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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4/133)

114화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집무실 안에 울린 노크 소리와 집사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표정이 상반되게 바뀌었다.

더스틴은 짜증난 눈빛을 떠올렸고 엘리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와.”

더스틴의 서늘한 목소리에 조용히 문이 열리며 시종장이 들어왔다.

그는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무슨 일이지?”

더스틴이 고개를 돌려 묻자 시종장은 엘리시아 쪽을 흘끔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전하. 데이모스 공작 각하의 보좌관이 찾아왔는데 카멜리아 후작님을 급하게 뵈어야 한다고 해서…….”

“데이모스 공작의 보좌관이?”

더스틴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예. 어떻게 할까요?”

시종장의 물음에 잠시 침묵했던 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시종장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더스틴의 시선이 엘리시아에게로 향했다. 조금 전 부드럽던 눈빛은 어디다 팔아먹기라도 했는지 취조라도 하는 듯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데이모스 공작의 보좌관이 왜 널 찾아온 거지? 그와 약속이라도 있었나?”

그렇지 않아도 이케르와의 약속을 적당한 때에 말하려 했던 엘리시아는 잘 됐다고 생각하며 재빨리 답했다.

“한 시간쯤 후에 다음 의회의 안건과 관련해 데이모스 공작 각하와 약속이 있습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지?”

네가 말할 시간을 안 줬잖아, 이 미친 새끼야.

목구멍까지 치민 욕을 다시 삼키며 엘리시아는 당당하게 말했다.

“말씀드릴 기회를 주시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럼 보좌관의 방문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시종장이 데이모스 공작의 보좌관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데이모스 공작 각하의 보좌관, 녹턴 시에드 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녹턴이 고개를 숙이자 더스틴은 못마땅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공작의 보좌관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신가?”

한껏 비꼬는 더스틴의 목소리에도 녹턴은 조금의 위축도 되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답했다.

“각하께서 카멜리아 후작님께 전달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3황자 전하의 궁에 갔더니 이곳으로 오셨다고 하시더군요.”

“말해보게.”

자신이 엘리시아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서는 더스틴의 모습에 녹턴은 보이지 않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곧 내색 없이 입을 열었다. 더스틴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이케르의 지시를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두 분이 의논하기로 한 안건과 관련해 폐하께서 한 시간 내로 논의 결과를 가지고 들어오라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작님께 최대한 빨리 와줄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녹턴의 말이 계속됨에 따라 점점 더 좁아 들던 더스틴의 미간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완전히 구겨졌다.

데이모스 공작이 부르는 것이라면 쳐낼 수 있지만 황제의 부름이라면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엘리시아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빨리 가야겠군요.”

녹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선 엘리시아는 몸을 돌려 더스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하, 죄송하지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이라도 악물고 있는 건지 짓눌린 목소리로 더스틴이 허락하자 그녀는 녹턴과 함께 재빨리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닫히는 문 사이로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와도 엘리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더스틴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니고 새삼 놀랄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잔뜩 긁어놓기도 했고.

하지만 녹턴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격이 좋지 않다고는 들었지만 저 정도로 고약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중얼거림에 엘리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름대로 명성에는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더군. 라세트 공작이 소문을 잘 틀어막고 있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각하께서 후작님이 2황자 전하의 궁에 들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저를 보내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조금 전 녹턴이 더스틴에게 했던 말과는 다른 말이었다.

“폐하께서 부르셔서 날 데리러 온 게 아니었나?”

“제가 후작님께 말씀드린 이유로 2황자 전하께 말씀드린 이유가 생겼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뭐야, 그럼 폐하를 알현해야 한다는 게 날 더스틴에게서 빼돌리기 위해 만든 거였어?

녹턴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은 엘리시아의 입꼬리가 실룩이며 위로 올라갔다.

이케르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더스틴의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상대해주느라 꽤나 귀찮았을 것이다.

‘정말 수호천사 같네.’

어떤 방법으로든 이케르가 자신을 보호해주는 것이 그녀로서는 고마우면서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각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신가?”

“예. 폐하께 보고하실 안건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엘리시아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답하는 녹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가 루리엔의 전 애인이란 말이지? 이케르의 보좌관으로 왔다는.’

루리엔은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지만 그냥 넘겨버릴 그녀가 아니었다.

녹턴을 찬찬히 살피느라 살짝 가늘어졌던 엘리시아의 눈이 곧 만족감을 띠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키도 크고 얼굴도 준수하고 성격도 좋아 보이고. 괜찮은데?’

친우의 애인으로 일단 합격점을 준 엘리시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에게는 마음속에 묻어 둔 오랜 질문이 하나 있었다.

루리엔에게 여러 번 물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루리엔이 사귀던 남자와 헤어진 진짜 이유.

눈앞의 남자라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친한 친우의 사적인 질문이다 보니 입에 담기가 부담스러웠다.

결국 엘리시아는 질문하는 걸 포기했다.

‘그래도 초면에 예의가 아니지.’

오늘이 아니라도 기회가 있을 거라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황제의 궁에 도착해 있었다.

이케르가 있는 집무실의 문이 보이자 엘리시아의 마음도 덩달아 들뜨기 시작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해 문 앞에 도착한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녹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작님이 어떤 분인지 많이 궁금했었습니다.”

뭐?

갑작스런 녹턴의 고백에 엘리시아는 노크를 하려던 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그녀의 두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런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녹턴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후작님이 아니었다면 루리엔은 저를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

조금 전까지 옅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엘리시아의 입매가 딱딱한 일자를 그려냈다.

녹턴은 지금 그녀에게 오랜 시간 가지고 있었던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내어주고 있었다.

‘역시 루리엔은 나 때문에 헤어진 거였어. 날 지키기 위해.’

사귀던 남자에 대해 물을 때마다 루리엔은 그녀에게 말했다.

[헤어질 때가 돼서 헤어진 거야. 너랑은 상관없어.]

엘리시아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장례식 때문에 루리엔이 급하게 돌아오기 전 받았던 일상적인 편지에서 그런 느낌은 조금도 받지 못했었으니까.

그래서 대답을 들었음에도 질문을 계속해서 가슴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드디어 제대로 된 답을 듣게 된 지금 죄책감과 미안함,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조차도.

하지만 녹턴은 그녀의 대답을 들을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후작님을 원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후작님보다 제가 더 소중했다면 루리엔이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걸 알면서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잠시 말을 끊은 그는 그녀 대신 노크를 하고 그녀의 방문을 이케르에게 알렸다.

“각하, 후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게.”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확인한 녹턴은 엘리시아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이번에는 루리엔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많은 지원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연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것처럼.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열린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턱 막힌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자신만의 생각에 잠긴 채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엘리시아는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녀를 부르는 이케르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앉았을 때였다.

“엘리.”

그녀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다가온 건지 그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이케르…….”

모든 것을 감싸 안아줄 것 같은 깊고 부드러운 눈빛과 마주해서일까, 엘리시아는 울컥하고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떨궜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엘리?”

살짝 당황한 듯한 목소리와 함께 곧바로 따스한 손이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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