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하머스 백작의 언질 덕분에 가주들은 줄스턴 자작이 배신자라는 것도 라세트 공작이 자신들을 불러 협박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진실을 깨닫고 충격과 분노에 젖어있는 그들에게 하머스 백작은 말했다.
[우리는 이미 후작님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되어버렸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 목숨을 후작님께 맡기는 것과 후작님이 시킨 대로 연기하는 것뿐이오. 그러니 최선을 다합시다. 라세트 공작이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그래서 그들은 하머스 백작의 말대로 충실하게 따랐다.
연기가 되는 가주들이 앞에서 바람잡이를 하고 연기가 되지 않는 가주들은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라세트 공작은 그들의 연기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으로 보였다.
어떤 일이라도 해내고 말겠다는 결의에 찬 가주들을 둘러본 하머스 백작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소. 후작님께서 폐하를 곧 알현하신다고 했으니 결과를 기다려봅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후작님께서 부탁하신 것이 있었소.”
“그게 무엇인가요?”
아리아의 물음에 다른 가주들도 모두 궁금한 표정을 떠올리자 하머스 백작은 다시 입을 열었다.
“라세트 공작이 조만간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올 거요.”
“기사단이요?”
“그렇소. 후작님께서 말씀하시길, 라세트 공작이 우리를 함정에 빠트린 것은 후작님의 발목을 묶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기사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소.”
잠시 말을 멈춘 하머스 백작은 진중한 표정으로 아리아를 비롯한 가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무척이나 중요한 이야기가 될 테니.”
⚜ ⚜ ⚜
하루의 일을 마무리 짓고 침실로 올라온 엘리시아는 서랍 속에서 통신구를 꺼내 테이블로 걸어갔다.
의자에 앉아 통신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녀는 한쪽 구석에 놓인 초대장과 황금빛 봉투를 쳐다보았다.
라세트 공작가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면서 테이블 위에 놔두고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엘리시아는 손을 뻗어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초대장을 펼친 그녀는 나란히 써져 있는 두 개의 이름 중 악필로 써진 이름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쓸 거면 좀 예쁘게 쓰던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였지만 그런 그녀의 입매는 슬며시 위로 올라가 있었다.
초대장을 덮은 엘리시아는 통신구를 켰다. 역시나 몇 초 지나지 않아 이케르의 목소리가 통신구에서 흘러나왔다.
[엘리.]
단순한 부름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재빨리 답했다.
두세 번 사용했다고 이제는 제법 통신구 사용해 익숙해져 있었다.
“네, 저예요. 저녁은요?”
[먹었어. 그대는?]
“저도 먹었습니다. 지금 어디세요?”
[집무실이야.]
“또요? 아니 왜 맨날 이 시간에 집무실입니까?”
엘리시아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자 낮게 웃은 이케르는 그녀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곧 침실로 가려던 참이었어.]
“그럼 침실로 가서 연락 주십시오.”
[음?]
“정리하시고, 씻고, 주무실 준비 하신 후에 연락 달라고요. 끊습니다.”
[엘…….]
이케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엘리시아는 통신구를 꺼버렸다.
너무 했나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녀는 곧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습관은 중요한 거야.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습관은 아주 안 좋아. 같이 놀아야 할 시간에 일이라니 그게 말이 돼? 잘한 거야. 잘했어, 엘리.”
스스로를 칭찬하며 엘리시아는 통신구 앞에서 손으로 턱을 괸 채 이케르에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20분이 지나가도 통신구에서 아무런 빛도 흘러나오지 않자 그녀는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연락이 없지? 설마 기분이 상한 건…… 아니야, 이케르는 그럴 사람이 아닌걸.”
먼저 연락해 봐야 하나 하고 엘리시아가 고민하고 있을 때 통신구에 불이 들어왔다.
엘리시아가 재빨리 손을 뻗어 켜자 이케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
“예, 이케르.”
그가 부르기 무섭게 대답한 그녀는 아차 싶었다.
이건 완전히 대놓고 기다렸다는 걸 티내는 것이 아닌가.
이케르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해왔다.
[많이 기다린 모양이군. 미안하네. 그대가 말한 대로 정리하고, 씻고, 잘 준비하느라 조금 늦었어.]
“잘하셨습니다. 저는 보통 11시 전에는 모두 마무리하고 잘 준비를 합니다. 그래야 다음날 정신이 맑거든요.”
[11시라. 기억해두지.]
