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보통 죽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말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조셉의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물었다.
“말릴 생각은 없고?”
그러자 청년은 무심한 표정으로 조셉을 쳐다보았다.
“내가 왜? 살아갈 용기조차 없어 죽으려는 비겁자를 살려서 어디다 쓰게?”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청년의 말에 조셉은 발끈했다.
한걸음에 청년에게 달려간 그는 시퍼렇게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청년의 멱살을 틀어쥐고 으르렁거렸다.
“네가 뭘 알아!”
갑자기 멱살이 잡혔는데도 청년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도리어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무심한 눈빛에 조셉은 이를 바득 갈았다.
청년의 멱살을 쥐고 있는 그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툭툭 불거지며 풀 곳 없던 분노와 울분이 고함소리가 되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상처입고 다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외침이었다.
“너 따위가, 너 따위가 어떻게 알아! 형을 잃은, 가족 같은 부하들을 잃은 기분을 알기나 해?! 아무도 지키지 못하고 혼자 살아남은 기분을 알기나 하냐고!”
절규하듯 외친 조셉은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곡기 하나 들어가지 않은, 잠조차 자지 못한 몸으로 급격하게 분노해서인지 머리가 핑그르르 돌아 그는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땅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꼈다.
“……비겁한 건 베라무스 그 자식들이야. 갑자기 기습한 그 개새끼들이라고. 적어도 내가 있었을 때 쳐들어왔다면…….”
넋두리하듯 중얼거리던 그의 말을 끊은 것은 청년의 무심한 목소리였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은데. 그 자리에 있었다면 같이 죽었겠지. 그렇게 억울하면 복수라도 하다가 죽던지. 개죽음을 선택해 놓고 변명은.”
복수. 개죽음.
두 개의 단어가 천둥소리보다도 더 크게 조셉의 귓가에 울렸다.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얼굴을 묻고 있던 그의 두 손이 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어째서 복수할 생각을 못 했을까, 청년의 말대로 지금 그가 택하려는 죽음은 개죽음, 아니 개죽음만도 못한 것인데.
그래, 복수를 하자.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자.
목표가 생기자 죽어있던 조셉의 눈동자에 생기가 다시 깃들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청년이 손을 내밀었다. 오랜 시간 검을 잡아온 듯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이었다.
“살아볼 생각이 생겼으면 잡아. 개죽음은 도와줄 생각이 없지만 복수는 도와줄 생각이 있으니.”
“……뭐?”
“내 목표가 베라무스를 없애는 거라서. 시간은 좀 많이 걸리겠지만.”
조셉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일개 청년이 말하기에는 목표가 너무나도 거창했다. 아니 실현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내밀어진 손을 보며 눈을 껌뻑이던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청년과 시선이 마주치면서 그는 청년의 눈빛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무심해 보이기만 했던 청년의 두 눈은 어떤 협박과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올곧음과 단단함을 품고 있었다. 굴복하느니 싸우다가 깨지고 말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청년과 함께 베라무스와 싸우는 자신의 모습이, 그리고 승리하는 모습이 청년의 뒤로 겹쳐졌다. 마치 미래라도 엿본 것처럼.
조셉은 홀린 듯 청년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그는 청년을, 지금의 그의 수장을 따라가 헬리오스의 부리더가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복수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 사려 깊은 수장의 도움으로.
역시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조셉은 멀어져 가는 하르를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 ⚜ ⚜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는군.”
라세트 공작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첼 후작의 얼굴에 어려 있던 긴장 어린 표정이 빠르게 풀려나갔다.
“제가 보기에도 그랬습니다. 헬리오스가 생각보다 더 일 처리가 대범하고 깔끔하더군요.”
“인질은 그쪽에서 관리하겠다고 하던가?”
“예. 각하께서 그들에게 약속해주셨던 대가에 대한 담보라고 했습니다.”
“역시 만만치 않아. 조셉이라는 놈. 그러니 베라무스의 턱 밑까지 쫓아왔겠지.”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라세트 공작은 팔짱을 낀 채 소파 깊숙이 등을 묻었다.
성문 하나를 확보한 이상 사병들을 수도에 들이는 데 문제는 없었다.
‘이제 슬슬 눈에 띄지 않게 수도 근처로 집결시켜야겠군.’
