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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7/133)

117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금빛 카드에 머물렀다.

더스틴이 건네고 간 것이었다.

“10월 1일이었던가?”

“그렇습니다.”

짙은 눈썹을 찌푸린 황제는 손가락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카드를 집어 들었다.

“웨스테인 신전이라 되어 있던데.”

“라세트 공작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신전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라세트 공작이 머리가 좋아. 황궁 내부보다야 외부가 병력을 동원하기도 짐과 황족들을 제압하기도 쉬울 테니까. 황족들이 외부에서 약혼식을 했던 선례도 없는 게 아니니 트집도 잡지 못 할 거고.”

잠시 침묵했던 황제는 손가락 끝으로 느릿하게 카드를 쓸었다.

“자식의 약혼식이니 기뻐야 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착잡하군.”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황제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축하받아야 마땅한 좋은 날을 피로 얼룩지게 하려 하다니. 바보 같은 녀석.”

무거운 한숨을 내쉰 황제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고 이케르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그랬었지. 이미 되돌리기엔 더스틴이 너무 많이 망가졌다고.”

“폐하께는 죄송한 말씀이나 그렇게 보입니다.”

“죄송할 것이 뭐가 있나 짐이 봐도 그런 것을. 짐의 책임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네만, 황비와 라세트 공작이 오늘따라 더 괘씸하고 얄밉군.”

카드를 내려놓은 황제는 서랍을 열고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손에 펜을 쥔 그는 종이 위에 화려한 필체로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작성을 끝낸 황제는 내용을 다시 한번 검토한 후 자신의 이름을 쓰고는 끼고 있던 인장 반지로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케르에게 내밀었다.

“받게.”

“감사합니다.”

서류를 받자마자 확인해보지도 않고 곧바로 인사해오는 이케르의 모습에 황제의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게 뭔지는 알고 인사를 하는 건가?”

“위임장이 아닙니까?”

“맞네. 어떻게 안 건가?”

“폐하께서는 저를 믿고 베팅을 크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려면 제게 권한이 필요하니 위임장을 주실 거라 짐작했을 뿐입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젊은 공작의 대답에 황제는 피식 웃었다.

“누가 데이모스 아니랄까 봐 빈틈이 없어. 귀염성 없는 것도 그렇고. 받으면서 좀 놀라주고 해야 주는 사람도 재미가 있거늘. 확인이나 해보게. 더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황제의 재촉에 이케르는 손에 들고 있는 위임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내용을 확인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황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라세트 공작이 판을 제대로 깔았어. 확실히 이만한 기회가 없지. 숨통을 짓누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끊어버릴 기회니까.”

“…….”

“짐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베팅을 했다고 생각하네. 나머지는 자네의 손에 달려 있지. 짐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겠나?”

질문을 던지면서도 황제는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케르도 그렇고 전대 데이모스 공작인 카메론도 항상 하는 대답은 똑같았으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항상 최고의 성과를 가져오는 것에 비한다면 참 겸손한 대답이지.’

그러니 이번에도 같은 답이 나오리라 생각한 황제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황제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했나?”

“가져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원하시는 그 승리.”

똑바로 자신을 응시한 젊은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에 황제는 잠시 멍하니 두 눈을 껌뻑였다.

라세트 공작이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싸움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를 떠올린 황제는 곧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카멜리아 후작 때문이군. 자네의 그 대답.”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후작에게 고마워해야겠어. 자네를 진심으로 움직이게 만들다니. 그런데 자네 괜찮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그날 후작이 약혼식을 치르는 것을 지켜봐야 하지 않는가. 물론 자네가 흥분할 리는 없겠지만.”

“걱정 되십니까?”

자신이 입 안으로 삼킨 말을 이케르가 대신, 그것도 무척이나 담담하게 내뱉자 황제는 머쓱해져 헛기침을 했다.

“흠,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음?”

“그날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이케르의 입가에 떠오른 느긋한 미소를 보면서 황제는 추측하기를 포기했다.

어떻게 따라가겠는가, 저 머릿속을.

그럼에도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은 그만큼 눈앞의 사내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위임장을 접어 품속에 넣은 이케르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젊은 공작을 쳐다보고 있던 황제의 눈빛에 부러움이 깃들었다.

‘더스틴이 저렇게 자랐다면 얼마나 좋을까.’

버린 자식이라고 해서 가슴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던가.

