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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5/133)

115화

그 손길에 이끌려 고개를 든 엘리시아가 마주한 것은 걱정으로 짙게 물든 아름다운 금안이었다.

“왜 그러지, 엘리? 2황자가 그대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 그럴까 봐 녹턴을 서둘러 보냈건만.”

더스틴이 그녀에게 협박도 하고 집적거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게 원인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이케르의 눈빛에 어린 걱정이 조금 더 짙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열리지 않는 말문에 답답해져 엘리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런 그녀의 기색을 읽었는지 이케르는 대뜸 두 팔로 엘리시아를 감싸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안아 드는 것과 같은 그런 자세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가뿐하게.

“이, 이케르?”

엘리시아가 당황해 그를 부르는 사이 그는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소파로 향했다.

그가 소파에 앉으면서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에 앉는 모양새가 되었다.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엘리시아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손으로 감싸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한 이케르는 그녀의 어깨를 느릿하게 토닥였다.

“억지로 말할 것 없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

상냥한 손길이 어깨에 닿으면서 굳어있던 엘리시아의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치켜 올라가 있던 길고 짙은 속눈썹 역시 힘을 잃고 차츰 아래로 내려왔다.

‘따스해.’

빠져나가기 싫은 아늑함이 이런 것일까, 엘리시아는 눈을 감은 채 얇은 셔츠를 통해 전해오는 그의 심장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힘이 있으면서도 규칙적인 박동 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 역시 차분하게 진정되어 갔다.

몇 분간의 평온한 침묵이 흐른 후 천천히 눈을 뜬 엘리시아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듣고 싶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었는데…….”

“그런데?”

“짐작했던 대답인데도 마음이 아파서요. 고맙고 미안하고 그냥 좀…….”

말꼬리를 흐린 그녀가 품 안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자 이케르는 어깨를 토닥이던 손을 내려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가.”

“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2황자가 그대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 아닌가 하고.”

하긴 그가 가장 먼저 물었던 말도 그거였지.

2황자의 궁에서 오자마자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던 엘리시아는 이어진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대를 이렇게 만든 범인은 녹턴인 모양이야.”

“……그걸 어떻게……?”

“내게 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눌만한 상대는 녹턴밖에 없지 않나. 그는 스펜서 보좌관의 옛 연인이기도 하니까.”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녹턴을 채용한 주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지. 그도 나만큼이나 간절해 보였거든. 그런데 지금은 좀 괘씸하군.”

그대를 울릴 뻔하지 않았나.

부드럽게 덧붙여진 그의 말에 엘리시아의 심장이 크게 널뛰며 얼굴에 화악 열이 올랐다.

아, 진짜.

붉어진 얼굴을 보이기 싫어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은 엘리시아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이렇게 다정하신 겁니까. 그러니까 제가 자꾸 응석을 부리게 되잖아요.”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그러다가 제가 응석받이가 되면 어쩌시려고요.”

“그것도 괜찮군. 난 그대가 내게만 응석을 부려줬으면 좋겠거든.”

귀에 감겨오는 낮고 달콤한 목소리에 엘리시아의 마음도 몸도 절로 녹아내렸다.

‘이 남자는 날 어디까지 빠져들게 하려는 걸까.’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다 못해 이젠 눈앞의 남자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계속해서 그와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던 엘리시아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케르의 한쪽 손이 서류를 들어 올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미리 올려뒀던 서류인 듯했다.

“그건 뭡니까?”

아직까지 뜨끈한 볼에 손등을 대며 엘리시아가 묻자 이케르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볼에 입술을 내리며 속삭였다.

“폐하께 말씀드릴 안건들. 대충 정리해두었어. 그대의 의견만 얹으면 될 거야.”

“예?”

안건…… 들?

엘리시아는 어리둥절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가 그와 논의하기로 한 안건은 한 개였다. 그것도 빨리 끝내고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그런데 갑자기 안건이 여러 개로 불어났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게 다 뭔가요?”

그녀가 묻자 이케르는 손에 든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며 귀찮게 되었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대충 가벼운 안건으로 핑계만 만들려 했는데 이때가 기회다 싶으셨는지 숙제를 잔뜩 던지시더군. 하여간 기회를 놓치시지 않는 분이지, 폐하께선.”

“저 때문이군요.”

엘리시아는 시무룩해졌다.

갑자기 더스틴에게 불려간 그녀를 구하려다 이케르까지 예정에 없던 일을 떠맡게 된 셈이었다.

