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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112/133)

112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엘리시아는 라시안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알고 계십니까, 후작?”

“무엇을 말씀입니까?”

“스승님이 누군가에게 쪽지를 쓰신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

“솔직히 좀 부럽더군요. 5년이면 나름 긴 시간인데 제게는 한 통도 안 써 주시더니. 세상에서 스승님이 가장 공정하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 생각이 틀렸나 봅니다.”

라시안의 웃음기 어린 말에 엘리시아는 다시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이것도 내가 처음이라고?’

가슴께에 깃털이 닿은 것처럼 간질간질해지며 기분이 들떴다. 이케르가 처음 쓴 쪽지라고 해서 그런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혹시라도 구겨질까 이케르의 쪽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정복 주머니에 넣은 엘리시아는 라시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제 집무실에 계십니다. 이쪽입니다.”

라시안은 엘리시아를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꼭 필요한 가구들로만 채워진 라시안의 집무실은 무척이나 단정하고 깔끔했다.

황제는 황자의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엘리시아가 라시안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황제와 시선과 마주한 엘리시아는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러자 황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후작을 짐의 집무실이 아닌 라시안의 집무실에서, 그것도 이렇게 비밀리에 만나는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네.”

황제의 말에 머쓱해진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자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상황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후작 자네는 아니지 않나.”

“이해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매끄럽게 진행되는 대화에 엘리시아가 안도한 것도 잠시, 곧바로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에 그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케르가 짐에게 그러더군. 후작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그리고 그 상황을 풀어줄 수 있는 건 짐 밖에 없다고 말이야. 지금 어떤 상황인 건가?”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지고 진중함만이 남은 황제를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천천히 두 무릎을 꿇었다.

“……?”

“후작?”

그녀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빛에도 옆에서 지켜보던 라시안의 눈빛에도 놀람이 깃들었지만 엘리시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리아와 하머스 백작을 비롯한 여덟 가문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황제와 시선을 마주한 채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씀 올리기 부끄럽지만 저를 따르는 여덟 가문이 라세트 공작의 앞잡이에게 속아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베라무스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사업자금을 투자한 모양입니다.”

죄를 솔직하게 고백한 엘리시아는 황제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미간이 접혀 있기는 했지만 황제의 눈빛이나 표정에 노기가 깃들어져 있지는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녀가 계속해서 말하려고 하자 황제는 손을 들어올렸다.

“잠깐 기다리게 후작. 혹시 이케르가 말했던 그 건인가? 귀족들의 투자금이 베라무스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던?”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귀족들이 그대를 따르는 귀족들이고? 라세트 공작에게 속아서 투자했다는 말인가?”

“예, 폐하.”

“그래서 이케르가 그런 말을 했었군. 라세트 공작의 신경을 거스를 정도로만 수사국을 움직여 달라는.”

“그렇습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황제는 피식 웃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했네. 베라무스에 투자한 귀족들의 정보를 쥐고 있으면 그것 역시 쓸모가 있을 텐데 파고들 필요가 없다고 해서. 역시나 이유가 있었어. 계속 말해보게.”

황제의 반응에서 용기를 얻은 엘리시아는 하머스 백작가를 시작으로 여덟 가문이 어떻게 베라무스에 투자하게 되었는지와 그들을 그렇게 만든 배신자 줄스턴 자작가에 대해 털어놓았다.

“줄스턴 자작가라고?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의외로군.”

그녀의 설명을 모두 듣고 난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자 엘리시아는 서늘하게 웃으며 답했다.

“줄스턴 자작가는 라세트 공작가로부터 오랜 시간 동안 지원을 받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문이 저지른 죄는 이번만이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 가문은 과거에도 제 어머니를 따르던 다섯 개의 가문을 속여 몰락의 길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제 어머니께서 알게 되자 후작저로 찾아왔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엘리시아는 두 주먹을 꾹 쥐었다. 그녀의 눈가는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들이 찾아온 날이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마차 사고로 제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날 말입니다.”

그녀가 힘들게 뱉어낸 말에 황제도 라시안도 그대로 굳어졌다.

“지금 후작의 말대로라면 전대 카멜리아 후작 부부의 사고에 줄스턴 후작가가 연루되어 있다는 건가?”

심각한 표정으로 황제가 묻자 엘리시아는 감정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답했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 현 줄스턴 자작이 정원 구경을 하겠다면서 마차가 있는 후원으로 나가는 것은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후회하는 일은 수없이 많지만 요 근래 그녀가 가장 후회했던 것은 그날 줄스턴 자작의 행동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버린 것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나가기만 했더라도 마차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다시 밀려드는 후회에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녀는 황제의 목소리에 흐트러지려던 정신을 다잡았다.

“확실히 줄스턴 자작가가 의심스럽군. 자신들의 죄를 감추려고 후작의 말처럼 마차에 몹쓸 짓을 했을지도 모르겠어. 증거가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야.”

못마땅한 듯 쯧 하고 혀를 찬 황제는 엘리시아를 내려다보았다.

“상황은 충분히 이해했네. 많이 힘들었겠어. 지금은 괜찮나?”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후작은 씩씩하니 잘 버틸 수 있을 거라 믿겠네. 그래서 오늘 짐을 만나고자 한 이유는 자네가 말한 여덟 가문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라세트 공작은 제게는 그들의 안위로, 그들에게는 가문과 제 안위를 가지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폐하에 대한 충심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 증거로 이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엘리시아는 황제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다가가 들고 있던 봉투를 황제에게 공손하게 내밀었다.

입궁하면서 한순간도 손에서 뗀 적 없던 봉투였다.

황제가 봉투를 받아들자 그녀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신념을 지킬 수 있도록 부디 폐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엘리시아를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의 시선이 봉투로 향했다.

밀봉되어 있던 봉투를 연 황제는 그 속에서 서류들을 꺼냈다. 하나하나 내용을 확인한 황제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위로 휘어졌다.

“라시안.”

“예, 아바마마.”

자신의 부름에 라시안이 다가오자 황제는 아무 말 없이 서류들을 황자에게 건넸다.

의아해하면서도 서류를 받아들고 내용을 확인한 라시안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여덟 가문의 가주들이 친필로 작성한 서약서였다.

라세트 공작에게 속아 넘어가 베라무스에 자금을 투자했지만 뉘우치고 있으며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내용이 작성되어 있었다.

“아바마마, 이걸 왜 제게……?”

“황자 너라면 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갑작스러운 황제의 질문에 당황한 것도 잠시, 라시안은 손에 들린 서약서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고개를 든 라시안은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베라무스에 투자한 것은 큰 죄이나 라세트 공작에게 속아서 한 일이고 서약서를 작성함으로써 황실과 아바마마에 대한 충심을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사면을 약속하시되 사면의 시기는 모든 일이 끝난 후로 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내어놓는 황자를 보며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제법이구나. 많이 컸어.”

손을 들어 황자의 어깨를 두드려 준 황제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엘리시아를 내려다보았다.

“카멜리아 후작, 황자의 말을 들었는가?”

“들었습니다.”

“짐 역시 황자와 같은 생각이야. 여덟 가주의 충심을 믿고 사면을 약속하려 하네. 가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서면으로도 써 주지. 그러니 짐을 실망시키지 말게나.”

엘리시아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깃들며 바짝 올라가 있던 어깨가 조금이나마 내려갔다.

그녀는 황제와 라시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실망하실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내리깐 속눈썹 아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결의를 띄고 단단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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