각 가문들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은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혹시 모를 역모에 대비해 일정 이상 병사를 늘리지 못하도록 황실에서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세트 공작가처럼 고위 귀족의 영지는 삼백 명까지 사병을 보유하는 것이 가능했고 베르첼 후작가처럼 일반적인 귀족 영지들은 크기에 따라 오십 명에서 백 명까지 가능했다.
‘나를 포함해 귀족 가문들의 사병이 이천, 베라무스에서 훈련시킨 사병이 천이니 총 삼천인가. 4대 근위대의 병력은 총 이천. 문만 제대로 열린다면 수적으로는 충분하겠어.’
그는 베라무스로 수사국을 상대하는 한편, 삼천 명의 사병 중 오백 명 정도를 내부로 돌려 황실 기사단을 제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각 가문의 기사단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데이모스 공작과 그를 따르는 가문들의 기사단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으로 보였다.
특히나 데이모스 공작가의 기사단은 황실 기사단을 능가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 있어 결코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역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데이모스 공작인가?’
황제뿐 아니라 황실과 황제파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청년을 떠올린 라세트 공작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전대 데이모스 공작이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영지로 내려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잘 됐다고 생각했다.
데이모스 공작가의 피가 어디 갈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막 정계에 발을 디딘 햇병아리 정도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젊은 데이모스 공작은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연륜 대신 패기를 장착한 전대 데이모스 공작의 강화버전이었던 것이다.
‘황제가 3황자를 데이모스 공작에게 맡기기 전에 처리했어야 하는 건데.’
1황자를 제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을 사렸던 것이 라세트 공작은 가장 후회스러웠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그때 손을 썼더라면 지금의 이런 복잡한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씁쓰레하게 입맛을 다시던 라세트 공작은 베르첼 후작의 목소리에 그를 쳐다보았다.
“사업 쪽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폐하께서 수사국을 움직이신 겁니까?”
두 손을 깍지 끼고 있는 후작의 미간은 살짝 접혀 있었다.
“이쪽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야. 수사국 직원 대여섯 정도를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더군. 데이모스 공작이 전면적으로 나서면 모를까 그 정도로는 찾아내지 못할 거야.”
라세트 공작의 느긋한 대답에도 베르첼 후작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카멜리아 후작을 따르는 귀족들이 입을 함부로 놀릴까 걱정이 됩니다. 그럼 폐하의 의심이 곧바로 줄스턴 자작에게로 향할 겁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것 없네.”
“좋은 방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역모에 가담한 것이 새삼스레 두려워지기라도 한 것일까. 베르첼 후작이 조심스럽게 묻자 라세트 공작은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차를 한 모금 음미하듯 마신 공작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후작은 그들이 어디에 투자하고 있는지 그사이 잊은 것 같군.”
공작의 말에 베르첼 후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설마 그걸로 협박하실 생각입니까?”
“협박이라니 무서운 말을 하는군. 그저 그들에게 알려줄 뿐이라네. 이미 우리와 같은 배를 탔다는 걸.”
찻잔을 내려놓는 라세트 공작의 입가에는 부드럽지만 잔혹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라시안이 카멜리아 후작저를 방문하고 돌아간 이틀 뒤 라세트 공작의 시종이 후작저를 찾아왔다.
그녀와 이케르가 예상했던 대로 빠른 호출이었다.
루리엔과 하르의 배웅을 받으며 라세트 공작저로 출발한 엘리시아는 마차 안에서 눈을 감고 감정을 다스렸다.
그럼에도 공작저에 도착해 소파에 앉아 있는 라세트 공작의 얼굴을 보자 눈매가 절로 치켜 올라가며 움켜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리시아는 공작에게 들키지 않게 재빨리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미리 연습을 해둬서인지 공작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왔나? 이리 와서 앉게.”
“예, 각하.”
라세트 공작과 마주 보고 앉은 엘리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감정을 가라앉히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잔재가 남아있으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공작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았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네. 3황자 전하께서 멋대로 후작저를 찾아오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
“후작을 궁에 입궁하지 못하게 한 내게 항의라도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지.”
“…….”
엘리시아는 공작의 말을 묵묵히 경청했다.
할 말도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는 침묵하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바짝 힘을 주었다. 공작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지난번 연회 때 의젓한 모습도 그렇고 이번 행보도 그렇고. 많이 크셨더군. 쓸데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