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구슬이 깜빡이기 시작하자 당황한 엘리시아는 문득 카드에 적혀 있던 테스란의 말을 떠올렸다.
“이렇게 하는 건가?”
그녀가 손가락으로 구슬을 두 번 톡톡 두드리자 구슬에 환하게 빛이 들어오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리, 거기 있나?]
깜짝 놀란 엘리시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야 이거? 이케르 목소리가 왜 구슬에서 나와?”
당황해 그녀가 중얼거리는 사이 구슬에서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엘리?]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이케르의 것임이 확실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엘리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구슬에 대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케르?”
[그래, 다행히 잘 들리나 보군.]
“그, 어,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지금쯤 공작저에 있을 이케르와 대화라니.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상황에 당혹해하며 그녀가 묻자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테스는 이걸 통신구라고 하더군.]
“통신구요?”
[원거리에 있는 상대와 대화할 때 사용하는 마도구지.]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이 마도구라는 것을 알게 된 엘리시아는 신기한 눈빛으로 통신구를 내려다 보았다.
“마법으로 이런 것도 가능하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이번에 마탑에서 낸 시제품인가요?”
[시제품은 아니야. 현재로서는 테스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라.]
“그래서 당신이 그분에게 부탁하신 거군요. 이건 정말 총만큼이나 놀랍습니다. 상용화하면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그 녀석도 몇 년째 고민 중인 것 같더군. 상용화를 하려면 사용되는 마법 수식도, 소비되는 마력량도 더 줄여야 하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야.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크기가 많이 작아지긴 했어.]
이케르의 설명을 듣고 있던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예전이라면 그는 이미 통신구를 사용해봤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것 말고도 통신구를 가지고 계신 겁니까?”
[억지로 떠맡은 것이 하나 있긴 한데 잘 쓰지는 않아. 하지만 이건 앞으로 자주 쓰게 될 것 같군.]
별것 아닌 말인데도 어째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지. 슬그머니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녀는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황후궁에서는 무사히 빠져나가신 겁니까? 들키지는 않았고요?”
[걱정할 것 없어. 이쪽은 잘 처리했으니. 그쪽은 어땠나?]
“그 미친놈이 노크도 없이 들이닥치더군요. 꽃다발까지 들고 말입니다. 황후마마 앞에서 그런 무례한 행동이라니. 정말이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니까요.”
[많이 불쾌했겠군.]
“어쩔 수 없이 꽃다발을 받기는 했는데 사람들 눈이 있으니 버릴 수도 없고 후작저까지 들고 오는 것이 가장 짜증났습니다. 그래도 도착하자마자 루리엔이 처리해주겠다고 가져가 줘서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어요.”
[꽃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
“그럼요. 미친놈이 주니까 싫어하는 거죠. 그리고 사실 전 그렇게 꺾인 꽃보다 살아있는 꽃을 더 좋아합니다.”
[그렇군. 기억해 두겠네.]
“예? 아니 뭐 굳이 기억하실 필요는…….”
살짝 당황한 엘리시아가 말꼬리를 흐리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머쓱해져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는 다시 들려온 이케르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폐하께는 말씀드려 두었네. 그대가 라시안 전하의 궁에 방문할 때 폐하께서도 움직이실 거야. 만만치 않은 분이시니 미리 준비를 잘해놓으면 좋을 것 같군. 물론 잘하리라 믿지만.]
“걱정 마세요. 오늘 무겁게 빌려주신 덕분에 기운이 나서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군.]
“그런데 당신은 괜찮은 겁니까? 항상 저만 만족하는 것 같아서요. 그, 많이 부족하실 거 같은데.”
그녀가 격렬한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면 그는 오랜 시간 길게 그녀의 몸을 탐하는 걸 즐겼다. 별장에서도 동이 터올 때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으니까.
그러니 프라이빗 룸과 황후궁에서 그가 정말로 많이 자제했다는 것을 엘리시아가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돌아왔다.
[부족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괜찮아. 지금은 그대 기분이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신경 쓸 것 없어, 엘리. 적어도 내 옆엔 미친놈은 없으니.]
농담처럼 가볍게 던져온 그의 말에 엘리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신사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말투만 쓰던 그가 아닌가. 그런데 미친놈이라니.
아니, 그 전에…….
‘그런데 왜 욕처럼 안 들리지?’
엘리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같은 단어인데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통신구에 대고 그를 불렀다.
“이케르?”
[왜 그러지?]
“제가 지금부터 말하는 단어들 따라 해주실 수 있습니까?”
[말해보게.]
“미친놈, 개새끼, 망할 놈, 거지 같은 놈.”
[엘리?]
“빨리요.”
[미친놈, 개새끼, 망할 놈, 거지 같은 놈.]
