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 남자답게 떡 벌어진 어깨, 검술로 다져진 훤칠하고 단단한 체격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더스틴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정말로 황후궁에 가지 않았던 건가?’
이케르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미간을 좁혔던 그는 곧바로 공작에게 따라붙었다. 오페라 극장에서와 같은 일을 또다시 겪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때 공작의 눈빛에 눌렸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공작이 느릿하게 걷고 있음에도 다리가 원체 길어서인지 더스틴은 발걸음을 빠르게 하고서야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데이모스 공작.”
그의 부름에 이케르가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뒷모습만큼이나 공작의 앞모습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깔끔했다. 깔끔하게 넘겨 올린 머리카락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고 크라바트 역시 단정하게 매여 있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그에게 예를 갖추는 공작은 무척이나 여유롭고 느긋해 보였다.
그 모습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짙은 눈썹을 꿈틀한 더스틴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 다녀오는 모양이군. 계속 보이지 않던데.”
“3황자 전하의 부름을 받고 갔다 오는 길입니다. 절 찾으셨습니까?”
날 선 더스틴의 목소리와 달리 이케르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정적을 앞에 두고도 담담한 그 모습이 마치 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더스틴은 속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역시 재수 없는 놈.’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입매를 살짝 비틀며 답했다.
“물어볼 것이 있어 찾았는데 해결했네.”
“해결되셨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도 외출하셨던 모양입니다.”
“황후궁에 잠깐 다녀오는 길이야. 마침 내 예비 약혼녀가 방문했다고 해서 꽃다발을 주러 갔었지. 날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이 귀엽더군.”
일부러 도발적인 말을 던지면서 더스틴은 이케르의 눈빛과 표정의 변화를 날카롭게 살폈다.
하지만 공작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로맨틱하시군요. 후작이 기뻐했겠습니다.”
“기뻐했지. 얼굴까지 붉히며 좋아하는 걸 보니 자주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좋은 생각이십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여유로운 눈빛, 무뚝뚝한 말투.
오페라 극장과 황후궁에서 두 번의 헛발질과 평소와 똑같은 공작의 모습에 더스틴은 가지고 있던 의심의 대부분을 내려놓았다.
‘엘리와 공작 사이에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나 보군.’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케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가 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바쁜 공작을 붙들고 있었군. 가 보게.”
“그럼 이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이케르는 몸을 돌렸다.
‘폐하의 집무실로 가나 보군.’
이케르가 걸어가는 방향을 확인한 더스틴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계속해서 신경을 거스르던 것이 사라졌기에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밝았다.
반대로 황제의 집무실로 향하는 이케르의 입가에는 옅은 냉소가 떠올라 있었다.
‘엘리가 좋아했다라……. 망상이 심하시군, 황자 전하께서.’
엘리시아의 성격이라면 좋아하기는커녕 이걸 왜 주나 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마지막에서야 애써 접대용 미소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가 더스틴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시아가 그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는 미친놈에게 질투하는 멍청이는 아니었으니까.
[……고마워요, 이케르. 당신이 제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에 진심을 담고 속삭이던 엘리시아의 모습을 떠올린 이케르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다가가기만 해도 가시를 곤두세웠던 그녀가 이제는 스스로 다가와 안아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위로해달라면서, 빌려주면 기운이 날 것 같다면서 앙큼한 표정으로.
그런 엘리시아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완벽하게 그녀의 남자가 된 것 같아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마침 그것도 완성되었다고 하니 엘리의 기분이 어떤지는 저녁에 확인해보면 되겠군.’
엘리시아에게 감시가 붙자마자 이케르는 테스란에게 의뢰를 가장한 부탁을 넣었다.
마탑에서는 현재 테스란 밖에 만들지 못하는 것으로 제국에서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이케르가 유일했다.
물론 그건 이케르가 부탁해서가 아니라 테스란이 억지로 떠넘긴 것이었지만.
지금까지는 상대가 테스란이었으니 일 년에 한 번 쓸까 말까였지만 엘리시아가 된다면 자주 쓰게 될 것 같았다.
“앞으로 그녀가 다른 걸 빌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들면 되는 건가.”
좀 더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황제가 기다리는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저녁이 되어 후작저로 돌아온 엘리시아는 마차에서 내리려다가 현관 앞에 서 있는 루리엔을 보고 놀랐다.
그녀의 친우가 마중 나오는 경우는 보통 다급한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마차에서 급히 내린 엘리시아가 묻자 루리엔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안도의 표정을 떠올렸다.
“오늘은 괜찮네.”
“응?”
“어제 너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들어왔잖아.”
“아…….”
그제야 엘리시아는 루리엔이 마중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제 황비와 더스틴에게 시달려 창백하고 핼쑥해진 상태로 들어왔더니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걱정을 해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걱정을 시킨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볼을 긁적이며 그녀는 황후에게 받은 봉투를 건넸다.
“이거 받아. 사업 계약서. 황후마마께서 주셨어. 그리고 황비궁도 아니고 황후궁인데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잖아.”