“아니 뭐 기억하시라고 말씀드린 건 아니고요. 그보다 이케르, 오늘 초대장이 나왔습니다. 제 약혼식 초대장이요.”
보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엘리시아는 초대장을 들어 보였다.
[알고 있어. 녹턴이 한 장 가져다주더군.]
“설마 라세트 공작에게 받으신 건가요?”
벌써 초대장을 뿌리고 있나 싶어 놀라 물었던 그녀는 이케르의 대답에 안도했다.
[인쇄소 직원 하나를 포섭해 놨거든. 그가 빼돌려 준 모양이야. 그보다 기분은 괜찮은가?]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기분이 아주 더러웠습니다. 대체 왜 제 이름이 미친놈하고 같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래도 하르가 초대장을…….”
아무 생각 없이 말하던 엘리시아의 입이 순간 다물리며 그녀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하마터면 하르가 더스틴의 이름을 파내고 이케르의 이름을 써넣어서 기분이 좋아졌다고 말할 뻔하지 않았던가.
말을 멈춰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이케르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테스케 경이 왜?]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르가 위로를 해줘서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졌다는 말을 하려던 거였어요.”
[그랬나? 미안하군. 그런 기분 나쁜 경험을 하게 해서. 그래도 그대 옆에 테스케 경과 스펜서 보좌관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케르의 사과에 엘리시아는 머쓱해졌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 아닌가.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음?]
“제 이름이 다른 남자의 이름과 나란히 쓰여 있는 거 기분 나쁘셨을 거 아닙니까.”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솔직한 이케르의 대답에 마음이 초조해진 엘리시아는 다급히 말했다.
“그, 라세트 공작이 라시안 전하의 사격 수업을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곧 입궁할 생각이에요. 그때 위로해 드릴게요.”
[어떻게 말인가?]
“음~ 일단 무릎에 앉아 키스부터 할 생각입니다. 그래도 부족하시면 뭐… 더 한 것도 해드릴 수 있고.”
너무 대놓고 뻔뻔했던 걸까. 잠깐 침묵이 흐르자 엘리시아는 머쓱해졌다.
하지만 곧 돌아온 것은 시원스러운 웃음소리였다.
[하하. 그럼 그날은 전적으로 그대에게 맡기지. 내게 어떤 짓을 해도 반항하지 않겠네.]
“그래도 혹시나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최대한 반영하겠습니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엘리시아가 말하자 이케르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귀가 녹아내릴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게, 기대하고 있을 테니.]
⚜ ⚜ ⚜
그로부터 사흘 뒤, 엘리시아는 라시안을 만나기 위해 입궁했다. 그녀는 3황자 궁 앞에 선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격 수업을 위해 여러 번 방문했지만 오늘처럼 긴장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 손에 여덟 가문의 목숨이 걸려 있다 보니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서류 봉투를 내려다 본 엘리시아가 입매를 단단하게 굳힌 채 발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였다. 그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멜리아 후작.”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궁 입구 앞에 서 있는 라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라시안 전하?”
뜻밖의 얼굴에 놀랐던 엘리시아는 곧 빠른 걸음으로 라시안에게 다가가 예를 갖췄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
그녀를 맞이하는 황자의 아름다운 두 눈은 반가움을 담고 반달처럼 곱게 휘어 있었다.
“혹시 절 마중 나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후작이 공식적으로 제 궁을 방문하는 마지막 날인데 당연히 와야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엘리시아가 목소리를 낮춰 묻자 라시안은 그녀와 똑같이 목소리를 낮춰 답해왔다.
“이미 와 계십니다.”
“아…….”
서류 봉투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면서 가늘고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봉투가 살짝 구겨졌다.
그것을 흘깃 본 라시안은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황자가 엘리시아에게 내민 것은 조금의 삐뚤어짐도 없이 깔끔하게 잘 접힌 쪽지였다.
“좀 더 있다 드릴까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이건 뭡니까?”
의문 어린 눈빛으로 그녀가 받아들자 라시안은 싱긋 웃었다.
“스승님께서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각하께서요?”
“예.”
엘리시아는 쪽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작은 게 뭐라고 가슴이 설레는지.
들고 있던 봉투를 팔 사이에 낀 그녀는 쪽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러자 수려한 필체로 써진 짤막한 문장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긴장할 것 없어. 그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테니.]
분명 종이에 써진 건 검은색 활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단단한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표정 역시 부드럽게 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