그가 욕설을 하나씩 발음할 때마다 엘리시아의 표정이 점점 더 묘하게 바뀌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이케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내게 욕을 가르쳐 주려는 건가?]
“아니, 아니에요. 그런 느낌이 아니란 말입니다.”
[엘리?]
“다시 한번요.”
그녀의 재요청에 잠시 침묵했던 이케르가 다시 말해왔다.
[……미친놈, 개새끼, 망할 놈, 거지 같은 놈.]
이게 말이 돼? 아니 어떻게 욕을 하는데 욕으로 안 들릴 수가 있지? 목소리가 우아해서인가?
욕조차 고상하게 들리도록 만드는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던 엘리시아는 다시 들려온 이케르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욕은 해본 적이 없어서 익숙하지 않군. 혹시 욕하는 것도 연습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고 하면 정말로 연습할 것 같은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황급히 답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냥 앞으로 욕 같은 건… 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하겠습니다.”
[음?]
“그것보다 폐하를 알현할 때 말입니다.”
재빨리 화제를 돌리면서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앞으로 욕할 일이 있으면 그녀가 대신 해줘야겠다고.
⚜ ⚜ ⚜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신문을 읽고 있던 줄스턴 자작은 노크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그의 허락에 서재로 들어온 집사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하머스 백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머스 백작께서?”
“예.”
집사의 대답에 줄스턴 자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다른 귀족가를 방문할 때는 연통을 넣은 후에 방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머스 백작 역시 그를 만나러 올 때는 항상 연통을 넣고 왔었다.
그런데 그냥 왔다는 것은 그만큼 급한 일이 있다는 소리였다.
“어디 계신가?”
“응접실에 계십니다.”
“알겠네. 내려가지.”
줄스턴 자작은 보던 신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1층으로 내려온 그가 응접실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지도 않고 응접실을 왔다 갔다 하는 하머스 백작이 보였다.
초조해 보이는 하머스 백작의 모습에 줄스턴 자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머스 백작님?”
그가 부르기 무섭게 돌아본 하머스 백작은 한걸음에 그에게로 다가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예?”
“그 사업, 자네가 내게 권해줬던 그 사업 말이네. 그거 정말 안전한 사업이 맞는 건가?”
따지듯 묻는 하머스 백작의 표정엔 불안감이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백작의 다그침에 보이지 않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던 줄스턴 자작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문제가 있는 사업을 제가 백작님께 권유해드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폐하께서 그 사업에 관심을 보이시는 건가?”
“예?”
줄스턴 자작은 흠칫 몸을 굳혔다. 하지만 그는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 오전 일찍 폐하께서 부르셔서 입궁했더니 내게 자작이 권유해준 사업에 대해 물으시더군.”
“폐하께서 그 사업에 대해 물으셨단 말씀입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시고…….”
“그것만이 아닐세. 폐하께서 지나가는 말처럼 내게 그러시더군. 그 사업에 문제가 있어 수사국에서 곧 움직일 예정이라고.”
하머스 백작의 말에 줄스턴 자작의 표정은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황제가 관심을 보이는 데다가 수사국이 움직인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사업의 투자금이 베라무스로 흘러가는 걸 황제가 눈치챈 건가? 설마…… 하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수사국이 움직일 리가 없을 텐데.’
머리를 바쁘게 굴리고 있던 줄스턴 자작은 하머스 백작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말해보게, 줄스턴 자작. 대체 그 사업에 폐하께서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가 뭔가. 뭔지 알아야 나도 투자금을 회수하든 어쩌든 대비를 할 것이 아닌가.”
흥분한 듯 얼굴이 붉어진 하머스 백작을 보며 줄스턴 자작은 일단 그를 달래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난처한 눈빛을 떠올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문제가 없을 텐데……. 일단 진정부터 하시지요. 흥분하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혈압이 높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폐하께서……!”
“별일 아닐 겁니다. 아마 폐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이지요. 백작가로 돌아가 계시면 알아보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이 먹힌 것일까, 하머스 백작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알았네. 일단 돌아가 있도록 하지. 알아보고 나면 바로 연락주게나.”
“물론입니다. 걱정 마시고 가 계십시오.”
하머스 백작을 다독거려 돌려보낸 줄스턴 자작은 곧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백작의 말대로 황제가 수사국을 움직여 사업을 파고들기 시작한다면 베라무스와의 연결점도 들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빨리 공작 각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려야겠어. 각하라면 분명 황제와 수사국의 눈을 피할 방법을 알고 계실 테니까.’
마차에 탄 줄스턴 자작은 라세트 공작가로 가라고 마부에게 지시했다.
자작가의 마차가 출발하자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두 쌍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