“있을 리 있지. 2황자라면 불시에 들이닥치고도 남을 성격이니까. 괜히 미친놈이 아니잖아.”
헉, 얘가 어떻게 알았지?
엘리시아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루리엔은 피식 웃었다.
“오페라 극장에서 했던 짓을 보면 금방 답 나오지. 그래서 그 장미꽃다발은 2황자가 준 거고?”
어느새 루리엔의 시선은 엘리시아가 들고 있는 꽃다발에 닿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닿기 싫다는 듯 엄지와 검지로만 잡고 있는 꽃다발에.
“응. 네 말대로 갑자기 쳐들어오더니 던져주고 가더라. 역시 미친놈이었어.”
“각하와의 밀회는 다행히 들키지 않았나 보네. 뭐, 각하께서 들킬 분도 아니지만.”
속으로 더스틴을 욕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루리엔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나도 이케르를 보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떻게 안거야? 설마 황후궁에도 사람을 심어놓은 거야?”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심기는 뭘 심어. 나무도 아니고. 네가 황후마마께 부름을 받았다고 할 때부터 각하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만에 하나 아니라면 너 실망할 거 아냐. 표정 보니까 만난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대단하다, 루리엔. 난 아무 생각도 못 했는데.”
“넌 그 전날 황비하고 2황자에게 시달려서 이미 반쯤 넋을 빼놓고 있었으니까.”
“뭐, 그랬긴 했는데.”
“아마 2황자도 나처럼 생각하고 들이닥쳤을 거야. 너와 각하의 밀회 장면을 잡아내려 했겠지. 물론 오페라 극장에서처럼 허탕 쳤겠지만.”
고소하다는 듯 피식 웃은 루리엔은 엘리시아를 보며 장난스레 물었다.
“그래, 각하와 만나니 즐거웠어?”
“응. 이케르랑 만나는 건 항상 즐거워. 계속해서 같이 있고 싶을 만큼.”
자신을 안아주던 이케르를 떠올린 엘리시아가 해죽거리자 루리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이네, 엘리. 네가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는 건.”
“그런가?”
“이렇게 들뜬 모습도 처음이고. 맨날 만나기 귀찮다는 이야기만 듣다가 그런 얘기를 들으니 신선하기는 하다.”
“신선하다고까지 할 거야…….”
쑥스러운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는 엘리시아를 보면서 루리엔은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친우는 이제야 뒤늦은 첫사랑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손을 뻗어 엘리시아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미친놈의 손때가 묻은 기분 나쁜 것을 친우의 손에 놔둘 생각은 없었다.
“이거 어떻게 처리해줄까? 저택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생각은 아닐 거고.”
루리엔의 물음에 엘리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꽃은 죄가 없잖아. 그냥 정원에 뿌려놓으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겠지.”
“알았어. 그렇게 처리해줄게. 그리고 네 앞으로 소포 하나가 왔더라.”
“소포?”
“검은색 고양이가 물고 왔던데.”
검은색 고양이가 소포를 물고 왔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얘가 꿈이라도 꿨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엘리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자 루리엔은 들고 있던 꽃다발로 그녀의 머리를 콩 때렸다.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아야, 그건 아닌데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 고양이가 무슨 소포를 배달해.”
“소포 발신지가 마탑인 걸 보면 마탑에서 키우는 고양이인가 보지. 어떤 마법사들은 영리한 동물을 길들여서 수족처럼 부리기도 한 대. 나도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신기하네. 그나저나 마탑에서 나한테 올 소포가 뭐가 있지….”
“그러게. 최근에 마도구 주문한 거 있어?”
“아니? 그런 거 주문한 적 없는데.”
엘리시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루리엔은 저택 안을 눈짓했다.
“올라가 봐. 중요한 것 같아서 침실에 가져다 놨어.”
“응, 고마워.”
고양이가 소포 배달이라니,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엘리시아는 침실로 향했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화장대 위에 놓인 소포 상자가 보였다. 루리엔이 말한 대로 소포에는 마탑 표시가 붙어있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며 엘리시아는 상자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손을 대자마자 상자가 자동으로 열렸다.
“인식 마법이 걸려있는 건가?”
역시 마탑답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상자 속을 들여다보았다. 상자 속에는 카드 하나와 주먹만 한 불투명 구슬이 들어 있었다.
엘리시아는 손을 뻗어 카드를 집어 들었다. 접힌 카드를 펴자 수려한 필체로 써진 문장이 보였다.
[이케르 녀석의 부탁을 받아 보내드립니다. 불이 깜빡깜빡 들어오면 톡톡 두드려주시면 됩니다. - 테스란 레커드.]
카드에 써진 이름을 확인한 그녀는 놀랐다.
테스란 루커드라면 임시회의 때 이케르가 데려왔던 마탑의 차기 후계자였다.
“이게 뭐기에 이케르가…….”
카드를 내려놓은 엘리시아가 투명한 구슬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구슬에 깜빡깜빡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