼까?”

“예, 그게 좋을…… 이, 이케르?”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시아는 당혹한 얼굴로 다급히 그를 불렀다.

손을 놓은 그가 갑자기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든 것이다.

“이게 무슨……! 내, 내려주십시오.”

당황한 그녀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단단한 그의 팔은 그녀를 옭아맨 채 꼼짝하지 않았다.

동시에 웃음기 어린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울렸다.

“빠르게 가고 싶다며.”

이케르는 엘리시아를 안은 채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들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의 입가에 어려 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면서 엘리시아는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다는 눈빛을 띠고 있는 남자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게다가 그녀도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좋았다. 조금의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받쳐주는 그의 팔도, 넓고 아늑한 품도.

이케르에게 얌전하게 안긴 채 그녀는 시간 부족으로 방에서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조만간 라세트 공작이 그대에게 압박을 넣을 거야. 라시안 전하의 사격 스승을 그만두라고.”

“그건 저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당분간 수업하지 말라는 거 보면 각이 대충 서죠. 갑자기 그만두라고 하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시간 끌기라는 걸요. 그런데요?”

“그럼 자연스럽게 라시안 전하의 궁을 방문할 명분이 생기겠지. 그때 그대의 고민을 해결해 줄 분과 만나는 건 어떤가?”

“제 고민을 해결해 줄 분이요? 설마……!”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한 사람의 얼굴에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어졌다.

라세트 공작에게 묶인 가문들의 목줄을 풀어줄 힘을 지닌 사람은 제국에 단 한 명뿐이었다.

이케르는 지금 그녀에게 황제의 지원을 받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고 있었다.

“조용히 자리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대가 원한다면.”

엘리시아로서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그가 제시한 방법은 그녀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황후의 손을 잡기로 이미 결심하지 않았던가. 그 역시 그것을 알기에 권하는 것이리라.

엘리시아가 좋다고 대답을 하려 했을 때 이케르의 발걸음이 멈췄다. 왼쪽에 닫혀있는 문이 있는 곳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아쉬운 눈빛을 떠올린 이케르는 엘리시아를 내려주었다. 쉽게 깨지는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를 대하는 그의 손길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대답은?”

땅에 내려선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물음에 아무 말 없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그녀를 단단하게 안아왔다.

이 따뜻한 품 안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뭘 묻습니까? 제 대답이 어떨지 이미 알고 계시면서.”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

“……고마워요, 이케르. 당신이 제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고개를 들고 이케르와 시선을 마주한 엘리시아는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했다.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그녀와 친우들은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한, 무척이나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역경들은 남아있었지만 그가 함께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빛을 통해 그녀의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그녀의 감사 인사에 놀란 빛이 살짝 깃들었던 이케르의 두 눈이 반달처럼 우아하게 휘어졌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 내 주인께서.”

고개를 숙인 그는 엘리시아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마법과도 같은 말을.

“그대라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 ⚜ ⚜

이케르가 안내해준 문은 응접실로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엘리시아가 안으로 들어가자 차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던 황후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응접실 한쪽 구석에 준비되어 있던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엘리시아는 몇 군데 흐트러진 곳을 정리하고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찻잔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더스틴이 들이닥쳤고, 결국 장미꽃다발만 쥐여 준 채 나가버린 것이다.

정말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 사람은 역시 대단해. 어떻게 이렇게 매번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는 걸까?’

엘리시아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상대의 생각과 동선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잘 빠져나갔겠지?’

더스틴 따위에게 걸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쯤 이케르는 어디에 있을까 엘리시아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황후가 봉투 하나를 테이블에 올리더니 그녀 쪽으로 밀어주었다.

“받아요, 후작. 그대가 돌려 달라 한 계약서랍니다. 오랜 시간 기다려서 이제야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는군요.”

황후의 말을 들으며 봉투를 든 엘리시아는 속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인장이 찍혀 있지 않은 복사본과 달리 선명하게 찍혀 있는 황후의 인장이 원본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내용물을 다시 봉투 속에 넣은 그녀는 황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 시간 맡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유용하게 쓰겠습니다.”

“나 역시 고맙게 생각해요. 후작 그대와 적이 되지 않게 해줘서. 그리고 이것도 읽고 서명해줬으면 하는데.”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엘리시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묻자 황후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황후궁의 비밀통로에 대한 비밀 유지 서약서에요. 후작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건 서면으로 확실히 해두는 걸 좋아해서.”

“알겠습니다.”

내용을 확인한 엘리시아는 테이블 한쪽에 준비되어 있던 펜을 들어 서약서에 서명했다.

그녀가 다시 서류를 돌려주자 황후는 피식 웃었다.

“데이모스 공작에게도 똑같은 서약서를 2년 전에 받았었죠.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알려준 거였는데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네요.”

“어, 음, 죄송합니다,”

괜스레 찔린 엘리시아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황후는 온화하게 웃었다.

“후작이 사과할 건 없어요. 도리어 난 기뻤으니까. 두 사람에게 뭔가라도 해줄 수 있어서. 난 공작도 그대도 마음에 들거든. 두 사람 결혼하게 되면 후작의 드레스는 세레나 대신 내가 해주고 싶네요.”

결혼?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당혹감을 띠고 데구르르 굴렀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이제 막 만나기 시작해서요. 아직 결혼을 말하기에는 좀 이른 것 같습니다만…….”

“그런가요? 두 사람이 서로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당연히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그렇게 티가 났다고?

남들 눈에 보일 정도로 자신이 감정을 드러냈다는 것에 머쓱해진 엘리시아가 눈을 내리깔고 있자 황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긴 이제 막 만나기 시작했다면 결혼은 이르긴 하네요. 내 말이 부담되었다면 미안해요, 후작.”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난 두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네요. 무척 잘 어울리거든.”

“어…… 노력해 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황후의 칭찬에 당황해 이상한 답변을 내놓은 엘리시아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곤란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소리없이 웃은 황후가 화제를 돌려주었다는 것이었다.

“라시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올 겁니다. 그 전에 우리는 담소나 나누지요. 이제 같은 배를 탔으니 할 이야기가 많군요.”

“예, 황후 마마.”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케르와 그녀가 무척 잘 어울린다는 황후의 칭찬은 엘리시아에게 있어 기분 좋은 것이었다.

어쩐지 남은 시간이 즐거울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 ⚜ ⚜

더스틴이 황후궁을 나오자 시종 하나가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의 지시를 받고 황후궁에서 외부로 나가는 길을 감시하던 시종들 중 하나였다.

“그자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더스틴의 잘생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시종의 대답대로라면 데이모스 공작은 황후궁에서 나오지 않았거나 황후궁에 오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황후궁 안에 숨어있을 수도 있으니 계속해서 감시해. 혹시라도 나타나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그의 지시를 전하기 위해 시종이 돌아가자 더스틴은 황제 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데이모스 공작이 돌아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직까지 황후궁에 있다면 여전히 공작의 집무실이나 황제의 집무실에 모습이 보이지 않을 터였다.

평소보다 빠르게 발걸음을 놀려 더스틴이 황제의 궁에 들어섰을 때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앞서가는 장신의 남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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