그녀가 풀이 죽어 있자 이케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추었다.

“그대 때문이 아니야. 누구 때문인지는 그대가 더 잘 알지 않나.”

“그래도…….”

미안한 마음으로 이케르에게 받은 서류들을 들여다본 엘리시아는 그의 말처럼 안건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에 놀랐다.

그녀가 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까지 일목요연하게 만들어 놓다니.

새삼 감탄하며 하나씩 확인해가던 그녀의 미간이 점점 더 찌푸려졌다.

황제가 그들에게 던진 안건은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무려 다섯 개였다.

결국 엘리시아는 서류에 파묻은 채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이건 딴짓 하지 말고 일만하라는 뜻입니까? 이래서는 위로고 뭐고 못할 것 같은데요.”

엘리시아의 투덜거림에 이케르는 낮게 웃으며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좀 더 바짝 끌어당겼다.

듣기 좋은 그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괜찮아, 엘리. 지금 이렇게 그대를 안고 있는 건만으로도 난 충분히 위로받고 있으니까.”

아니,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만….

속에 있는 말을 꺼내놓지 못한 채 엘리시아는 들고 있던 서류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역시 망할 미친놈이라고 더스틴을 욕하면서.

⚜ ⚜ ⚜

하르와 함께 보고서를 확인하던 루리엔의 시선이 집무실 벽에 걸린 벽시계로 향했다.

“늦는다고 하긴 했지만, 너무 늦는 거 아니야?”

루리엔의 말에 하르 역시 시간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녁 무렵 황궁에서 엘리시아가 보낸 전령이 찾아왔다.

황제에게 받은 안건이 많아 좀 늦어질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3황자와 이케르를 만나러 간 애가 갑자기 웬 안건인가 싶으면서도 루리엔과 하르는 일단 자신들의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10시가 넘어도 엘리시아가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걱정이되는 것은 당연했다.

“역시 따라갔어야 했었나?”

하르는 고개를 돌려 컴컴해진 창밖을 쳐다보았다. 같이 가겠다는 그를 말린 것은 엘리시아였다.

[넌 앉아서 헬리오스 일이나 해. 지금 중요한 때잖아. 오늘은 다른 기사 데리고 다녀올 테니.]

괜찮다는 그를 집무실에 밀어 넣어 놓고서 뿌듯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다른 기사를 데리고 입궁해버렸다.

그래도 장소가 황궁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늦을 줄이야.

아무래도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르가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벌컥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리며 엘리시아가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 폐하께서 이제야 놔주셔서.”

지친 표정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본 하르와 루리엔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깃들었다.

“힘들어.”

비틀비틀 걸어온 엘리시아는 그대로 빈 소파에 쓰러졌다. 긴 한숨도 함께였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야? 각하가 아니라 폐하를 알현하러 간 거였어?”

“아아, 이케르와 만나기는 만났지. 폐하와 함께여서 그렇지.”

“어쩌다가?”

“말하자면 길어. 그보다…….”

엘리시아는 루리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녹턴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후작님이 아니었다면 루리엔은 저를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불쑥 솟구친 미안한 마음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 루리엔을 끌어안았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엘리시아는 루리엔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아랑곳없이 하르를 쳐다보며 오라고 손을 까닥였다.

의아한 눈빛으로 하르가 다가오자 그녀는 한쪽 팔을 들어 그도 끌어안았다.

루리엔이 그랬던 것처럼 하르 역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옆에 남았을 것이 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둘 다. 그리고 고마워.”

갑작스러운 그녀의 고백에 루리엔과 하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 서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얘 왜 이래?’

‘내가 어떻게 알아?’

두 사람이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엘리시아는 친우들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가 꼭 꽃길 깔아줄게. 너희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

엘리시아는 나름대로 감정에 북받쳐 한 말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녀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나? 하고 있는데. 네 보좌관.”

“나도. 네 호위기사.”

새삼스레 얘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루리엔과 하르의 모습에 엘리시아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옆에 있어 주는 친우들이 고맙고 그리고 소중해서.

“황궁에서 많이 힘들었나 보네. 각하와 제대로 시간도 보내지 못한 거 같고. 하르, 너 엘리 필요해?”

“아니. 저 상태로는 도리어 방해다.”

“들었지? 그러니까 가서 쉬어.”

그녀를 토닥이고 빠져나가려는 루리엔과 하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엘리시아는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이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그래서 다 같이 행복해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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