그럼에도 그는 그 아픔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가 앉아있는 자리는 그런 자리였으니까.

황제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아주 잠깐이나마 평범한 아버지로 돌아간 그의 손가락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 ⚜ ⚜

어스름이 바닥에 깔릴 무렵 마차에서 내린 더스틴은 미간을 구긴 채 자신의 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딛는 그의 걸음마다 신경질이 묻어났다.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그거 하나 처리하지 못해 엘리를 불러?”

그가 지금 욕하고 있는 상대는 카멜리아 후작가의 가신들이었다.

늦은 오후 더스틴은 엘리시아와 함께 데비안 백작가의 연회에 기분 좋게 참석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지에 급한 일이 생겨 가신들이 올라왔다는 연락에 엘리시아가 곧바로 양해를 구하고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것도 인사를 막 마치고 첫 춤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춤을 빌미로 엘리시아를 자연스럽게 품에 안으려 했던 더스틴의 계획이 물거품으로 날아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요새 계속 이 패턴이었지.”

엘리시아가 라시안을 만나러 궁에 왔을 때부터였던가. 그가 엘리시아를 불러내 시간을 가지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자꾸만 방해가 들어오는 것이.

그렇다고 해서 억지스러운 정황도 없었다. 확인해보면 실제로 다 있는 일이었고 중요한 일이었다.

차라리 누군가가 고의로 그러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보겠건만 운이 좋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계속되니 더스틴으로서는 약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바득 갈며 그가 궁 안으로 들어서자 마중 나와 있던 시종장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라세트 공작 각하께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작이?”

“예,”

의외라는 듯 짙은 눈썹을 치켜 올린 더스틴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시종장에게 던지고는 집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에 도착한 그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라세트 공작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오십니까.”

조용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맞이하는 공작을 흘깃 쳐다본 더스틴은 공작이 앉아있는 소파가 아닌 책상으로 다가갔다.

의자에 털썩 앉은 그는 다리를 꼰 채 공작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기분이 저조하니 말도 따라서 불퉁하게 나갔다.

“무슨 일이지? 이 저녁에?”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후작이 중간에 돌아가 버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라세트 공작의 말에 더스틴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후작에게 붙은 감시인은 돌려보냈을 텐데. 설마 날 감시하고 있는 건가?”

더스틴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라세트 공작은 허허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연회에서 있었던 일들은 감시인이 없어도 다른 이들을 통해 제 귀에 들어온답니다.”

“아주 훌륭한 능력이군. 다 알아서 좋겠어. 그럼 카멜리아 영지의 일도 미리 해결하지 그랬나. 그럼 내 기분이 이렇게 거지 같지는 않았을 텐데.”

“거기까지 할 수 있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이미 전하를 황위에 앉혀드렸겠지요.”

“그렇긴 하지.”

라세트 공작은 더스틴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답해오자 빙그레 웃었다.

“왜 그리 초조해하십니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전하의 손안에 모든 것이 들어올 텐데요. 그토록 원하시던 황위도 후작도 말입니다.”

날카롭게 치솟아 있던 더스틴의 눈매가 라세트 공작의 말에 제자리를 되찾았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몇 번 한 그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황위도 그렇지만 그냥 엘리만 보면 갈증이 나. 자꾸만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짜증스럽고.”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겁니다.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십시오.”

“그럼 그날 엘리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

도돌이표처럼 엘리시아로 돌아오는 대화에 라세트 공작은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더스틴이 원할 만한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입니다. 제가 상황을 정리할 동안 후작을 끼고 어딘가 들어가 계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계실 만한 곳을 마련해놓으라 하겠습니다.”

“흠, 나쁘지 않군.”

기분이 완전히 풀어진 더스틴은 의자에서 일어서서 소파로 다가와 라세트 공작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 날 찾아온 용건은 뭐지? 그날 일을 준비하려면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쁠 텐데.”

“바쁘기는 합니다만 추가된 사항이 있어 말씀드리려고 들렸습니다.”

“추가된 사항이라고? 뭐지?”

별거 아닐 거라 생각하고 물었던 더스틴은 라세트 공작의 대답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날 신전에 폭탄을 설치할 겁니다.”

“뭐?”

“상황이 여의치 못하면 터트릴 생각입니다. 그래야 폐하도 황후도 3황자도 한꺼번에 보낼 수 있을 테니까요.”

마치 차 한 잔 마시자고 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하는 라세트 공작을 보며 더스틴은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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